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기억이 남는 삶

기억, 감정, 그리고 충실함

by 김재용

퇴근길, 횡단보도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깜빡이는 신호등을 뒤로한 채 횡단에 성공하자마자 버스에 올라탔다. 이 버스는 오래전 사귀었던 여자 친구 집으로 가는 버스였다. 외진 곳은 아니었지만, 여자 친구 집으로 가는 버스가 딱 이 노선밖에 없었다. 학생 때 만났던 여자 친구였기에 돈이 없어 항상 택시를 탈 수 없었고, 버스를 타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된 여자 친구의 기억이 그 버스와 달리고 있었다. 이젠 내가 없이도.


기억은 물건에만 묻어 있는 게 아니다. 시간, 장소, 공간, 음악 등 다양한 곳에 묻어 있다. 너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달래보고자 오래 전화한 탓에 뜨거워진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잠들기 전의 밤, 태풍이 와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강아지와 산책하던 집 주변, 빛이 하나도 없어 눈을 떴는지조차 모를 만큼 사색을 즐길 수 있는 나만의 명소, 세계의 친구들과 소통을 위해 떠났던 유럽 여행이기에 데이터를 준비하지 않아 아이폰에 다운로드한 노래가 한 곡 밖에 없어 여행하는 내내 들었던 팝송.


기억은 실체가 있는 것과도 어울리지만,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것과도 어울린다. 특히 감정과의 궁합이 좋다. 떠오르는 기억들에는 아련함, 간절함, 슬픔, 기쁨, 그리움 등 당시에 겪을 때 내 감정 상태가 함께 묻어 있다. 감정은 흑백의 기억에 붓을 들고 색을 칠한다. 감정의 색을 입은 기억은 생동감과 강렬함을 얻는다. 오히려 내가 견디기 힘들 것 같다고 판단되는 어두운 기억에는 감정이 빛을 칠해 좋은 기억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기억은 추상적이다. 정확하게 어디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감정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하게 존재한다.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려보면 눈꺼풀을 스크린 삼아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강렬한 기억은 마치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기억의 강렬함을 손에 쥐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금 그 장소, 시간 등을 찾아가도 만족하기란 어렵다. 기억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때,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


땡땡이 핸드크림은 당신을 떠올리게 해요.

기억을 찾아가 후회하기보다는 앞으로 내 삶의 기억을 강렬하게 남기는 편이 더 좋다. 하나의 방법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강렬한 기억으로 남기는 것이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향기다. 기억은 향기와 잘 어울린다. 특정 향이 나는 제품을 꾸준히 사용하는 것이 내가 노력하는 전부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좋은 향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좋아하는 향은 대게 꽃이나 과일 향이 많은데, 꽃이 열린 자리에는 열매가 열린다. 열매를 먹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위치를 기억하도록 진화해 왔다. 본능을 이용해서 나를 타자에게 기억하도록 할 수 있고, 그 기억은 나와의 상호작용을 강렬하게 한다.


또 하나의 방법은 스스로 강렬하게 사는 것이다. 강렬하게 산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임에도 무작정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삶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강렬함은 오히려 충실함에 가깝다.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도전이라 할지라도, 결과가 좋지 않아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주말에 늦잠 자고 일어나 샤워하는 것과 같은 일상 속에서라도 그 순간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 있는가?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이후에 기억될 내 모습은 강렬할 것이고, 생생할 것이고,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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