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리스트
"너 옷이 너무 야한 거 아냐? 나 지금 유혹하는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혀 아니거든요!"
난 그저 트레이닝 반바지에 크롭 후드티 입은 건데, 이게 그렇게 야한 건가…. 발끈했지만 내 매력을 잃을 생각은 없었다. 집에서 입을 편한 복장을 골라 입고 있었지만, 진짜 내가 집에서 평상시 착용하는 옷을 그대로 입었다간 선배의 친절이 멈출지 모른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선배가 그렇게 컴퓨터나 집을 수리해 주고 간 이후 종종 묘한 이야기들을 꺼냈다.
"너 진짜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더라. 솔직히 예쁘더라"
난 괜히 어색한 분위기를 막으려 너스레를 떨며.
"어이구, 이거 이거 큰일이구만. 또 나한테 반해버렸구만. 쯧쯧."
이렇게 넘겼지만, 그 후로 몇 번이나 같은 말들이 반복되자 역시나 의심이 점점 강해졌다.
"선배 진짜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으이구 선배 나한테 반했구만, 맞죠? 선배 나한테 반했죠?"
선배는 몇 번은 아니라고 발뺌하더니 어느 날은.
"응. 솔직히 너 예뻐."
"네에?!! 정말이에요?? 나 정말 좋아해요??"
"그래…. 좋아해."
"왜요? 왜 갑자기요? 대학교 땐 나한테 전혀 관심도 없었잖아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요?"
"원래 그런 거야. 작은 거 하나에도 반할 수 있는 거야. 전에 너 보러 갔을 때 예뻤어. 냄새도 좋고…."
나한테 선배는 아직 남자가 아니라는 걸 피력했지만 사실 선배가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고 프로그램을 깔수록, 문고리를 달고 샤워기 거치대를 달수록, 내 마음의 껍데기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선배의 마음을 단번에 내칠 힘이 없었다. 아니 내치고 싶지 않아지고 있었다.
"오빠는 은도가 당장 마음을 받아들이길 기대하는 게 아니야. 그냥 이렇게 연락하고 만나고 하는 것만으로도 좋아. 그러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도 오지 않겠어? 사실 기다리는 것도 즐겁고. 요즘 네 덕분에 기분이 굉장히 좋아."
아, 사실 선배는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말할 때 자주 '오빠는 어쩌고, 오빠는 저쩌고' 이런 말투가 자주 등장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주목하게 됐다.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소름 돋는 부분이지만 대학생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그 말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언제나 약간의 비빌 언덕의 가장자리쯤은 내주었던 사람이라서일까. 난 언제나 선배를 고평가하고 있었다. 선배가 대학 시절 보여줬던 정석적인 태도와 정직함은 선배에 대한 평가에 거대한 막처럼 드리워서 언제나 갑옷처럼 빛났다. 고평가는 좀처럼 흠집이 날 줄 몰랐다.
그즈음 선배는 으레 주말이면 나를 찾아오게 됐다. 그냥 자연스레 보러 갈까 물어오면 그러라고 하는 날들이었다. 선배는 집에 올 때마다 우리 집에서 고치면 좋을 것 같은 부분들을 적는 수첩이 있다고 했다. 그 수첩엔 수리를 요하는 고장 난 것들만 채워져 있는 건 아니었다. 나를 데려가면 좋을 것 같은 곳들도 적혀 있다고 했다. 그 수첩을 실제로 보곤 혀를 내둘렀다. 사람의 마음 얻는 일도 마치 생계를 위한 일을 하듯 비슷한 모양새로 진행되는 선배의 체계는 물론, 그 집요함도 대단하다 느꼈으니까. 그러면서도 그의 수첩에 나를 위한 것들이 채워진다는 게 기분 좋았다.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리스트. 그걸 실행하는 실천력.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나의 견고한 성벽이, 하나하나 벽돌을 내뱉으며 무너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