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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pr 05. 2023

십년지기 친구와 손절했습니다.

아프지만, 인정해야만 합니다.

정확하게는 14년 된 친구들과 손절했다. 그 친구들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만났다. 나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는데, 사회복지학과는 대체로 여성 학생의 비율이 높다. 추측컨대, 아마 다른 직업에 비해 안정적 일지 몰라도 급여가 적은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오래된 관념상, 남자가 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선후배들만 보더라도 사회복지 전공을 살려 현장에서 계속 근무를 하는 남성 사회복지사는 드물다. 따라서 남성 간호사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남성 품귀 현상이 아직도 존재하는 직업 중에 하나다. 내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한 학년의 정원은 100명이었다. 그중 80~90여 명이 여학생이었으니, 몇 안 되는 동성 친구는 실로 귀했다.


대부분 그렇듯 대학교에 입학했는 데, 단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에서야 아무렇지 않은 것이지만, 혼자 밥 먹는 것이 그때는 창피했다. 혼자 밥을 먹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친구를 사귀어야 했다. ‘예비대’라고 불렀던 사전 MT의 프로그램들에 참여하며,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야생 동물들이 짝을 찾듯 나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아직 고등학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터라, 출신 고등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를 찾았다. 결국 함께 아는 친구가 있음을 알게 되자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남은 프로그램들에서도 어울려 다니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갔고, 앞으로 남은 대학생활을 함께 할 친구가 여기서 정해졌다. 비록 친구가 된 것은 서로의 출신 고등학교에 아는 친구가 겹친다는 것뿐이었지만, 나를 포함해 4명의 친구들과 입대하기 전까지 1년 내도록 붙어 다녔다. 잠만 각자의 집에서 잤었지,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에는 함께 놀러 다니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스무 살의 서투른 사랑과 이별, 패기 어린 행동들, 돈은 없어도 모든 진심을 터놓고 민속 주점에서 깔깔 거리며 놀던 시간들이 있었던 덕분에 우리는 우정을 더욱 진하게 우려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입대했고, 심지어 동반 입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중 한 명과는 우연히 같은 날 입대를 했다. 심지어 같은 강원도의 신병 보충대와 신병 교육대로 배치받았다.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 운명이라면서 같은 부대까지 가서 전역도 함께 하자며 약속했다. 물론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부대로 배치받기 위해 나름 머리를 썼다. 수색대로 지원하면 특정 부대로만 배치되기에 우리는 최전방에 가게 되더라도 서로가 힘이 되어주며, 군 생활을 함께 해내자고 했다. 신병 교육이 마무리될 즈음, 수색대를 자원받는다는 말에 우리는 각자 수색대에 지원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는 입대 신청할 때, 운전병 특기로 지원했던 터라 애초에 수색대 배치 이전에 야전 수송 교육단에 가야 했다. 결국 그 친구만 수색대에 가게 되었고, 나는 야전 수송 교육단을 통해 전혀 다른 포병부대로 배치받았다.


군부대는 각자 다른 곳이었지만, 우리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무사히 군 복무를 마쳤다. 이제 예비역으로 학교생활을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회복지학이라는 전공이 내게 맞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나는 돌연 일 년간 휴학을 하며,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4인방이었지만, 나와 A가 친했고 B와 C가 친했다. 내가 휴학을 하자 A는 많이 힘들어했다. 우리 넷은 선배들과 관계도 좋았기에, 차기 학생회 임원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휴학을 하자 B와 C는 예정대로 학생회를 하고, A는 외로움을 느끼다 학과 바깥의 활동을 주로 하며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일 년 뒤에 내가 복학했을 때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B와 C는 학과의 학생 회장직을 맡으며 서로 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고, 나는 일 년 간 휴학을 하며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 느꼈던 터라 생활 패턴이 달라진 A보다는 B, C와 가깝게 지냈다. 사실상 A는 이 시기즈음부터 우리와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우리 셋은 입대하기 전처럼 관계를 돈독히 했다. 1학년 때만큼은 아니지만, 학과 학생회를 핑계 삼아 우리는 다시금 징그럽게도 붙어 있었다.


내 곁에 남은 두 친구와 함께 지내면서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나는 1년을 휴학해서 2학년으로 복학했고, 두 친구는 이미 3학년이었다. 학년이 달라서 수업도 다르게 듣는 데다가, 내가 없는 1년간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아는 선 후배들도 많이 달라졌다. 나중에 내가 4학년으로 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은 먼저 졸업하고 현장에 사회복지사로서 근무했다. 우리는 함께 또 따로 걸었다.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아마 내 마음속에서 우리의 관계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졸업하고 셋 다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며 우리 우정에는 제2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선배들 말처럼 현장에 남자 사회복지사는 적었고, 우리는 여초 직장에서 근무하는 남자 사회복지사로서의 애환을 공유했다. 우리 셋 다 주변에 사회복지사인 남성 친구들이 없었으니,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고 점점 셋이서만 똘똘 뭉치게 되었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씩 만나며, 각자 여자친구들의 미움을 샀다. 그녀들은 우리가 여자친구인 자신을 만나는 시간보다 우리끼리 모이는 시간들이 길어서 우리가 뭉치는 것을 질색했다. 그만큼이나 우리는 가깝게 지냈다. 다시 찾아온 우정의 봄날에 나는 이 시간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내 착각이었다.


친구들은 한 명씩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을 그만뒀다.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을 가장 고민했던 나는 아직 사회복지사로 사회변화를 꿈꾸고 있지만, 다른 두 친구는 사회복지를 떠나 다른 직업을 갖게 되었다. 한 명은 자영업자로, 한 명은 우체국 집배원으로. 심지어 한 명은 일찍이 결혼하고 아기도 낳아서 더욱 얼굴 보는 게 힘들어졌다. 우리는 다른 관심사와 다른 현실을 눈앞에 두게 되자, 어울리는 시간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듯이,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함은 없었지만 새로운 이야기들도 없었다. 대학생 때 이야기,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던 때의 이야기, 군대 이야기 등 지난날을 곱씹었다. 만나는 것은 지금이지만, 과거만을 회상하다 헤어지는 날이 많았다. 현재의 각자 삶이 너무나도 달라졌고, 우리는 만날 때마다 과거로 갔다. 하지만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들이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지난날들의 추억들이 좋았고, 친구들을 만날 때면 잠깐이나마 과거로 가는 그 시간마저도 좋았다. 만약 손절하게 되는 지금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해도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스무 살에 친구들을 만나는 삶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이나 내겐 소중한 시간들이었고,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우정이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지 못했고, 한계가 명확했다. 만나는 시간들이 줄어들고, 당연히 서로에 대한 소중함도 함께 줄어들었다. 학생 때는 그렇게 많은 시간들을 붙어 있었음에도 크게 다툰 기억이 잘 없지만, 최근 들어서는 꽤나 크게 다툰 적이 많았다. 다툰 이유도 별 시답지 않은 것이다.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의 PD가 과거 학교 폭력을 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보고 친구는 학교 폭력이라 부를 만큼의 사안이 아니라고 했고, 나는 모든 학교 폭력 자체가 옳지 않은 데다 심지어 학교 폭력 관련 드라마를 연출했으니 더 괘씸하다는 의견 대립으로부터 출발했다.


다툴 때는 잘 몰랐지만, 돌아보면 아마 우리는 우정을 지속할 힘이 계속 줄어들어 왔던 것 같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줄어들고, 서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줄어들고, 서로가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서로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로가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상처 주기 위한 말들을 쏟아낸다. 더군다나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더라도, 그 상처를 돌아보고 주워 담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의 14년 우정은 여기서 끝내야만 했다.


우리가 만나기 시작한 스무 살부터 현재가 되기까지 우리의 우정이 거짓이었다거나, 즐겁지 않았다거나, 후회하는 시간들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손절한 지금도, 헛헛함을 느낄지도 모르는 미래에도 나는 그들과의 우정을 회상하고 곱씹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나는 그들과, 그들은 나와 손절해야 한다. 다툼을 겪으면서 또 격고 나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과거를 돌아봤을 때 이제는 서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을 뿐이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느꼈을 감정이다. 나는 이 감정에 직면하기 위해서, 고민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글을 써야 했다. 역시나 글을 쓰는 지금도 뼈저리게 느껴진다. 단순하게 누군가의 중재로 이어 붙인다고 해도, 엉성하게 붙인 딱풀 같이 금방 떨어질 것이다. 여기까지다.


나는 애초에 얕은 관계는 선호하지 않기에 몇 남지 않은 주변 사람을 끊어내야만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프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내가 사람을 너무 쉽게 끊어낸다거나, 그 친구들이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거나, 냉철하게 끊어내는 게 기계 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4년을 다시금 깊게 돌아보고서 내린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돌아보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든다. 마음과 기억 속 깊은 곳부터 곱씹으며 돌아봐도 우리 우정은 끝났다. 인정해야 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이렇게 14년 지기 친구들과 손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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