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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Nov 09. 2023

저는 '탈 가정 청년'입니다.

나는 햇수로 오 년 전,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해 원룸촌의 주민이 되었다. 물론 용돈을 받지 않은지는 오래됐지만, 독립한 것에 있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서른이 되기 전에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독립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 집에다가 손을 벌릴 수 없었다. 스물아홉 살 청년의 독립에 당면한 문제는 당연히 집이었다. 대출을 받았지만 아버지로부터는 도움 받지 않고 나는 1인가구 청년, 독립 청년, 탈 가정 청년이 되었다.


브런치에서 구독한 작가의 글을 통해 '탈 가정 청년'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알림을 통해 제목을 봤을 때, 처음 들어본 단어임에도 희망에 찬 긍정의 느낌 보다도 염려되는 듯한 부정의 느낌을 받았다. '탈 가정'이라는 어감 때문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단어는 이를테면 '탈북민', '탈조선', '탈중소'와 같이 빨리 벗어나야만 하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의 글을 끝까지 읽고서 모든 것은 편견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예비 사회적기업인 <282북스>에 따르면 '탈 가정 청년'은 가정폭력, 정서적/경제적 학대, 아웃팅 등의 이유로 원래 가족과 물리적, 경제적, 정서적 단절을 선택한 청년을 뜻한다. 이 단어를 되뇌며 곱씹어 보니까 '탈 가정 청년'이라는 단어의 핵심은 '탈 가정'보다는 '선택'에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사회복지 현장에서 사용하는 '보호종료 아동'이나 '자립준비 청년', '요보호 아동' 등은 그들이 오롯이 타자에 의해 관리되고 보호받아야만 하는 대상으로 읽힌다.

ⓒ Sandy Millar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탈 가정'에 초점을 맞추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랫동안 견지해 온 '정상 가족'의 틀에서 보기 쉽다. 과묵하지만 말보다는 행동으로 사랑을 전하는 아빠, 잔소리가 많지만 누구보다도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 사소한 이유로 치고받고 싸우지만 막상 없으면 허전한 형제들. 이 완벽한 정상 가족의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청년은 이상하고도 특이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택'에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다양성이 생길 수 있다. 2022년을 기준으로 1인 가구는 34.5%를 넘어섰고, 흔히 결혼 적령기라고 하는 연령대의 남성은 47.1%가 미혼인 상태고, 2023년 2월에 동성부부의 배우자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법원 판결이 우리나라에서 나왔다. 이처럼 가족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가진 정체성에 가깝게 살 수 있다. 주변에 너무나 많아진 1인가구를 색안경 끼고서 보지 않는다면, 비혼의 가족 형태도, 동성 부부의 가족 형태도, 탈 가정을 선택한 청년들도 문제 될 것이 하등 없다.


탈 가정을 선택하기 위해서 그들은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먼저였을 것이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또한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지, 현재의 상황과 환경에서는 나로서 온전히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탈 가정을 선택한 청년이다.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청년에게 연민과 안쓰러운 시선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기쁨과 응원의 박수를 쳐야 마땅하다.


나는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가 인식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시설의 입장 혹은 대상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요보호 아동과 같은 단어가 적합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단순히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 개인으로 본다면 이 단어는 적절치 않을 수 있다.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 이를 지극히 잘 보여주는 단어가 '탈 가정 청년'인 듯하다.

ⓒ Amirr Zolfaqari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물론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비자발적인 탈 가정 청년도 우리 사회에는 존재한다. 아동보호 전문기관이나 행정 기관으로부터 분리 조치되어 일시 보호 쉼터나 생활 보호 시설로 가는 경우가 그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내밀한 사정들을 살펴보면, 각종 폭력과 학대의 상황 속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원가정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이를 선택하도록 하는 사회적 시선도 함께 한다. "그래도 부모인데...", 혹은 "집 나가면 행복할 것 같지? 나가는 순간부터가 고생 시작이다."와 같이 사회의 통념과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탈 가정을 선택하지 못하는 청년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탈 가정'이 선택가능한 대안임을 몰라서 선택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알고 있는 것 중에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애초에 제시된 선택지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를 탈 가정이 필요한 청년뿐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도 전달이 필요하다. 탈 가정을 선택한다고 해도 청년 쉼터나 생활 시설, 상담 센터 등 사회가 청년의 필요에 따라서 보호할 수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그제야 비로소 탈 가정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전세자금 대출을 받고, 스물일곱부터 시작해서 삼 년 간 모아뒀던 쌈짓돈을 털어 보증금을 마련했다. 보증금 일억에 신축 투룸을 구했고, 나는 난생처음 탈 가정 청년이 되었다. 지인들은 '재용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장 한 달여 동안 집들이를 왔다. 비록 내가 원가족의 학대로 탈 가정을 선택한 것도, 현재 단절한 채 지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탈 가정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탈 가정을 선택했다. 단어가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가 퇴색된다고 나무랄 사람도 있겠지만, '탈 가정 청년'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많이 쓰여 선택 가능한 것임을 알린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시기에 차이만 있을 뿐, 탈 가정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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