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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un 18. 2024

노키즈존, 배제를 배제합니다.

#1.

나는 타지에 사는 친구와 서핑을 하려고 서울행 KTX를 예매하려 했다. 갑자기 여행하게 된 터라 좌석이 없었다. 대부분 자리가 없지만, 기차의 한 호차에는 좌석이 여유가 있었다. 내가 예약하려는 호차의 숫자 뒤에는 '유아 동반석'이라는 부연 설명이 있다. 나는 다른 호차에도 자리가 있지만 유아 동반 가능 호차에 좌석을 예매했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로 유아 동반 가능 호차에는 좌석이 남아있었다. 나는 역시 그 호차를 타고 부산으로 왔다.

ⓒ Charlotte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어린이도 객실 예절을 지킬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KTX에서 출발할 때, 나오는 안내 음성이다. 아동은 기차를 탑승하는 동시에 예절이 없는 존재로 상정되는 듯했다. 큰 소리로 하는 대화와 듣기 싫은 소음은 아동만이 낼 수 있는 것은 아닌데, KTX는 아동을 예절 없음의 주체로 대상화했다. 우연이겠지만 왕복 기차에서 아동은 볼 수 없었다. 불편함이 가득했던 안내 덕분에, 편안한 여행을 책임진다는 기장의 말은 허언처럼 들렸다.


#2.

노키즈 존 카페에 갔다. 아동 입장이 제한된 것을 알고 갔던 것은 아니고, 입장하고서야 노키즈 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야생화 일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난생처음 보는 꽃과 식물이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아이처럼 신나서 꽃이나 식물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우와!!! 이 꽃에는 별이 있어요!"라며 들떠서 지인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암술과 수술은 마치 별이 반짝 빛나는 형태와 같았다.

ⓒ Holly Landkammer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호기심이나 관심이 많은 것 치고, 나는 꽃이나 식물을 잘 모른다. 옆에 있던 지인은 내 무한한 질문에 답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 '어른들의 정원'을 거닐었고, 나는 마치 아이처럼 신났다. 우리 부모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삼촌은 꽃 공부 좀 해야겠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이거 이름 외워도 금세 돌아서면 잊어버리더라고요". 나는 그 순간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충분히 아이와 같은 행동을 했지만, 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배제를 일삼는 공간에서 나는 배제되지 않았다.


공저를 함께 준비하는 작가님이 전국을 여행하던 중, 부산에 왔다. 공저는 줌으로 써 왔기에 실제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과 함께 만나도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얼마든지 괜찮다고 말했다. 7살과 11살 아이와 작가님 부부, 그리고 나는 저녁을 함께 먹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는 듯이 서로의 글쓰기부터 현재 사회 문제까지 폭넓게 이야기 나눴다. 그러던 중 7살 아이가 말했다. "어른들끼리 이야기하면 끝이 없어". 아이들의 장난이 이어지자 작가님은 난처해하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아이들이랑 다니다 보면, 정신없을 때도 있어요".

ⓒ Allen Taylor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나는 '내가 어렸을 때 그들보다 더 천방지축이었던 것 같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개구쟁이였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무서워했던 큰 집에 가서조차 가만히 있지를 못해서 소파 위를 뛰다가 혼난 것이 셀 수 없다. 혼나도 잠시 뿐, 다시 온 집 안을 뛰어다녔다. 감당이 안 되자 큰 엄마는 사촌 형과 누나에게 나를 데리고 근처 학교 운동장에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그렇게나 천방지축이었음에도 내가 가지 못하는 곳 따위는 없었다.


배제를 일삼는 공간은 일상에서는 이미 흔한 일이 된 듯하다. 기차에서의 간접적인 배제와 노키즈 존 카페처럼 직접적인 배제를 경험하며 불편함을 넘어서 거북한 마음마저 들었다. 나는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든 시끄럽게 하고, 뛰어다니고, 보호자는 이를 방치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며 이해받은 것이 먼저 떠올랐다. 저출생이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길에 뛰 노는 아이가 적다 보니,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절대적으로 적어진 듯하다.


나는 배제가 일상이 된 사회가 '서로에 대한 이해', 특히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부재가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충분히 이해받고 자랐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않음을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심지어 가본 적은 없지만 노줌마 존, 노펫 존, 노시니어 존이라는 곳도 있음을 안다. 이것은 어렸을 때 나에게 배려했던 당시의 어른들에게 조차 배신적 행위임을 안다. 물론 내가 적극적 배제 행위를 하거나 장려하지 않겠지만, 이를 문제시하지 않는 것 또한 소극적 배제 행위나 다름없다. 나는 소극적 배제조차 배제하는 것이 배려받으며 자란 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소극적 배려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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