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왜이래
“핸드폰 액정이 이래서 답답하지 않아? 저번에 보니까 많이 긁혔던데.”
“아, 그냥 별생각 없이 쓰긴 썼는데 잘 안 보이긴 했어요.”
“핸드폰 액정만 갈아줘도 새 폰 같고 좋아. 액정 갈러 가자.”
선배의 수첩 리스트에 내 액정도 있었나 보다. 선배는 집 근처 핸드폰 액세서리 전문점을 검색해 데려갔다.
“이런 거는 직접 하려고 하면 망치기 쉬워. 이런 데 오면 사장님이 직접 해주시고 좋잖아.”
새 보호 필름을 붙인 화면이 낯설 정도로 맑았다. 그동안 왜 긁힌 화면을 참고 썼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내 기분도 맑아졌다.
“와 진짜 새 폰 같아요. 얼마 하지도 않는데 왜 이걸 갈아줄 생각을 못 했을까. 고마워요.”
“그래. 그리고 너 화장품 필요한 거 없어? 보통 화장품 어디 가서 사?”
“화장품이요? 음…. 보통 올*** 가서 사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아니 어제 너 화장대 보니까 화장품이 몇 개 없어서. 화장품 사러 가자.”
“화장품도 사주게요?”
“그래. 나도 바를 거 필요해서. 같이 가자. 간 김에 사줄게. 가서 필요한 거 골라.”
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샵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필요한 거 사도 돼요?”
“으이그, 그렇다니까.”
난 약간 쭈뼛대며 평소 쓰는 수분크림 하나를 골라 가져 갔다.
“이거 필요했어요. 고마워요.”
“으이그, 겨우 그거 하나 사는 거야? 여기 바구니 있잖아. 여기 필요한 거 마음껏 담아 오라고.”
“지, 진짜요?”
왜 그 순간 내 얼굴이 붉어졌는지 모르겠다. 난 분명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난 누군가에게 뭔가 사달라고 하는 게 참 어려운 인간인데, 그게 왜 어려운지도 모르겠는데 예전부터 어려웠다. 그만큼 실용성 없이 고집이 센 건지, 전생에 양반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난 뭔가 죄를 짓는 기분으로 하지만 그와 반대로 너무 기쁜 이상한 두 가지 기분을 동시에 가지고 상기된 표정으로 화장품을 골랐다. 마치 어렸을 적 삼촌이 슈퍼에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과자를 마음껏 골라도 된다고 하는 것 같은 기분과 슈퍼에서 몰래 과자를 훔치는 것 같은 기분이 동시에 든달까. 분명한 건 난 신나 있었다. 얼굴이 빨개지게 신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또 골랐다. 내 머리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나도록 바구니에 필요한 것과 필요할 것까지 차곡차곡 가득 담았다. 그리고 머쓱해하며 주춤주춤 바구니를 들고 선배 앞으로 갔다.
“이제 다 골랐어?”
“네.”
“이거 계산해 주세요.”
왜 이리 가슴이 뛰던지. 왜 그리 신나던지. 화장품 가게에서 내 맘대로 돈 걱정 안 하고 가득 담아본 적이 없었는데. 아니 뭘 사든 그랬다. 뭘 사던 가성비에 가성비, 무언가를 사는 건 일부분 노동 같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실컷 골라보다니. 무진 비싼 거 사진 않았지만, 엄청 신났다.
“고마워요. 선배. 다 필요한 것들이었는데 덕분에 한동안 든든하다 진짜.”
고맙단 말 하면서 나 왜 수줍어하고 있는 거지. 나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지. 사준다는데, 고맙다고 하면 되는데 뭐 이렇게 갑자기 세상 샤이해지는거야. 나 이거 훔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긴 화장품이 좋은 게 없는 것 같아. 백화점에 가야 있나? 난 네가 립스틱 같은 거 살 줄 알았는데 다른 것만 사서 좀 그랬어. 여자들 보통 샤*립스틱 같은 거 있지 않아? 그거 하나 사러 가자.”
“네? 립스틱도 사준다고요? 괘, 괜찮아요!”
여기서 2차로 얼굴이 빨개지고.
“으이그! 사준다고 할 때 사. 이럴 때 사는 거야.”
난 립스틱에 돈 쓰는 게 아깝다. 그래서 만 오천 원 이상 가는 립스틱을 내 돈 주고 사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진짜 한 번도. 만원만 넘어가도 아깝다. 왜 그런진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다. 내가 쓰는 한두 개 좋은 립스틱은 전부 지인이 여행 다녀오며 사 온 것이었고 색상도 묘하게 쓰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사만 원 넘는 립스틱?
백화점에서 립스틱을 사보는 게 처음이다. 왜 립스틱 하나 사겠다는데 이렇게 떨리지. 이상하게 쫄리는 나를 억누르며 조심스레 립스틱을 발라봤다. 대체 뭐가 제일 좋은 색상인지 알 수가 없어.
“샤*은 빨간 립스틱이야. 인터넷 찾아보니 여자들이 빨간색 많이 사더라. 너도 이참에 빨간 거 하나 사봐.”
드디어 나도 빨간 립스틱을 사보는 건가. 한반도 대놓고 완전 빨간색을 사 본 적이 없었다. 요즘엔 대부분 말린 장미 색상을 샀는데, 이효리가 저스트 텐미닛을 외치며 빨간 립스틱 촌스럽기도 하지라고 노래한 이후로 이다지 새빨간 색상을 염두에 둬 본 적이 없건만….
한참을 진땀 빠지도록 고민하여 고르고 고른 빨간색은 과하지 않은 적당한 광택에 맑으면서도 너무 뜨지 않는 적당히 고운 빨강이었다. 립스틱은 아주 조그만 쇼핑백에 넣어져 내 손에 들려졌다. 집에 가는 내내 쇼핑백은 내 손을 중심축으로 두고 앞뒤로 경쾌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 기분이 손끝으로, 손끝에서 쇼핑백으로 넘어갔나 보다.
전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데이트 비용 통장을 만들어 거기에 돈을 반씩 넣어서 썼었다. 남친이 데이트 비용을 대부분 부담한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나에겐 남 이야기였다. 딱히 아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부럽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고, 고장 난 거 고쳐주고, 화장품도 사주고 하는 남자가 솔직히 처음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포근한 구름에 띄워져 동동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세상에 여친한테 명품백도 사주고 하는 남자들이 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올*** 코스에 샤*립스틱 하나면 이다지도 약해지는 여자였다. 너무 쪽팔린 데, 솔직히 좋았다.
“이리 줘. 큰 쇼핑백은 내가 들어줄게.”
선배에게 올***에서 산 화장품들이 들어있는 종이백을 건넸다. 종이백을 받고도 선배는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 손을 잡으라는 듯이.
전에 한 번 손 잡자는 걸 깐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 힘이 없다. 이상하게 마음이 유해져서는.
못 이기는 척 슬며시 선배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