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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pr 26. 2023

톰브라운 카디건 단추가 떨어졌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바지 지퍼를 올렸다. 뒤를 돌아서는 순간, 떼구루루. 처음에는 손을 씻기 위해 미리 빼둔 반지겠거니 생각했다. 먹는 것은 아니지만, 땅에 떨어져도 3초 안에만 주워 먹으면 괜찮다는 '3초 룰'을 떠올리며 3초가 지나기 전에 빠르게 반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반지는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내 레이더에 포착된 것은 단추였다.


나는 바지에 달려있는 단추를 봤는데, 그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견고하게 위치해 있었다. 재빠르게 시선을 돌려 톰브라운 카디건에 달려있는 단추를 쳐다봤다. 땅에 떨어진 것과 똑같이 생겼다. 뇌에서 내 것이라고 인지함과 동시에 떨어진 단추를 향해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만약에 단추 떨어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몇만 원 상당의 단추를 화장실에 두고 왔을 것이 분명했다. 혹시 '3초'는 안 지났겠지.


3초 안에 주워서 내 손에 놓여 있는 단추 색깔은 까무스름하면서도 탁하고, 고동색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서 생각 외로 촌스러웠다. 카디건을 샀을 때 단추를 유심히 봤던 것은 아니지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럽거나 적어도 '톰브라운'이란 이름 정도는 적혀있을 줄 알았나 보다. 단추가 갑자기 떨어지지를 않나, 사치품임에도 촌스럽지를 않나. 상황이 이쯤 되자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 카디건이 얼마 짜리인데'. 당장은 수선이 불가능하니까, 일단은 주머니에 주운 단추를 넣고 손을 씻었다. 카디건을 산 지 오래되지도 않았을뿐더러, 더위를 많이 타는 성격상 여름이나 초가을에는 카디건을 입지도 않았다. 그렇게 자주 입었던 것도 아닌데, 단추가 떨어지다니. 톰브라운 정도 되는 명품은 단추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분노의 손 씻기를 하면서 아무리 화를 삭이려 해 봐도 화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 카디건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단추를 전부 잠그면 오히려 티가 날 것 같아서 풀어헤쳤고, 누군가 마주하여 지나갈 때는 괜스레 빈 단추가 있는 곳에 손을 올려 가렸다. 그렇게 하루종일 잡는 사람은 없고, 숨는 사람만 존재하는 나 혼자만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 Thom Browne Official Website. All right reserved.

톰브라운 카디건이 비싼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이를 테면 심플하면서도 멋짐이 폭발하는 디자인, 질 좋은 원단,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함과 같은 것들이다. 또한 수선이나 각종 AS까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단추 하나 떨어졌다고 해서, 구매 내역을 증명할 수 있는 영수증을 찾아서 백화점에 갈 수는 없었다. 영수증을 찾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백화점까지 가는 시간과 수선 이후에 맡겼던 카디건을 다시 찾아오는 것도 스트레스기 때문이다.


분명히 왔다 갔다 하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금 화가 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단추 하나쯤은 직접 달기로 했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평소에는 사용할 일이 없어서 서랍 깊숙한 곳에 놓아두었던 반짇고리를 꺼냈다. 아이러니하게도 100만 원 이상의 카디건을 꿰매기 위해 꺼낸 반짇고리는 1,000원짜리 다이소 반짇고리였다. 나는 톰브라운 카디건의 제2차 수제작 장인이 되어야 했다. 바늘에 싸구려 실을 끼우기 위해 침을 바르고, 바늘구멍에 실을 넣기 위해 집중하다 보니 그제야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이성을 되찾고 보니, 카디건에서 단추가 떨어진다 해도 화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톰브라운 카디건을 샀던 것은 튼튼하게 매달려있는 단추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깔끔하면서도 최대한 단순하게 디자인되어 담백한 맛을 내는 멋스러움과 다른 사람들은 카디건에 100만 원 이상 돈을 쓰지 않겠지만 나는 쓸 수 있다는 타인의 눈을 기반으로 하는 과시, 미니멀리즘을 동경하며 더 이상 SPA 브랜드의 패스트 패션으로 만들어진 옷은 사지 않겠다는 관념 등을 샀던 것이다.


제 아무리 명품일지라도 카디건은 옷일 뿐이다. 당연히 해지고 닳아서 구멍도 날 것이고, 단추가 떨어지거나, 밥을 먹다가 김치 국물이 튀어 색이 물들 수도 있다. 포장을 뜯는 순간부터, 어쩌면 제품으로 완성된 순간에도 카디건은 계속해서 손상되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카디건을 사려고 카드 결제한 시점부터 이미 중고품이 되어 카디건의 금전적 가치는 반토막이 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평생토록 입을 수도 없고, 변하지도 않으면서,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을 살 수 없다.


세상에 모든 것은 변한다. 톰브라운 카디건을 처음 샀을 때, 카디건 입은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던 기억마저 흐릿해진다. 시간이 지나면 흐릿하다 못해 가슴 뛰던 기억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물질이 아닌 내 속에 있는 기억마저도 변하는데, 물질로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카디건은 오죽할까.

ⓒ Quino Al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다이소 반짇고리에서 까무스름하고 탁해서 촌스러웠던 고동색의 실을 찾아보려 했는데, 반짇고리에 실들은 단색뿐이었다. 흰색, 검은색, 노란색, 분홍색, 회색. 방금 전까지만 해도 촌스럽기 짝이 없던 톰브라운 단추색과 비슷한 색의 실이 없으니까, 이제는 오히려 그 오묘한 색이 고급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실로 갈대 같았고, 가진 것 중에서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검은색 실로 단추를 달았다.


단추를 달고 카디건을 입고서 손으로 내가 달았던 단추를 가려보았다. 카디건에 단추가 떨어졌을 때, 가리지 않고 다녔다면 오히려 더 쿨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톰브라운 카디건에 단추가 떨어져도 무심하게 개의치 않아 하는 태도가 멋져 보였을 텐데 말이다. 모든 것은 내 마음먹기에 달린 듯하다. 자세히 보면 단추를 꿰맨 실의 색이 다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직접 꿰맨 톰브라운 카디건을 멋들어지게 입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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