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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May 18. 2023

《피노키오》와 차별, 그리고 혐오

피노키오는 영화 속 세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다. 왜냐하면 피노키오는 푸른 요정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피노키오가 성당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피노키오를 두려워하고, 불결한 존재라고 웅성대면서 좇아내기 바쁘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기 때문에, 그들의 신 하느님이 아닌 다른 권능한 존재로부터 생명을 얻은 이질적 존재인 피노키오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들이 있다. 소수자들이다. 이를 테면 여성, 장애인, LGBTQ+(성 소수자), 이주노동자 등이 있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중에 특정 집단의 수가 적다고 해서 차별이나 혐오 대상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 예를 들어서 열명 중에 아홉 명이 장애를 가진 상황에서 한 명의 비장애인은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반대의 주장도 옳아야만 한다. 즉 열명 중에 한 명이 장애를 가졌다면, 그 장애인 또한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들은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여성을 단순히 아기를 낳거나 집안일을 해야 하는 존재로 바라보거나, 장애인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는 이동권을 얻어내기 위해 시위를 해야만 하고, 성적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성소수자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이주노동자의 돌봄 노동을 최저임금 대상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히 수가 적다는 것이 차별이나 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부자'나 '권력자'도 소수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아닌 것은, 우리 사회가 부자의 '돈'을 동경하거나 권력자의 '힘'을 원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나 권력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은 소수자이지만, 돈과 힘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지 않는 듯하다.

이질적이라는 것과 그 수가 적음은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힘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고, 차별과 혐오를 만든다.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과정이 반복되면, 차별이 된다. 이를 테면 장애인들의 이동권은 우리 사회에서 늘 후순위였다. 국토교통부의 자료에 따르면 저상버스의 도입 현황은 25% 남짓이다. 만약에 내가 버스를 타러 갔는데, 3대는 저상버스가 아니라서 떠나보내야만 한다면 과연 나는 납득할 수 있을까? 아마 일상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2021년 교통약자법이 개정되었다. 개정된 법에 따르자면 버스가 노후화 등의 이유로 교체가 필요할 때, 저상 버스로 교체해야만 한다. 하지만 시외버스는 저상 버스 의무에 포함되지 않으며, 다른 조항들로 인해서 예외 사항들이 있어 저상 버스로의 교체가 원활하지 않다. 쉽게 말해 내가 교통약자라면 생활하는 부산시를 넘어 다른 곳으로 가기 어렵다. 일상생활에서도 4대 중 1대만 버스를 탈 수 있다. 즉 일하러 가거나, 친구와 술 한잔 마시러 나가기 위해서 3대 놓칠 것을 각오하고 일찍 나가야만 한다. 심각한 것은 이 악몽 같은 현실이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내가 장애를 가졌고 직장에서 근무를 한다 가정하면, 외근을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타 지역으로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직장을 잃을 것이고, 소득 없이 살아야 한다. 아마 국가에서 지급하는 장애연금이나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서 평생을 살아가며, 소위 부자가 되는 신분 상승의 삶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꿈꿔야 한다. 최저한의 삶을 살 수 있는 국가 지원으로 살아야만 한다면 자존감이 높을 수 없다. 당연히 나는 온전히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을 것이다.


교통 약자의 이동권 투쟁은 단순히 이동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생존권 투쟁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항상 후순위다. 누군가에게 생존을 위한 투쟁은, 누군가에게는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이 된다. 20년이 넘도록 생존과 인권에 대한 요구를 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 예산 투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국회의 답변만 반복된다. 국회는 개인과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반복된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가 어떻게 장애인을 차별해 왔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또한 차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of NETFLIX. All right reserved.

피노키오는 성당에 나무로 만들어진 예수 형상을 가리키며 아버지인 제페토에게 묻는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다들 저 사람을 좋아해요. 저 사람한테 노래해요. 저 사람도 나무잖아요. 저 사람은 좋아하면서 난 왜 안 좋아해요?". 제페토는 대답한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을 무서워할 때가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 널 알고 나면 좋아하게 될 거고, 그다음엔...".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피노키오는 같은 나무 목각인형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자신은 혐오의 존재가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제페토는 차별을 없애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잘 모르는 것이 무섭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면 차별이나 혐오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학교에 보내기로 한다. 학교에 다니는 장면은 이야기 전개 상 끝내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피노키오가 두렵고 혐오해야 되는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차별과 혐오를 없애고 줄여나가는 과정은 명확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먼저다.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단순히 이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임을 이해하고, 내 생각을 바탕으로 사회 변화를 위해 목소리 내야 한다.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질적이기만 했던 존재가 내 속에서 섞여 나 또한 새롭게 태어난다. 이 과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차별과 혐오가 사라지는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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