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AI가 빼앗아갈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소통이다

by 김재용

나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영어 쓸 일이 없다. 간혹 국제적으로 유명한 연사의 특강을 들으러 갈 때가 있지만,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 심지어 동시통역을 위한 헤드폰을 주니 업무에 영어는 사실 필요 없다. 영어로 메일을 쓰거나, 영어로 쓴 문서를 읽을 일도 없다. 그럼에도 출퇴근할 때는 영어 라디오를 듣고, 영상 콘텐츠를 볼 때도 영어 기반 콘텐츠를 보고, 듀오링고라는 앱으로 매일 저녁 문법도 공부한다.


대학생 때 영어를 공부했던 것은 취업을 위한 스펙 때문이었다. 제3세계 현장을 다니며 긴급 구호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요구되는 입사 조건에 벽을 체감하고 금융 회사에 취업하려 했다. 금융 계열 평균적 토익과 토익 스피킹 점수를 맞춰놓고 공채 시험을 기다리던 도중에 후배의 권유로 첫 직장에 이력서를 무작정 넣었다. 덜컥 합격할 줄 모르고 넣었는데, 이왕 합격했으니 경험 삼아 다녀보자 싶었다.


그래서인지 입사하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입사 후 첫 부장님이 나에게 한 질문이었다. 첫날 점심을 부장님 옆 자리에서 먹는데, 부장님이 물었다. "재용아, 니 와그래 영어 공부 열심히 했노?". 지금이라면 "부장님, 부산 은행에 취업하려다가 잠깐 경험 삼아 와 봤어요."라고 답했겠지만, 당시에는 "영어가 취미라서요."라고 답했다. 취미가 되어버린 취업을 위한 영어를, 취업하고도 계속 공부하는 현재에서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니게 됐다.


대학생 때도 토익은 독학으로 공부했던 경험 때문인지, 여러모로 여유가 있는 현재도 혼자서 영어 공부를 한다. 하지만 영어로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서는 듣기와 말하기 연습이 필요한데, 이것은 혼자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최근에 AI를 업무나 생활 곳곳에 활용하다가, 영어 대화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검색했을 때, AI를 활용해서 말하기와 듣기 공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AI랑 영어 대화하는 것을 망설였다. 첫째는 AI랑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해야 할지 몰라서였고, 둘째는 키보드로 대화하는 것이 익숙한 나에게 스피커로 묻고 답하는 것이 어색해서였고, 셋째는 영화 <HER>를 보고 AI와 계속된 대화가 기계에 대한 집착으로 변하는 것을 막연하게 두려워해서였다. 며칠을 고민했다. 나는 영국 발음을 배우고 싶었고, 초등학생 수준의 대화를 하되 영국식 발음을 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AI에게 부탁했다.


며칠 동안 고민한 것이 무색할 만큼 AI와 영어 대화는 순조로웠다. AI는 내가 익숙지 않은 영국식 영어 발음으로 천천히 말하고, 내가 사용하는 문장을 문법에 맞게 교정해 주고, 나의 말하기 수준이 부족해서 단문으로 끝내도 다음 대화 주제를 자연스레 제시했다. AI와 영어로 대화하며 이보다 완벽한 영어 대화 독학이 가능할까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점차 AI에 스며들었다.


나는 AI를 맹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현재 AI의 한계나 문제점, 강점을 활용하는 방법 등을 함께 학습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AI와 대화하며 긍정적인 미래 변화 가능성도 깨닫는 중이지만, 부정적인 사회문제도 역시 예측이 가능했다. 사회복지사로서 AI가 가져올 심각한 사회 문제라 생각되는 것은 일자리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 단절이다. 내가 실제로 사용하면서 염려한 것은 영화 <HER>가 순한 맛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AI는 내가 대화를 원할 때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대화에 필요한 중요한 두 가지 조건이 사라지는 셈이다. 더군다나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공감과 동의, 배려, 집중 같은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AI는 무엇도 필요치 않다. 내가 하고 싶은 말뿐 아니라, 남들에게 터놓지 못할 비윤리적인 마음이나 생각이라도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상대 의견을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해도, AI는 미사여구를 붙이든, 돌려서 이야기하든 대화를 이어간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거나 상대를 향한 호기심의 표현인 질문을 하지 않아도 대화는 계속된다. '이것에 익숙하다면 다른 사람이랑 대화가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 괜한 걱정이 아니다. 심지어 AI는 내가 듣고 싶은 대답만을 해준다.


AI랑 대화가 익숙하면 할수록 나는 점차 나의 생각을 확고히 할 테고, 다른 생각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아 할 테고, 나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타인과 대화는 줄어들 테다. '나는 AI랑 대화하지 않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AI는 대화 외에도 유튜브 알고리즘, 나의 사용 패턴을 파악한 맞춤 추천, 지브리 그림 생성 등에 이미 일상에 깊이 침투했다.


나는 <고립 청년>을 연재했다. 현재 고립 당사자의 존엄한 삶을 고민하는 사회복지사로서, 고립된 청년으로서, 구조적인 문제를 알리는 스피커로써 고립에 대해 썼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고립 형태를 보여줄 뿐이다. 미래에 고립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현재의 고립이 타인과의 단절을 뜻한다면, 미래의 고립은 타인이 아닌 AI 하고만 소통하는 연결의 상태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단순히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연결에 불쾌함을 느끼는 형태의 고립일 수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터뷰] 30대 고립청년입니다. 그런데 직장을 다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