brunch

매거진 MOVING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용 Jul 19. 2023

《버드박스》 미지의 존재보다 악랄한 사람

그게 바로 나야 나

《버드박스:바르셀로나》에서 세계가 멸망한 이후 상황이 그려지는데,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미지의 존재보다도 더 악랄한 존재로 묘사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회가 혼란에 빠지기 전까지는 사회에서 소위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던 사람들이다. 미지의 '그것'을 보면 정신이 이상해져서 자살한다는 설정으로 인해, 원래 앞을 보지 못했었던 시각장애인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또한 '그것'을 보더라도 정신 기능에 이상이 있어서 치료가 필요하다 진단받았던 정신장애인들도 살아남았다. 이들은 미지의 '그것'을 보면 자살한다는 단 하나의 조건 변화로 인해 최하층의 먹잇감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거듭난다.


영화적 상상이 포함된 조건이기에 현실에서는 없을 것 같지만, 내 삶에도 단 하나의 조건 변화로 먹잇감에서 포식자로 바뀌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당연한 것일수록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특히 이미 쟁취한 사랑이 그랬다. 스무 살부터 떠올려 보더라도 애 닳고 절절했던 것은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얻기 전까지였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전까지는 내 돈과 명예, 시간 등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순간까지는 상대 앞에서 명확한 최하층 먹잇감이다.


일단 상대에게 나를 인식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꾸만 눈에 띄려 노력한다. 가령 별에 별 시답지 않은 이유를 들어가며 상대의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혹여나 상대와 눈이 마주치거나 자연스레 인사라도 할 수 있다면 작전 성공이다. 아마 만보기로 당시 걸음을 세었다면, 이 시기에는 매일 만보가 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상대와 의도적 마주침으로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내가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장점을 공작새 깃털 펼치듯 선보인다. 상대의 관심사를 파악하여 동조하거나, 반대로 직접 호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당연히 상대가 거절하는 경우도 있는데, 나만이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고 세상에서 상대를 가장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임을 몇 번이고 표현한다.


그러다가 상대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고, 만남을 이어간다. 만나기 이전까지는 앞으로 있을 내 모든 순간을 상대에게 주려 마음먹는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가 나를 더 사랑하게 되고, 내 관심을 애 닳아하고, 곁에 없이 단 일초도 견딜 수 없어서 내게 매달리는 상황이 되면, 나는 한순간에 최상위 포식자가 된다. 포식자가 되면, 상대는 내 중요순위에서 후순위로 밀려난다. 상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저 나와 상대의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미지의 조건이 바뀌며 내가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압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  Bird Box Barcelona of NETFLIX. All right reserved.

《버드박스:바르셀로나》에서도 이 최상위 포식자들은 눈을 가린 채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인다. 시각장애인과 이제 막 눈을 가리기 시작한 사람은 애초에 앞을 보지 않는 것의 익숙함 정도가 다르다. 간혹 장애인복지관에서 시각장애 체험을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옆의 보조자 없이는 거의 단 한 발자국도 떼기가 힘들다. 시각장애인들은 눈 가린자들을 때리고, 음식과 생존에 필요한 도구들을 빼앗는다. 심지어 정신장애인들은 눈을 뜨고 다녀도 상관없다는 설정이라 더욱 악랄한 존재가 된다. 아직 '그것'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눈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천을 강제로 빼앗고, 눈을 뜨도록 만든다. 영화에서 이 포식자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지 못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내가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을 때를 돌아보면, 상대에게 내 모든 것을 내어주기보다 오히려 나 자신을 우선시했었다. 누가 봐도 이해하지 못할 이기적인 모습이었지만, 그때는 스스로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매번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을 먹는다거나, 해외로 여행을 함께 가게 되더라도 일정은 상대에게 미뤄 버린다거나, 친구와 술 한 잔 마시는 것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상대에게 속상함을 이야기하는 등 내가 오히려 손해를 본다고만 느꼈다. 그것이 먹잇감의 강제된 배려에 의한 이기적인 모습인지도 몰랐다.

ⓒ Ingo Stiller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하지만 이미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버린 나에게 상대는 힘없는 먹잇감일 뿐이고, 다툼의 끝은 내가 악랄하게 승리했다. 그 모든 이기적인 행동을 이해해 주는 여자친구가 세상에 어딨냐며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승리의 도취감에 빠져 타인의 말 따위 듣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게 가능한 이유가 내게는 헤어 나올 수 없을만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라며 큰소리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내가 연애 상대로 얼마나 모자란 사람인지를 깨닫는데만 자그마치 십 년이 걸렸다. 서른셋의 현재는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상처 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만남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제는 상대와 지속적인 사랑을 나누는 방식을 알 것도 같지만, 다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면 결국 반복할 것만 같은 두려움마저 생겼다.


<버드박스>의 최상위 포식자들은 끝내 그 이기적인 행동을 버리지 못한다. 사랑을 하면 오히려 스스로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상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내가 그토록 이기적이었음을 안다. 이제는 사랑할 준비가 된 것만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이기적인 사람인 것을 알아서 사랑을 포기한다. 내가 끝끝내 먹잇감의 상태에서는 사랑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아서 사랑을 포기한다. '이기심'이라는 미지의 존재를 나는 끝내 저항하지 못했다.


내 삶에서 단 하나의 조건 변화로 최하위 먹잇감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되는 것은 이것뿐만 아닐 것이다. 내가 최하위 먹잇감이었을 때를 기억할 수 있다면, 이기적이기만 한 최상위 포식자로 살아가지 않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먹잇감이었을 때와 포식자가 되었을 때의 간극에 존재하는 악랄함은 그래서 더욱 도드라진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힘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는 이 악랄함을 관리하려면, 내가 포식자의 상태에서 먹잇감으로 언제든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포식자와 먹잇감, 그 간극을 줄여나가는 것이 삶의 지혜일 지도 모르겠다.


ⓒ  Bird Box Barcelona of NETFLIX. All right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피의게임》은 불공평합니다만, 현실은 공평합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