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은도 Jul 31. 2022

선배와 빨간 립스틱

선배 왜이래

“핸드폰 액정이 이래서 답답하지 않아? 저번에 보니까 많이 긁혔던데.”   

  

“아, 그냥 별생각 없이 쓰긴 썼는데 잘 안 보이긴 했어요.”

     

“핸드폰 액정만 갈아줘도 새 폰 같고 좋아. 액정 갈러 가자.”   

  

선배의 수첩 리스트에 내 액정도 있었나 보다. 선배는 집 근처 핸드폰 액세서리 전문점을 검색해 데려갔다.      

“이런 거는 직접 하려고 하면 망치기 쉬워. 이런 데 오면 사장님이 직접 해주시고 좋잖아.” 

    

새 보호 필름을 붙인 화면이 낯설 정도로 맑았다. 그동안 왜 긁힌 화면을 참고 썼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내 기분도 맑아졌다.      


“와 진짜 새 폰 같아요. 얼마 하지도 않는데 왜 이걸 갈아줄 생각을 못 했을까. 고마워요.”   

  

“그래. 그리고 너 화장품 필요한 거 없어? 보통 화장품 어디 가서 사?”   

  

“화장품이요? 음…. 보통 올*** 가서 사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아니 어제 너 화장대 보니까 화장품이 몇 개 없어서. 화장품 사러 가자.”   

  

“화장품도 사주게요?”     


“그래. 나도 바를 거 필요해서. 같이 가자. 간 김에 사줄게. 가서 필요한 거 골라.”   

  

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샵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필요한 거 사도 돼요?”    

 

“으이그, 그렇다니까.”  

   

난 약간 쭈뼛대며 평소 쓰는 수분크림 하나를 골라 가져 갔다.    

 

“이거 필요했어요. 고마워요.” 

    

“으이그, 겨우 그거 하나 사는 거야? 여기 바구니 있잖아. 여기 필요한 거 마음껏 담아 오라고.” 

    

“지, 진짜요?”    

 

왜 그 순간 내 얼굴이 붉어졌는지 모르겠다. 난 분명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난 누군가에게 뭔가 사달라고 하는 게 참 어려운 인간인데, 그게 왜 어려운지도 모르겠는데 예전부터 어려웠다. 그만큼 실용성 없이 고집이 센 건지, 전생에 양반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난 뭔가 죄를 짓는 기분으로 하지만 그와 반대로 너무 기쁜 이상한 두 가지 기분을 동시에 가지고 상기된 표정으로 화장품을 골랐다. 마치 어렸을 적 삼촌이 슈퍼에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과자를 마음껏 골라도 된다고 하는 것 같은 기분과 슈퍼에서 몰래 과자를 훔치는 것 같은 기분이 동시에 든달까. 분명한 건 난 신나 있었다. 얼굴이 빨개지게 신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또 골랐다. 내 머리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나도록 바구니에 필요한 것과 필요할 것까지 차곡차곡 가득 담았다. 그리고 머쓱해하며 주춤주춤 바구니를 들고 선배 앞으로 갔다.    

 

“이제 다 골랐어?”  

   

“네.”     


“이거 계산해 주세요.”   

  

왜 이리 가슴이 뛰던지. 왜 그리 신나던지. 화장품 가게에서 내 맘대로 돈 걱정 안 하고 가득 담아본 적이 없었는데. 아니 뭘 사든 그랬다. 뭘 사던 가성비에 가성비, 무언가를 사는 건 일부분 노동 같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실컷 골라보다니. 무진 비싼 거 사진 않았지만, 엄청 신났다. 

     

“고마워요. 선배. 다 필요한 것들이었는데 덕분에 한동안 든든하다 진짜.” 

    

고맙단 말 하면서 나 왜 수줍어하고 있는 거지. 나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지. 사준다는데, 고맙다고 하면 되는데 뭐 이렇게 갑자기 세상 샤이해지는거야. 나 이거 훔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긴 화장품이 좋은 게 없는 것 같아. 백화점에 가야 있나? 난 네가 립스틱 같은 거 살 줄 알았는데 다른 것만 사서 좀 그랬어. 여자들 보통 샤*립스틱 같은 거 있지 않아? 그거 하나 사러 가자.”     


“네? 립스틱도 사준다고요? 괘, 괜찮아요!” 

    

여기서 2차로 얼굴이 빨개지고.   

  

“으이그! 사준다고 할 때 사. 이럴 때 사는 거야.”     


난 립스틱에 돈 쓰는 게 아깝다. 그래서 만 오천 원 이상 가는 립스틱을 내 돈 주고 사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진짜 한 번도. 만원만 넘어가도 아깝다. 왜 그런진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다. 내가 쓰는 한두 개 좋은 립스틱은 전부 지인이 여행 다녀오며 사 온 것이었고 색상도 묘하게 쓰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사만 원 넘는 립스틱? 

    

백화점에서 립스틱을 사보는 게 처음이다. 왜 립스틱 하나 사겠다는데 이렇게 떨리지. 이상하게 쫄리는 나를 억누르며 조심스레 립스틱을 발라봤다. 대체 뭐가 제일 좋은 색상인지 알 수가 없어.     


“샤*은 빨간 립스틱이야. 인터넷 찾아보니 여자들이 빨간색 많이 사더라. 너도 이참에 빨간 거 하나 사봐.” 

    

드디어 나도 빨간 립스틱을 사보는 건가. 한반도 대놓고 완전 빨간색을 사 본 적이 없었다. 요즘엔 대부분 말린 장미 색상을 샀는데, 이효리가 저스트 텐미닛을 외치며 빨간 립스틱 촌스럽기도 하지라고 노래한 이후로 이다지 새빨간 색상을 염두에 둬 본 적이 없건만….     


한참을 진땀 빠지도록 고민하여 고르고 고른 빨간색은 과하지 않은 적당한 광택에 맑으면서도 너무 뜨지 않는 적당히 고운 빨강이었다. 립스틱은 아주 조그만 쇼핑백에 넣어져 내 손에 들려졌다. 집에 가는 내내 쇼핑백은 내 손을 중심축으로 두고 앞뒤로 경쾌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 기분이 손끝으로, 손끝에서 쇼핑백으로 넘어갔나 보다.      


전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데이트 비용 통장을 만들어 거기에 돈을 반씩 넣어서 썼었다. 남친이 데이트 비용을 대부분 부담한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나에겐 남 이야기였다. 딱히 아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부럽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고, 고장 난 거 고쳐주고, 화장품도 사주고 하는 남자가 솔직히 처음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포근한 구름에 띄워져 동동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세상에 여친한테 명품백도 사주고 하는 남자들이 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올*** 코스에 샤*립스틱 하나면 이다지도 약해지는 여자였다. 너무 쪽팔린 데, 솔직히 좋았다.    

 

“이리 줘. 큰 쇼핑백은 내가 들어줄게.”     


선배에게 올***에서 산 화장품들이 들어있는 종이백을 건넸다. 종이백을 받고도 선배는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 손을 잡으라는 듯이.     

전에 한 번 손 잡자는 걸 깐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 힘이 없다. 이상하게 마음이 유해져서는.   

   

못 이기는 척 슬며시 선배 손을 잡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배의 수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