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중 윤명희는 평생을 아들만 위해 살았다. 아들만을 위해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에 전부 나오지 않았지만, 상상으로 그 공백을 충분히 메워볼 수 있다. 언청이(구순구개열)로 등장하는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졌다. 언청이라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고, 따라서 사람들과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 어려움이 컸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을 주고 그녀를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지만, 결국은 버림받는다.
어떠한 감정이 됐건 그녀를 아끼고, 지켜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오직 그녀의 첫째 오빠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깊이 의존했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삶에 대한 집착인지, 의존인지 아마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 가지 감정이 혼재되어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들은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채 함께 살았고, 아기를 낳았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아들이 자신처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게 하지 않으려면 그녀는 철저하게 숨어 살아야만 했다.
그녀의 조카인 동시에, 그녀 남편의 딸이기도 한 윤서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삶을 온전히 부정한다. "당신들 도대체 무슨 쓰레기 같은 짓을 한 거야. 대체?". 윤서하에게는 객관적 사실로서 근친혼과 근친상간은 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타인의 사랑이나 삶에 대한 집착이 '쓰레기 같은 짓'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같은 객관적 사실이 그녀를 범죄자로만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녀를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향한 혐오의 시선은 정당하지 않았다. 먼저 언청이, 즉 구순구개열은 선천성 안면 기형 중 하나이며 치료가 가능하다. 드라마에서도 나오듯 치료 시기를 놓쳤을 뿐이고,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또한 감염 혹은 전염되는 질환이 아니다. 단지 외모가 조금 다를 뿐이며, 사람은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그녀를 기피할 이유도, 따돌림을 해야 할 이유도, 손가락질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마을 사람 누구도 스스로를 이해해 주지 않는 삶을 고독하게 버텼을 것이다. 겨우 용기를 내서 시도한 것이 산에 올라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살도록 해준 존재는 세상에 오직 한 사람, 가족인 오빠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아마 삶의 구원자였을 것이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세상을 대신할 수 있는 세상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빠임과 동시에 남편이 죽었다. 그녀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존재인 아들에게 의존하며, 자신의 세상을 아들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드러나지 않도록, 사회로부터 격리되도록,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도록 강요받았던 세상이다. 과정은 전부 무시한 채 결과적으로 그녀를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윤명희에게 '선산'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다. 자신의 아들이 가져야만,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증명할 수 있는 준거가 된다.
물론 극 중 그녀의 범죄 사실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장애뿐 아니라 소수자, 정치 등에 대한 각종 혐오를 감추지도 않는 듯하다. 이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면서 극 중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핑계 뒤로 자꾸만 숨고 싶었다. 아마도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숨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일 것이기에 드러내야만 한다. 드러내야 하는 것은 혐오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이해와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이다. 그것이 다른 '윤명희'라는 대상을 다시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