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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pr 18. 2023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상은 ‘진지공사 포상휴가’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담아

이것도 상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 복무를 하면서 받았던, '진지공사 포상휴가'가 이제껏 받은 그 어떠한 상 보다 내게 귀중하다. 삼십여 년을 살아오며 많은 상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 숙제로 같은 반 친구와 서로 상장을 만들어 교환했던 '착한 어린이 으뜸상'부터 대학생 때 부산 복지발전을 위한 아이디어 공모전에 나가서 받았던 '장려상'까지, 나는 자라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단체로부터 상을 받았다. 물론 으레 주는 상도 있었지만, 내 능력을 인정받은 상들도 함께 있어서 귀함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 유용원의 군사세계. All right reserved.

진지공사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미리 만들어 둔 '진지'와 '참호'들을 보수공사하는 것이다. 여름에 하는 '유격 훈련'이나 겨울에 하는 '혹한기 훈련'처럼, 봄과 가을에는 진지공사를 한다. 진지공사 기간 동안에 필수 과업을 제외하고는 전 부대원이 투입된다. 진지공사가 훈련은 아니지만, 훈련만큼이나 힘들기 때문에 이 기간 전후로 체력 보충을 위해 병사들이 PX에서 간식 사재기하는 진귀한 광경도 볼 수 있다.


내가 포병대대로 배치를 받고, 백일 신병휴가도 다녀오지 못한 때였다. 우리 부대의 주 무기는 K9 자주포다. 쉽게 말해서 총보다는 포탄을 발사하기 위한 탱크다. 따라서 우리는 진지공사 기간에 우리 부대의 자주포가 배치되어 있는 진지를 보수해야 했다. 진지공사 기간이 정해졌고, 훈련만큼 고되다는 소문으로 인해 두려움 가득한 상태로 진지공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고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장만은 아니었다. 막상 부여받은 임무를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 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 한화그룹. All right reserved.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대략 3.5m나 되는 높이를 가진 자주포의 진지를 다른 장소로 바꾸는 일이었다. 항상 같은 곳에 계속해서 자주포를 배치해 두면, 적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위성사진으로 창문을 통해 집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현대 과학 기술의 시대이기에 장소를 주기적으로 바꾸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기술이 지극히 발달한 시대에 현재 내가 가진 것은 PX에서 산 코팅이 되지 않은 목장갑과 삽, 곡괭이뿐이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기다.'는 속담이 문득 떠올랐다. 포클레인이면 금방 끝날 일 같은데, 어리석지 않은 우리는 오직 사람의 힘으로만 진지를 옮기는 기적을 이뤄내야 했었다. 자주포를 감싸고 있었던 진지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충격 흡수와 무너짐 방지를 위해서 폐 타이어와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폐 타이어는 승용차용 타이어 크기부터 대형 화물용 타이어 크기까지 다양했다. 진지를 오로지 삽과 곡괭이로만 해체한 후, 전술적으로 배치가 필요하다고 지정된 다른 곳에 다시금 쌓아 올려야 하는 임무였다. 말이야 쉽지, 장장 열흘의 시간 동안 장정 열댓 명이 K-9 자주포의 새 집을 만들어서 이사까지 끝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작업 도중에 비가 와도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가볍게 흩날리던 봄비는 흙과 만나자 무거워졌다. 매일 진흙탕 속에서도 흙과 타이어들을 옮겼는데, 거짓말처럼 어느덧 진지는 옮겨져 있었다. 절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임무는 행정보관급의 지시에 우리의 무조건적 순응이 더해지면서 가능한 일이 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피라미드를 사람이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 믿음으로 다가왔다. 그 당시 사람들도 처음 피라미드를 만들 때는, 아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의 힘은 실로 대단했고, 피라미드는 아니었지만 우리도 진지를 옮기고야 말았다.


아버지가 목수였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몸을 써서 무언가를 뚝딱 만드는 일이 즐거웠다. 아버지 어깨너머로 봤었던 못이나 망치, 삽, 톱 등의 연장들은 내게 이미 친숙한 것이었다. 하루는 대문이 부서져 내려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쇠지렛대와 벽돌만으로 아버지는 꿈쩍도 않던 대문을 순식간에 고쳤다. 그런가 하면은 자투리 나무와 공구들이 아버지 손에 들어가서 몇 시간 후에는 책장이나 TV 서랍장 등의 가구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만들었던 가구로 공부하며 자란 내게 목수는 멋진 직업이자 능력이었다.


몇 안 되는 도구들로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일을 쉽게 해내는 아버지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누군가 내게 아버지 직업을 물을 때면 나는 자랑스럽게 목수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하지 않고 오락을 하거나 놀고 있을 때, 나를 앞에 앉혀두고 목수로서 노동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용아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나?". 그러니까 얼른 공부하라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들을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스스로를 낮게 이야기하는 것이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버지는 강하고 불가능함 따위 없는 존재였다. 영화로 예를 들면 '아이언 맨' 같은 영웅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진지공사를 할 때, 남들처럼 적당히 하더라도 내게 욕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세안하다 코를 풀면 모래 섞인 코딱지가 나왔었고, 매일 흙으로 뒤집어쓴 전투복을 세탁해야 할 만큼이나 열심히 했다. 물론 이등병으로 부대 배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열심히 해야만 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지공사 기간 동안 진지하게 임하며 나름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느껴졌었던 이유는 아마 아버지 옆에 구경하며 도구를 전달하기만 하던 꼬마가, 어느새 군인 아저씨가 되어서 나도 아버지처럼 곧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를 눈여겨본 행정보급관은 나를 진지공사 포상휴가자 명단에 올렸다. 진지공사로 고단했었던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이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내가 포상휴가를 받기 전에는 우리 부대에서 이등병에게 포상휴가가 지급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고참 병사들에게 휴가를 챙겨주는 것이 부대 관례 같은 것이었는데, 이등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상휴가를 받았다. 고참들도 그의 앞에만 서면 쪼그라들었기에 항상 무섭기만 했었던 행정보급관의 눈에도 내가 진지공사에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내게 '진지공사 포상휴가'가 값진 이유는 부대 최초라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동경했었던 아버지의 능력으로 인정받은 상이기 때문이다. 체구는 작아도 야무지게, 그리고 남 부끄럽지 않게 육체 노동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군 생활뿐 아니라 앞으로도 항상 자신감 있게 살아가도록 했다. 아버지의 능력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능력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목수는 스스로를 낮춰야만 했던 능력이 아님을 내가 증명해 냈다.

ⓒ Vance Osterhout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자신감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 던져져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 의지는 아버지가 살아온 방식의 답습이다. 내가 일을 하다가 어려움에 부딪혀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왔을 때, 아버지와 뚝딱거렸던 순간을 떠올리면 다시금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불가능함이라는 것은 없어 보이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덕분에, 나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내고야 만다. 아버지를 동경하며 배우려고 따라 했었던 것이 모여서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 특별한 상징이 나에게는 '진지공사 포상휴가'였다. 한낱 포상휴가고, 그 상을 내게 줬던 이조차 이 특별한 의미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 특별함은 내 삶을 힘 있게 살아가게 했고, 내가 동경하는 아버지의 삶을 만나는 순간을 강렬하도록 했다. 특히 이 연결고리가 아버지와의 관계라서 고리의 매듭이 더욱 단단하게 맺어져 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당신이 목수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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