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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pr 24. 2023

프라하까지 가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가라오케’라고?

한 달 동안 다녀왔던 유럽 배낭여행에서 가장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아 있는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일말의 고민 없이 '가라오케 나잇'이라고 말할 것이다. 유럽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서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밤낮없이 돈을 모았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부산에서 프라하까지 자그마치 8,565km를 날아가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가라오케라니, 아마 믿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가라오케, 즉 노래방은 굳이 일본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Anthony DELANOIX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동유럽의 보석, 유럽의 심장, 북쪽의 로마 등 프라하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 말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일본 향기가 물씬 나는 '가라오케'인지 궁금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체코에 플젠이라는 도시의 필스너 우르켈 맥주나 광안대교 야경 뺨치는 카를교의 야경, 구 시가지 광장에 있는 천문시계를 구경하기 위해서 프라하에 가려고 했었다.


더군다나 프라하는 치안도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좋은 편이고, 짜기만 했었던 유럽 음식 중에서는 나름 한국인 입 맛에 맞게 다채로운 풍미의 음식도 많았고,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내게 물가가 저렴해서 더할 나위 없는 여행지였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면,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프라하의 기억 1등은 단연코 '가라오케'였다. 여행을 준비할 때만 해도 '가라오케'가 프라하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프라하에 머무는 6박을 호스텔에서 머물렀다. 호스텔 1층에는 바가 있었고, 평소에는 잔 술을 파는 곳이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바에서 맥주나 위스키, 와인을 마시며 여행객들과 여행 일정을 공유하기도 하고, 그 여행지에서 맛있게 먹은 음식에 대해 이야기 나누거나, 혹 현지인이 있다면 그들만이 아는 여행지를 추천받기도 한다. 일종의 여행 관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방인 셈이다. 그러다가 대화가 쭉 이어지면 살고 있는 도시나 국가에 대해서도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며 서로의 생각들을 나눈다. 덕분에 프라하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팁 투어'를 소개받았고, 색다른 방식의 도시 해설과 그들만의 문화를 체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Stanislav Ivanitskiy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팁 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호스텔 입구에 'Karaoke Night'라고 적혀 있었고, 호스텔 1층의 바는 갑자기 가라오케로 변해 있었다. '가라오케 나잇'이라니,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들어가 호스텔 직원에게 가라오케 나잇이 뭐냐고 물었고, 한 달에 한 번 호스텔 이용객들과 지역주민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행사라고 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DJ 옆에 있는 작은 통에 노래 제목과 이름을 종이에 써서 넣으면 된다. DJ는 그 통에서 무작위로 종이를 하나 선택해서 노래방 기계라고 하기도 민망한 유튜브 같은 형식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노래를 틀었다. DJ의 역할은 노래 소개와 더불어 간단한 진행도 겸했다.


여행객들이 많은 도시 프라하에서 지역주민들이 여행객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과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 신박했다. 행사 설명부터 나를 매료시켰지만, 이와 동시에 소위 '인싸들만의 파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했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보았던 장기자랑의 기억을 떠 올려보면 춤이나 노래를 잘하는 사람만 나와서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는 한다. 누구나라고 했지만, 누구나 참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앞으로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이와 별개로 나는 흥이 많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문화 콘텐츠 강국의 국민으로서, 'K'의 한과 얼을 보여줘야만 할 것 같은 책임감도 함께 느꼈다.


무슨 노래를 골라야 'K'의 매운맛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런던 여행 중 뮤지컬 전용 극장에서 봤었던 '오페라의 유령' 넘버를 불러야 할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존 레전드의 'ordinary people'을 불러야 할까, 'K'의 한과 얼의 정수 '아리랑'을 불러야 할까. 나는 진중히 고민한 끝에 한영애의 '누구 없소'를 한글로 적어서 통에 넣었다. 우리나라 노래방 기계가 아니었기에 노래가 검색이 안 될 것이라 미리 예상했다. 따라서 나는 무반주에 노래를 부르겠다고 할 참이었다.


'I wanna sing a korean song. Just i will show you(나 한국 노래 부를 거야. 그냥 보여줄게)'. 그 DJ는 한글을 못 읽을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노래 검색이 안 된다고 할 것을 대비해서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영어 문장도 적어두고서 실수하지 않도록 반복해서 되뇌었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내가 호명될까 하는 기대감에 계속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모든 준비는 완벽했고, 나는 자신 있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로 그 자리에 앉아서 자신감에 충만한 채 떨고 있었다.

ⓒ William King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영어 대답을 되뇌며 긴장과 자신감을 번갈아 가며 느낄 때쯤, 잊고 있었던 아까의 염려가 날 호방하게 비웃는 순간이 왔다. DJ가 부른 이름을 듣고, 남성 1명과 여성 1명이 신나서 무대에 올라갔다. 그녀는 빨간색 민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한쪽 팔이 없었다. 그 혼성 듀엣이 신청한 곡은 제이지와 앨리샤 키스의 'empire state of mind'였고, 이 곡은 제이지의 강렬한 랩과 앨리샤 키스의 '뉴욕'을 연신 시원하게 부르짖는 보컬이 인상적인 노래였다. 여기서 한번 더 반전이었던 것은 그녀가 제이지의 랩을 했고, 그는 앨리샤 키스의 보컬을 맡았다. 그녀는 랩을 힘 있게 잘했고, 그는 노래를 잘 못했지만 그저 즐겼다. 그들은 내 염려를 뒤엎어 버렸고, 그들의 무대만을 멍하니 바라보도록 했다.


나는 새벽까지 이어지는 '가라오케 나잇'을 하나도 즐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를 제외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장애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한쪽 팔이 없었다면, 미루어보건대 민소매를 입을 생각은 전혀 못했을 것이다. 아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애를 부끄럽다고 여기고, 한 여름이라도 긴 팔이나 얇은 외투를 항상 입었을 것 같다. 없는 쪽 팔의 옷은 주머니에 집어넣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장애인으로 쳐다보지 않게 했을 것이다.


팔이 없게 된 이유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중요치 않다. 그럼에도 그저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저 팔이 하나 없을 뿐이고, 이 사실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당연히 부끄러워야 이유가 하등 없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녀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다 생각한 사람들이 없었다. 오직 나만 그녀를 장애인이라고 머릿속에서 차별하고 있었다.


나아가 장애를 가진 사람이 무대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던 내가 죄스러웠다. 그녀가 장애를 가진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부끄러워서 숨어있거나, 남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전혀 모순이 없는 이 명제를 참이라 생각하면서, 한쪽 팔이 없지만 민소매를 입은 여성이 무대에 올라왔을 때 충격받았던 내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과 지식은 책과 수업으로만 배웠지, 정작 그 사실을 눈으로 목격했을 때 나는 이미 그녀를 차별하고 있었다. 휴학기간까지 합쳐 장장 7년간의 사회복지학 전공 수업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쓸모가 없었고, 나는 헛똑똑이였다. 항상 사회 변화를 외치면서도, 변해야 하는 것은 내 스스로가 먼저였다.


나는 'K'의 매운맛을 보여주려 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내가 선택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로 무대에서 노래하면 모두 망쳐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내가 앉아서 불안과 죄책감 사이를 오가며 기다렸던 2시간 동안에는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다음 날 여행을 위해 나는 방으로 돌아왔지만, 혼란스러운 감정에 꽤 오랜 시간 잠에 들지 못했다.


수년이 지난 현재, 아침에 강아지와 산책을 나섰다. 저 멀리서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어 절뚝거리며 내가 있는 방향으로 한 남성이 걸어왔다. 그는 청바지에 빨간색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프라하의 '가라오케 나잇'에 부끄러웠던 밤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 Mari lezhava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그러나 오늘의 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레트로 한 색감의 바람막이 코디가 너무 예쁜데?'. 내게 장애라는 것은 더 이상 그를 애처롭게만 생각하게 하거나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했다. 나는 장애라는 색안경을 빼고서, 코디하기 어려운 빨간색 바람막이를 그가 촌스럽지 않게 코디했다는 사실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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