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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ug 05. 2024

수상할 정도로 활, 총, 칼을 잘 쓰는 나라

2024년 파리 올림픽이 한창이다. 현재 이 글을 쓰는 8월 3일(토), 오후 기준으로 대한민국은 총 16개의 메달을 땄다. 그중 9개의 메달이 활, 총, 칼에서 나왔고, 9개 중에 7개는 금메달이다. 물론 종목에 따라서 아직 경기가 진행되지 않았거나 아예 출전하지 못한 것도 있을 테다. 하지만 활(양궁), 총(사격), 칼(펜싱)은 수년간 금메달을 독식할 정도다.


뻔한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사람 모두 혹은 평균적인 사람이 활이나 총, 칼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육상이나 수영처럼, 이 종목에 특화된 신체 구조를 가진 것도 아니다. 평범한 한국인은 일상생활에서 활이나 총, 칼을 구경하는 것조차 힘들다. 다시 말해서 이 능력을 발견하기 쉬운 구조가 아니다. 만약 우리 삶에 익숙한 것이라서 잘해왔던 것이면, 총기 소지가 합법화되어 있는 미국이 사격을 압도해야 맞다.

무용총 수렵도(우측 상단에 파르티안 샷)

간혹 민족의 유전자에서 그 능력을 찾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것도 조금의 왜곡이 있다. 고구려인이 활을 잘 쏘았다는 것도 달리는 말 위에서, 뒤를 향해 쏘는 '파르티안 샷'을 집단 형태로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인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개인은 '파르티안 샷'을 쏠 수 있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활쏘기는 우리 민족 고유 기술이 아니라 전 세계 보편적인 기술이며, 옛날 군인은 정확하게 쏘는 것보다 멀리 쏘는 것이 중요했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도 전쟁에서 정확하게 조준해 움직이는 한 명을 맞추기란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일정하게 먼 곳에 활을 쏴서 움직이는 적을 맞추는 것이 전략이었다. 간혹 드라마에서 왕이나 귀족이 화살 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테다. 귀족은 과녁을 향해 정확하게 활 쏘는 것으로 심신 수양이나 유희가 되었을 수 있으나, 이를 민족의 특수성으로 이야기하기란 어렵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이라면 군대에 가야 하고, 군 복무 과정 중에 총을 쏠 수 있다.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사격 연습이라는 느낌보다 총알 소비에 가깝다. 총을 나의 몸에 맞게 영점 조절하지 않고 쏘는 경우도 많고, 발사된 총알이 어느 정도 가깝게 모이는 탄착군 형성도 안 되는 경우도 많고, 가장 정확도가 높은 '엎드려 쏴' 조차 호흡 불량 등으로 제대로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다시 말해 군대 사격이 올림픽 메달에 도움이 안 된다. 이는 전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징병제를 시행하지만, 사격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장황하게 썼지만, 사실 양궁이나 사격, 펜싱 등은 엘리트 체육이다. 국가 주도의 체계적 양성이다. 일상생활에서 능력이 익숙한 것도, 능력 발굴이 쉬운 것도, 특화된 신체나 민족 특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뉴스나 올림픽 중계에서 대한민국 선수가 메달을 따면, 마치 자신이 메달을 딴 듯 함성을 지르고, 열광하며, 기뻐한다. 그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우리나라 사람은 정도와 경향이 깊다.


김경일 심리학 교수는 이를 집단주의가 아닌 관계주의라 말한다. 사회 구성원을 가족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인구 집단이라서 보다, 관계성을 기반으로 가족처럼 느끼기에 동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동조가 주위 다른 사람보다 현저히 낮다. 왜냐하면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가지는 기회가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명명하기에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이나 갈등을 겪고,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은 모를 우리만의 이야기가 쌓이고, 관계를 바탕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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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가족으로 정체성을 확장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고는 국민으로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나에게 '애국심'이 없다며 비난하기에 바쁘다. 나는 나와는 삶의 방식도 다르고, 함께 나눈 기억도 없고, 이야기 한 번을 해본 적 없는 대한민국의 손흥민 선수보다도 20년 넘게 응원하며 쌓은 기억과 감정이 있는 상대팀 외국 선수를 가족이라 느낀다.


외국 선수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과연 국민에게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관계를 충분히 만들어 줬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전후 시대에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와 주위에 대부분이 가난했던 국민은 동조 기억이 많을 것이다. 함께 가난했고, 힘들었고, 이겨낸 기억을 공유할 테니 말이다. 다만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에게 당연한 감정으로서 '애국심'을 강요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나 역시 'IMF'라는 고난의 시간을 함께 기억하긴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양극화나 각자도생으로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것이 쉽다. 애국심을 느낄 기회가 없었다.


나라마다 범죄를 정의하는 것이 다르기에 치안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치안이 좋기로 유명하다.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폭력보다는 안전에 가까운 나라에서, 수상할 만큼이나 활과 총, 칼을 잘 쓴다. '역시 양궁은, 사격은, 펜싱을 한국이지.'라며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빈부 격차뿐만 아니라 극단으로 치닫는 정쟁과 다양성 없이 획일화만을 원하는 양자택일의 답안,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도록 만들어 더욱 외로운 시대를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쉬이 설명한다. '이게 나라냐.'라며 한탄하는 것이 익숙한 사회에서 국민으로 '애국심'이라는 것을 갖는 게 이상하다.

나는 '애국심'을 강요하기보다 자연스레 '애국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을 바탕으로 양극화를 줄여나가고, 언제 어디에서도 나의 말과 행동이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믿고, 혼자 책임지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에서 살아가면 애국심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4년마다 돌아오는 국가 행사에서 애국심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4년 동안 계속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족 같은 느낌으로 느껴질 때 비로소 애국심이 내 속에 자리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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