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용 Feb 13. 2023

두려웠지만

사람들은 심장이 뛰는 일을 하라고 말한다. 엑스포 공연 팀의 스태프로 일하면서 처음 무대에 올라갔을 때, 격하게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 길로 나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고 각종 공연에서 스태프로 일하면서 어릴 적 꿈이었던 무대 위의 삶을 쫓아갔다. 나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때로는 슬픔과 행복 등의 감정들을 전달하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내가 처음 했던 일은 공연에서 장면 전환을 돕거나 소품을 준비하는 등의 일이었다. 연기나 뮤지컬을 전공한 배우들 중에서도 무대에 오르지 못할 때는 스태프로 일하며 훗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도 스태프로 일하며 언젠간 뮤지컬 배우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하곤 했다. 당연히 스태프로 일 하면서 큰돈은 벌지 못했었고, 오히려 유럽 여행 자금 모으던 것을 까먹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무대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토록 나는 무대에 서고 싶었나 보다.


그러던 와중에 '태양의 서커스'라는 해외 공연팀과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다. 이제껏 내가 경험했던 우리나라 공연팀에서는 무대 뒤에서 아주 작은 소리조차 내면 안 됐지만, '태양의 서커스' 팀은 무대 뒤에서 뮤지션과 댄서들이 공연 음악에 맞춰 흥겹게 즐겼다. 그들은 스태프였기에 꾹 눌러야만 했었던 내 흥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어느덧 그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순간을 만끽했다. 함께 노래하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보컬이 내게 "너 가수야?"라고 물었고, 나는 "응, 나 가수야."라고 답했다. 그는 내게 발매했었던 앨범의 CD를 요구했고, 그제야 어릴 때 꿈이 가수였을 뿐이었고 아까의 대답은 그저 장난이었음을 실토했다.


그는 내가 오디션을 본 적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보컬 레슨을 받아 본 적 있었는지 계속해서 물어봤다. 레슨이나 오디션의 경험도 없었고, 현재는 포기했다고 말하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내게 되물었다. "그런데 왜 포기했어?". 왜 포기했냐고 되물을 때마다 마치 내 머리를 세게, 또 연속으로 때리는 듯했다. 그 되물음들은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했다. 당시에 나는 그의 말마따나 무대에 서는 것에는 도전하지 않은 채, 무대 근처를 기웃거리며 그저 동경만 하고 있었다. 이미 될 수 없음을 가정하고 포기했다.


마치 묵직한 둔기에 얻어맞아 뒤섞여 버린 것처럼 머릿속의 사고방식이 얽히고설켜서 되물음에 대해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기에 심장이 짓눌린 것처럼 답답했다. 답답함을 느끼고 있음에도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는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느껴졌다. 도전하지 못해 부끄러운 나는, 도전하는 그의 눈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가수는 '딴따라'라고 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함께 무대 일을 하면서 꿈을 키우던 동료들 얼굴이, 내 신데렐라 스토리를 응원하지만 결국은 포기할 것을 알았던 친구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얼굴들을 닦아내고, 되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외 공연 팀 아티스트들은 나와 지배하는 문화와 사고방식이 다름을 그때 알게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 연예 시장의 험난함을 알기에 지레 겁먹고 도전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도전에 실패한 존재로서 무대 일을 전전하며 무대 위의 삶을 꿈꾸는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들과 지내는 시간 동안, '꿈이 있다면 언제든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것과 '세계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생각의 폭과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음을 경험하겠다.'라고 다짐했다. 두 가지 목표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아닌 곳으로 당장 떠나야 했다.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의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와 다른 생각들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렇게 당장 떠났던 해외는 유럽이 아닌 일본이었다. 처음부터 목표했었던 유럽으로 가려고 하면 최소한이라 할지라도 경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해외여행의 궁극적인 목표를 소통으로 설정했다. 현지인들과 사소한 것이라도 이야기 나누기 위해 계획 따위는 짜지 않았다. 따라서 여행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국가와 도시를 선택하고, 항공권을 구입했다. 계획이 없으니 동선 같은 것도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숙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게스트 하우스를 선택했다. 현지인의 꾸밈없는 실생활을 보기 위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여행하되, 전통 시장에는 꼭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곳에서 만큼은 우리나라 시장처럼 그들만의 사람냄새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 첫 해외여행은 역시나 시작부터 문제였다. 도쿄의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는데, 글자를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히라가나는 소리 내서 읽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표지판과 간판들에는 가타카나로 써져 있었다. 히라가나를 읽는 데 성공하더라도 읽는 것만 가능했지 의미를 해석하지 못해서 의미가 없었던 데다가, 심지어 예약했던 도쿄의 게스트 하우스 주소는 영어로 써서 갔으니 쓸모가 없었다. 위기에 처한 내가 할 줄 아는 일본 말은 고작 간단한 인사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발만 동동 구르며 공항에서만 3박 4일을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젊어 보이는 한 남자에게 숙소까지 가는 방법을 영어로 물어봤다. 다행히 영어가 가능했던 그는 자신도 도쿄에 간다며 본인을 따라오라 했다. 도쿄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내가 여행하는 동안에 이곳의 어디를 갔으면 좋겠는지, 무엇을 먹었으면 좋겠는지 등 도쿄라는 도시와 여행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다.


시간이 흐르며 여행보다는 그의 직업이나 취미와 같은 사적인 대화도 주고받았다. 그는 영국에서 거주하며 일하는 디자이너였기에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대화가 무르익으며 그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 그의 추천에 따라 낮에는 여행지를 다니고, 밤에는 또래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첫 일본인친구가 생겼고, 최근의 아베 총리가 피살되었을 때도 안부를 물으며 감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클럽을 거뜰떠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일본의 젊은 기운을 느끼고자 한다면 유명 클럽에 가보라고 했던 그의 추천에 용기 내서 그곳으로 향했다. 클럽 안의 술은 비쌀 것만 같아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병 사서 단숨에 들이켰다. 취기에 용기를 덧 입혀서 클럽 입구로 향했고, 입장하려고 했는데 가드가 나를 막아섰다. 내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나는 당당히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옥신각신하는 과정에서 가드는 그저 신분증을 요구할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주민등록증은 해외에서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민망하고 또 무지함에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영어를 전혀 못하는 가드와 대한민국의 주민등록증을 자랑스레 들고 펼쳤던 실랑이는 내 기억 속에 꽤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클럽에 들어가지 못해 낙담하던 와중, 근처에 있던 젊은 여자에게 도쿄에서 좋은 술집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녀는 힙한 술집을 알려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했고, 술집으로 이동하며 무계획 해외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걸어갔다.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무계획으로 여행 중이었던 내가 신기했는지, 그녀는 함께 맥주를 마시지 않겠냐는 내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다 보니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어쭙잖은 영어와 일본어,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하고 놀았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졌다. 그녀는 근처에 있는 자기 집에 가서 짧게나마 잠을 자고 여행을 계속하면 어떻겠냐고 내게 물었다. ‘짱구’라는 만화에서만 보던 다다미가 깔려있다는 말에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짐이 보관되어 있는 숙소를 뒤로하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 집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마실 맥주와 요깃거리를 사서 마시고 놀다가, 소변이 급해져서 화장실에 갔다. 다녀오는 길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안방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자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그녀에게 이 상황은 한국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며 당장 숙소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다이죠브요."만을 연신 외칠 뿐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조금 진정시키고, 다다미가 깔린 방에 앉아 혹시나 그녀의 아버지가 깨시면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고민했다. 사온 맥주를 마시다 보니 고민도 잠시였다. 결국 다다미가 깔린 방에서 잠깐 잠을 자고, 그녀의 아버지가 깨기 전에 도망치듯 나와서 지하철 첫 차를 탔다. 여행하며 일어난 신기하고 다채로운 경험들은 오히려 무계획이었기에 가능했고, 덕분에 그들의 문화와 삶의 양식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도쿄 여행의 경험들은 소통을 우선순위에 둔 내 여행 방식에 확신을 가져다줬다. 도전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치 않음을 알게 했다. 오히려 내게 필요했던 것은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바깥으로 치워버리는 일이었다. 도전하면서 느꼈던 성공의 희열은 나를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고, 실패의 나열은 다음 기회에는 성공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줬다.


여행하며 느꼈던 도전의 경험들에서 실패의 대가는 그리 크지 않았고, 성공의 보상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이 경험들은 여행뿐 아니라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도전하는 사람이 이제는 나를 잘 설명하는 문장이 되었다. 지금의 나는 뮤지컬 배우를 꿈 꾸며 선뜻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던 사람에서, 두려움 없이 항상 도전하고 일단 부딪혀 보는 사람이 되었다.


비록 무대 위에서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지는 못하지만, 종종 좋아하는 노래 커버곡을 SNS에 올리기도 한다. 선망하는 작가님 이야기에 따라, 나도 쓰는 사람이 되겠다며 난생처음 글도 쓰기 시작해서 브런치에 업로드한다. 초등학교에서 미술에는 소질이 없어서 수우미양가 중에 '가'라는 평가를 늘 받았던 아이지만, 지금은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구석 화가도 되었다. 첫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나는 더욱 도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전의 나라면 '나는 못 해.'라고 하지 않았던 일들일 텐데, 이제는 '나도 해 볼래.'라고 먼저 달려든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를 여행하며 만난 친구들과 SNS를 통해 연락할 때면, 즐겁게 이야기 나누며 여행했었던 기억들이 온기를 가져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 온기에는 성공의 희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에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며 아파했던 미열이 공존하는 것을 알기에 내게는 더욱 소중하다. 두려움의 미열이 없었다면 이렇게 도전에 치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도전을 가열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나는 심장이 뛰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심삼일-력' 따위는 필요치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