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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Oct 10. 2023

사회복지사와 사회복무요원의 시간의 가치가 다릅니까?

직장인이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커피를 빈속에 때려 붓는 것이다. 그 즉시 머릿속에 마구 뒤엉켜 복잡한 잡념들이 사라지고, 모니터와 문서만이 또렷하게 보이는 집중의 순간에 빠진다. 햇수로 7년 차 직장인이 된 나는 이제 빈 속에 커피를 마셔도 속이 쓰리지 않다. 오늘도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게 컴퓨터를 켜 놓고,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커피를 준비하려 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원두의 신선도와 분쇄도, 원두의 특성에 맞게 볶은 정도, 종이 필터와 드리퍼 등 많은 요소와 도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원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물이다. 나는 라면이나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것처럼 요리를 할 때는 수돗물을 끓여서 사용하지만, 커피를 마실 때만큼은 필히 정수된 물을 사용한다. 따라서 나는 1.8L짜리 물병을 들고 복지관 1층 로비에 있는 정수기로 향했다.

ⓒ Bluewater Sweden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정수기는 양쪽 방향에서 접근이 가능한 모퉁이에 설치되어 있다. 나와는 다른 방향에서 한 남자가 텀블러를 들고 정수기 쪽으로 다가왔다. 내 느낌이긴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 남자가 정수기 앞에 먼저 도착했던 것 같다. 대략 걸음걸이로 계산하자면, 0.75 보폭 정도였던 듯하다. 텀블러를 가지고 나보다 먼저 도착한 남자는 복지관에서 근무 중인 사회복무요원이었다.


그는 내게 먼저 물을 채워갈 것을 권했다. 나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의 양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평소에 나였다면 내가 먼저 도착했다 하더라도, 상대의 텀블러를 보고 기꺼이 양보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텀블러는 적으면 300ml에서 기껏해야 500ml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사용하는 물병은 1.8L이니까, 최소 3배에서 4배 정도 물을 더 받아야 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상대를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보다, 상대가 나를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더 길다.


그러나 사회복무요원은 작은 텀블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또 본인이 먼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1.8L짜리 물병을 들고 있는 내게 차례를 양보했다. 나는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냉큼 물을 먼저 받았다. 물을 500ml쯤 받았을 때였다.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문득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그가 나를 위해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보다도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양보를 당연히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정녕코 후회했다. 그때부터 나머지 1,300ml의 물을 받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커피는커녕, 받아 온 냉수를 벌컥벌컥 마셔서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 Jp Valery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내가 너무도 당연히 받았던 그의 양보는, 철저히 돈의 논리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 사회복지사로서 그가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면서 받는 것보다 많이 받는다. 따라서 복지관 안에서는 그의 시간보다도 내 시간이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것을 배제한 채, 오직 돈을 기준으로만 둔다면 말이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사회는 돈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세상이다. 돈으로만 사람들을 판단하는 순간, 효용가치에 따라 사람을 판단해야만 한다. 그때부터는 복지관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더 이상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그 즉시 실적에 채워지는 숫자가 된다.


만약에 시간의 가치를 오직 돈으로만 환산하면, 관계는 일방향성을 띄기 쉽다. 이를테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과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명확히 나눠지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의 가치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시간에 별 다른 노력 없이도 가치가 낮은 사람의 시간과 노력을 쉬이 돈으로 살 수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시간의 가치가 낮은 사람은 가치가 높은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력이 적을 수밖에 없다. 내가 투여하는 노력의 시간들을 선택할지 말지는 상대에 의해서 선택되기 때문이다.


혹여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일종의 관계라고 볼 수 있지만, 이 관계에서는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오롯이 결정권을 가지기 때문에 상호적인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 듯하다. 결국 '손님은 왕'이라는 식의 갑질 문화들이 확산되기 좋은 일방향적 관계가 재생산된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주고받는 행위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상대의 시간을 오직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상대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내 명령을 응당 수행하는 기계처럼 보기 쉽다. 누구나 그렇듯 사람이 아닌 기계를 작동하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를테면 행정복지센터나 복지시설에서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사람들을 하대하는 몇몇 악성민원인들처럼 말이다.

ⓒ Eugene Tkachenko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이러한 구조가 굳어지면 시간당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가 높은 사람은 그 가치가 낮은 사람 여럿과 같아질 수 있다. 이러한 피라미드 구조에서는 상명하복 시스템이 효율적이다. 따라서 시간당 돈의 가치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아래로 내려 보낸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구조 자체가 왜곡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처음에는 양방향의 소통으로 시작할지 모르지만, 아래로 한 단계나 혹은 두 단계를 지나면서 강압적인 명령으로 바뀌어 있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즉, 소위 '라테'를 외치는 꼰대 문화를 향유하기 좋은 일방향적 관계가 된다.


내가 인턴으로 근무했던 때도 생각났다. 내가 대체로 부여받은 업무는 한 직원을 단순히 보조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기계와 같았다. 가령 회의자료를 출력해 정리한다던가, 지정해 주는 페이지를 복합기 앞에 온종일 서서 복사한다던가, 수십 개의 통장을 정리한다던가 하는 일들 말이다.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내 시간들이 직원의 시간보다 가치 없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인턴으로서 할 수 있는 업무 권한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나는 직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 가장 우선 목표였던 것 같다. 그 사회복무요원도 내 느낌과 비슷했던 걸까.


거듭 말하지만 주민들과 관계들을 만들어가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복지사의 시간 가치를 단지 돈으로만 결정해서는 안된다. 가령 사회복지사는 자신의 한 시간을 만 원에 노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 판단 근거 중에 하나 일 뿐이다. 사회복지사의 시간 가치에는 돈 말고도 다양한 주관적 판단 요인이 있다. 이를테면 주민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순간들의 역동, 다양한 접점들을 사회 변화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는 창의성,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회복지사로서의 소명의식 등 주관적 가치까지 더해야 한다. 추측컨대 주관적 가치가 포함되어 시간의 가치를 고민한다면, 개인이 가지는 시간의 가치가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사회복지사인 내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로서 근무하고 있는 사회복무요원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처럼 시간의 가치는 돈으로만 치환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수기 물을 받으며 사회복무요원의 배려를 당연히 여겼다. 내가 사회복지사로서의 소명을 갖고 업무를 하는 것처럼, 그 사회복무요원도 국가의 부름을 받아 복지관에서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며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테다. 나는 사회복무요원의 시간이 내 것과 가치가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음을 전하고 싶었다. 내 생각에 사회 변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의 시간 가치는 주관적이며 복합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가치가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그의 양보로 기다리지 않고 받아온 정수기 물을 커피로 바꿔 그에게도 권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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