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성에서는...
깊은 곳에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음 직한 마리오네트나
생김새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젤리,
사정없이 고소한 냄새를 퍼뜨리는 뜨루들로까지
아이들의 생기를 돋울 대상은 프라하에 널려 있습니다.
다양한 테마의 무료 공원까지 넘쳐나서
목적 없이 걷다 보면 너무 잦은 휴식을 맞게 되죠.
그러므로 효율적인 도보 이동을 위해
적절히 분산 배치하여 계획을 짜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식사와 간식, 기념품 구입 시간을
돌고래에게 생선을 주듯 나누어주면
아이들은 꽤 오랜 거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잘 견디거든요.
프라하 성에 닿기 위해 까를교를 건넙니다.
까를교를 빛내고 있는 여러 성인 동상 사이에 얀 네모무츠키는 단연 눈에 띕니다.
동상을 어루만지기 위해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고
특정 부분이 이미 반질반질 닳아 있거든요.
그의 이야기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왕이었던 바츨라프 4세에겐
영토확장을 위해 정략결혼을 한 아내가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런 애정 없는 결혼은 늘 불륜의 위험이 있는 법이죠.
그렇게 아내 된 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다른 남자를 곁에 두어
남편에게 얻지 못한 애정과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일 겁니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해 온 왕은
왕비가 궁정 신부인 얀 네모무츠키에게 고해성사를 하자
틀림없는 불륜에 관한 고백이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곧 그를 불러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라 협박했지만
신부는 신앙과 왕비를 지키는 길을 택했다죠.
결국 신부는 혀를 잘린 후 블타바 강에 던져졌고
시신은 한 달 후 전혀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떠올랐습니다.
머리에는 5개의 별이 은은하게 빛나기까지 했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해 성 비투스 성당에 안치했고.
그는 홍수와 투신으로부터 다리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
중부 유럽의 다리가 있는 곳에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야사입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실제 바츨라프왕은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견줄만큼이나
백성을 사랑하여 애민정책을 널리 편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교황의 비서격이었던 얀 네모무츠 신부에게 필요이상으로 고문을 가하고 죽인 것은
당시 세력이 확대되어 왕의 토지까지 불법점령하려 했던 교황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소원 빌면 이루어 진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닳도록 이야기 한 그곳에서 아이들은 차례로 소원을 빌었습니다.
7살의 장래 희망은 자기 명의의 휴대폰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거고
야심이 가득한 10살은 광고를 찍어서 아빠에게 마당이 딸린 집을 사주는 것이 꿈입니다.
13살 첫째는 얼른 키가 커서 엄마의 옷을 공유하겠다는 꿈을
생각보다 싱겁게 이루어 내고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친구들과 이곳에 다시 오겠다는
야무진 꿈을 세웠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지금 하고 싶은 일들이 바로 꿈이 되므로 늘 구체적입니다.
어른들처럼 가족의 건강이니 화목이니,
나라의 안정이니 국제평화니 그런 뜬구름 잡는 소원은 빌지 않더군요.
어렵사리 기회를 얻은 저도 정성 들여 빌었습니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바로 그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말입니다.
까를교에서
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프라하성을 올려다보며
아이들은 다시 신이 났습니다.
"저기가 해리포터의 성이야.
저기엔 마법사도 있고 변신하는 친구들도 있어"
온갖 거짓말을 동원해 흥을 돋우는 저도 참 좋은 엄마입니다.
완전 거짓은 아니죠.
이곳은 공상영화의 배경으로 가장 자주 나오는 곳이니까요.
프라하는 건축박람회장이라 불릴 정도로
유럽의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건축물들이 산재해 있죠.
유네스코에서도 하나하나 선별하기 귀찮아서
그냥 통째로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놓은거 아닐까요
물가도 저렴한 데다 높은 기술을 가진 스텝들이 풍부하기에
어느 나라를 배경으로 하든 그 장소가 프라하가 되는 일은 매우 빈번합니다.
애초의 해리포터 제작진도 영국의 살인적인 물가를 감안하여
프라하에서 영화 촬영을 계획했다죠.
'프라하는 아이들에게 유해환경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주인공 다니엘 래드크리프의 엄마가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말입니다.
길가 한복판에 버젓이 들어서 있는 성박물관과
대낮부터 끈적하게 호객행위를 하는 웨이터를 보니
같은 엄마로서 그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잠깐의 실수가 두고두고 가십거리가 될 이곳에
미성년이자 이미 유명인이었던 아들을 보낼 수 없었을테죠.
프라하성은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한눈에 들어오는 궁과 정원으로 이루어진 성이 아니었습니다.
이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도시 같은 규모에, 엄청난 시간과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
성만 둘러보는 데에도 하루를 온전히 할애해야 했죠.
게다가 최근 일어난 테러의 여파로
매표소 앞에서 신체와 소지품을 수색당하는,
출국 절차와 맞먹는 과정까지 추가되어
입장하는 데에만도 두 어시간이 걸린답니다.
그동안 테러 주범이 동양인이었던 경우는 없어서였는지 아이를 셋이나 동반해서 인지.
몸과 가방의 작은 소지품 하나하나까지 혹독히 검색당하는 타국의 남성들과는 다르게
우리 가족은 눈인사로 과정을 대~~충 생략할 수 있었답니다.
프라하성의 보석은 성 비투스 성당입니다.
이 성당은 몇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건축물이므로
시대에 따라 예수님의 모습이 모두 다르다는 겁니다.
알퐁소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예수님은 슬라브족장을 닮은 근엄한 수염을 기르고 좋은 옷을 입은 모습입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익숙하게 봐온 지혜로운 이를 투영한 걸까요?
하긴 중동지역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하얀 피부에 황색 머리를 한
백인의 모습이라는 것도 따져보면 어불성설이죠.
반면에 최후의 심판 모자이크에서는,
왼쪽에 착한 이들이 승천하고 오른쪽 악한 이들이 지옥불로 끌려 들어가는 가운데
붉은 계열의 옷을 입고 가부좌를 튼, 아무리 봐도 부처님 같은 분이 계십니다.
이것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약탈한 성물에서 영감을 얻은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동양적인 예수님이랍니다.
점점 많은 이들이 유럽의 성당 안에서 신앙심을 찾기가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전면무료입장을 하게 하라는 교황님의 말씀에도
대부분의 성당은 유지보수와 자선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고 있고
관광객을 출입시키느라 신자들의 예배를 침범하는 행위까지도 하고 있으니 말이죠.
넉넉하지 못한 세대에 유독 성당만이 화려하고 거대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애초에 정당한 신앙심만으로 세워지진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런 곳에 과연 하느님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성당에 들어가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합니다.
존재가 불확실한 신께라도 빌어야 할 일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많아지니까요.
오후 동선을 구글 지도에 입력하니
늦은 시각에 거대한 규모의 장난감 가게 Hamleys를 지나게 된다는
그리 반갑지 않은 정보를 전해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서부터 가고 싶었던 무하 박물관을 앞에 두고도
아이들은 체면에 걸린 듯 한 곳을 바라보고 있네요
그리 크지 않은 입구에서부터
장난감, 인형들이 내 뿜는 달콤한 냄새에 취해서
모여든 세계 각지의 아이들. 그리고 우리 세 자매.
"그래 가자. 가...
마침 화장실도 가야 했는데 돈 굳었다."
매장 안은 놀이공원을 연상시킬 만큼 크고 화려했습니다.
'눌러보세요' '만들어 보세요' '그려보세요'
전시된 장난감 앞마다 쓰여있는 글귀는
조심스러워 선뜻 손대지 않는 우리 아이들을 향해 끝없이 독촉하고
요정 복장을 하고 있는 스텝들은 체코어가 먹히지 않는 아이들에게까지
어떤 사명을 띠고 아이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눈으로만 보세요' '만지지 마세요'가
더 익숙한 우리에게 이렇게 너그러운 공간이 허락되니 마음이 푸근해지네요.
알퐁소 무하의 박물관이 바로 옆인데 포기해야겠네...
신세계를 만난 아이들에게 나가자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
체념한 채 1층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올라갈 때는 에스컬레이터로 갈 수 있지만 내려올 때는
어른도 미끄럼틀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햄리스의 터널 미끄럼틀은 어떤 한국 아줌마의 엉덩방아로 여러 번 몸살을 앓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