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셰흐라드를 아세요?
미국의 사형수에 대한 보고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형집행 전 날 마지막 만찬으로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답니다.
사람들은 사형수들의 성대한 만찬으로 국고가 낭비될 것을 예상했지만
막상 다가온 그날, 그들이 원한 것은
살아생전 가장 흔히 봐왔고 많이 먹었던 값싼 음식, 치즈버거였다죠.
떠나는 이들이 가장 마음에 담고 가고 싶었던 맛은
익숙하고 평범한...
그래서 편안한 맛.
너무나 평범해서
하찮아 보이던 저의 일상을 떠올립니다.
이렇게 한번뿐인 내 인생을
낭비해도 될까 싶은 시간들의 연속이었죠.
엄마가 직업인 것처럼 일하다
틈이 나야 내 몸과 내 일을 돌보았습니다.
어쩌다 통으로 시간이 나면
너무나 황송해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주부로서 할애해 버리더니...
다만 며칠이라도 그 삶을 등져보고자
떠나온 여행에서조차 이럽니다.
집집 마다 널려 있는 빨래,
신선함을 뽐내고 있는 야채상자,
아이 손을 잡고 학교로 향하는 엄마. . .
그들을 보며
떠나온 곳의 일상이 그리워
눈을 꿈뻑거리고 있네요.
익숙하고 때론 지겨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죽을 때 가장 그리워 할 시간은
'엄마'로서 살았던 시간인가 봅니다.
돌아갈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요
평범한 일상이 곧 이어질거란 기대는
얼마나 다행인가요
이 작은 거리에
치즈버거가 걸음걸음 숨어있습니다.
매일 오후 4시는 아이들의 마음이 열리는 시간입니다.
한국에 있었다면 애정하는 간식인
요플레 단팥빵 등을 나눠먹으며
학교에서 있었던 사건사고를 브리핑하고
속상했던 일 칭찬 받았던 일에 대해 조잘거리던 우리들의 오후 4시.
엄마 나 사실은 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
아까 학교가는 애들 보니까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더 깜짝 놀랐어.
나두. 수요일엔 급식 맛있는거 나오는데...
엄마도 돌아가고 싶다.
하얗게 삶긴 너희들의 옷을 탈탈 털어 널고
김치와 돼지고기를 보글보글 끓여
아빠의 넓은 국그릇에 소복하게 담아내주고 싶다.
"저기 현대차다!"
"저기 삼성이다!"
곳곳에 숨은 치즈버거를 발견하며
우리는 처음 본 길을 익숙하게 걸어갑니다.
도심에서 떨어져 시골스런 길로 들어서자
동양인 가족이 신기한 현지인들이
눈인사를 던집니다.
시골길의 매력은 이런 것에 있죠.
멋진 건물이나 유산을 보는 것도 좋지만
자연이 만든 풍경은 그에 견줄 수 없이 감격스럽습니다.
시골에선 사람들도
자연을 닮았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비셰흐라드.
블타바강을 중심으로 프라하성과 대척점에 세워진 요새와 같은 성이었습니다.
프라하성만큼이나 화려했던 이곳이
오스트리아 군인이 점령하여 훈련소로 쓰이면서
대부분의 건물을 실용적으로 손봤기 때문에
예전의 영광을 찾아볼 수는 없게 되었죠.
그래도 꼭 이곳에 오고 싶었던 것은
국립묘지에 묻힌 우상들과의 조우를
손꼽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안그래도 통제불능인 6살아이에게
뛰놀수 있는 넓은 초원을 허락한 이곳은
체코를 구하고, 체코를 노래하고, 체코를 말한 이들이 영원히 잠든 경건한 곳입니다.
체코의 건국신화가 탄생한 이 장소에
스메타나 드보르작 알퐁소무하 얀 네루다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들이 뭍혀있습니다.
살아서는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홀리듯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쓸어봅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이들을 딱히 여기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요?
이들은 적어도 조국에 공헌하고 이름을 남긴 위인들이데요.
그런데도 자꾸 이'분'들이 안쓰러워 지는게 이상합니다.
죽어서도 한데 모여
체코의 앞날에 대한 걱정에 잠을 설치진 않으실런지요.
번영은 짧고 핍박은 길었던 나라.
뛰어난 기술과 재주는 강대국에게 착취당해 전쟁의 밑천이 되고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도 말 못하는 설움이 무언의 공연예술로 승화되었던.
체코의 암울한 500여년 동안에
선조들이 흘린 눈물이 모여 고인듯
묘지 너머 블타바 강이 숨죽여 흐르고 있습니다.
체코는 알파벳이 40개,
모든 동사에 남자복수 남자단수 여자시제가 다르다죠.
배우는 사람에게는 고역이지만
복잡한 만큼 세밀한 문장표현이 가능합니다.
얀 네루다, 보흐밀 흐라발, 밀란 쿤데라 .
등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 이곳 출신입니다.
그래도 프라하의 공기를 지배하던 작가는
단연 프란츠 카프카였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는 보이지 않네요.
알고보니 그는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시나고그에 뭍혀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나는 무엇이고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한 그의 작품은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체코인이면서도 독일어로 글을 썼기에 체코인들에게 외면을 받았고
독일인에겐 유대계라 박해를 받았습니다.
정작 자신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끼지 못해
율법에 따른 생활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 사회에서도 배척당했고
아버지와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늘 갈망하면서도 동정조차 받지 못하는 이였습니다.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못하여
어느곳에도 안정하지 못했던 그.
누구에게도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으므로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던 카프카는
외로웠을 겁니다.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고통이어서
그는 자신이 남긴 모든 작품들을 찾아 불태워주길 바랬습니다.
다행히 친구에게 남긴 그의 유언은 깔끔하게 무시되어
백년 뒤 저에게도 그의 글이 전해졌죠.
학창시절 저는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모순과 모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고민하며
죽고싶었던 시간들을 버텼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토록 멀쩡한 사지로 찾아와 그를 기립니다.
역시 훌륭한 작품은 시간을 뛰어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힘이 있겠죠.
시내에 산재되어 있는 30여개의 카프카서점과 박물관은
여전히 프라하의 젊고 외로운 이방인들을 달래고 있습니다.
긴 여행의 장점은 아이들에게 걸음을 사납게 다그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거 구경할까 저기 앉아볼까 좀 쉬어갈까
그런 여유를 가질 때
아이들은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열고 생각을 넓힙니다.
체코랑 슬로바키아는 평화롭게 이혼에 성공했는데
왜 우리나라는 북한과 서로 위협을 하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가
발목이 삐그덕 거리던 차, 시기적절하게 만난 공원벤치에서 딸이 묻습니다.
"서로 싸우면서 같이 사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낫다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왜 외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
4년 전 외할아버지의 결혼을 함께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묻던 딸에게 말했었죠.
"서로 너무 맞지 않았어.
함께 하는 게 고통스러웠겠지.
두분도 그랬지만 어린 아이였던 엄마도 외삼촌도 이모들도 상처를 많이 받았어.
헤어지는 게 백번 옳은 일이었어"
그때 아이 얼굴에 당혹감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것을 보고
어쩐지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엄마 아빠도 헤어질 수 있는거야?'
동그란 눈이 차마 꺼내지 못한 질문을 담고 있었으니까요
"맞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부부관계랑 비슷해.
둘은 따로 성장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결합했어.
함께 맞춰가며 힘겹게 살다가
그것이 양측모두에 해가 되는 것을 깨닫고 결국 헤어졌어.
국민의 숫자도 2대 1.
거기에 맞추어 재산도 빚도 모두 2대1로 합의하고
좋은 친구로 남았어.
근데 북한과 남한은 형제관계랑 비슷해.
둘은 한 핏줄이거든.
맨날 때리고 싸워도 헤어질 수는 없어.
배고프다하면 도와주고 왕따되면 편들어주고 그래야 하는 거야"
아이는 끄덕거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겠다는 끄덕거림임을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시민회관 앞은 장을 이룬 상인들로 늘 활기찹니다.
이곳에서 상인들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직접 보여주고 설명하지요.
장인들의 뚜딱거림을 보고 있으면 그 동작하나하나에 담긴 세월의 힘이 느껴져
이들이 만든 모든 물건에 혼이 담겨 있음을 믿게 됩니다.
회관은 화약탑을 먼곳에서 조망하기에도 좋은 장소예요.
문화재를 스케치북에 담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에 매료되어 한참을 지켜보다 말을 걸어 봅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그림이 좋아서' 거리로 나온거라 하네요.
여기의 고등학생들은 오후 2시면 나와서 여가를 즐깁니다.
미술을 전공할 생각이 없더라도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단지 좋아서 악기를 배우죠.
반면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오후 3시부터 본격적인 학습이 시작되 별을 보며 집에 옵니다.
어른이 될 때까지 미래를 고민하고 경험할 시간이 도저히 주어지지 않는데
어른들은 너는 누구이고 너의 꿈은 무엇이냐고 끝없이 질문만 합니다.
거기에 휩쓸려 가기 싫다고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유목민 생활하듯 떠돌고 있지만
아직도 전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한국의 경쟁사회에 들어가야 할 아이들인데
이렇게 피해다니는 것이 과연잘 하는 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