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를교의 야경이란
여행~이란 단어의 울림은 참 신기해요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면서는
내 집이 최고다 싶다가도
한달만 지나면 그 '여행'이란 말에 또
금세 가슴께가 간질간질 해진단 말이죠^^
프라하~ 라는 발음의 느낌은 또 어떤가요
입술을 터뜨리며 시작되어
폐의 모든 공기를 소진하며 끝나는 그 지명은...
오랜 구속에서 벗어난 사람이 느끼는
자유와 닮지 않았나요
프라~하~
아놔...
저는 지금
그런 프라하의 지명을 넣었는데
자꾸만 가래끓는 소리가 나는 프랑크푸르트로 가라고 우기는
구글 지도와 겨루기를 하는 중입니다.
'야! 아니라고.
내가 찾는 곳은 지금 서 있는 곳과 아주 가까운 어딘가에 있다고!'
중앙역 주위를 뱅뱅 도는 동안 프라하의 하늘은
너무 높은 채도를 가지고 온 우리 아이들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불만스럽게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오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는데
아까부터 큰 아이의 눈빛이 심상치 않네요.
"넌 엄마 손바닥 안이야
엄마가 니 머리속에 들어갔다 나왔어!"
라는 말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13살 소녀는
"엄마 지금 그 말 취소해"
생전 처음으로 제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도전합니다.
'헛! 이 자식이 많이 컸네?'
'내 삶은 엄마가 써 놓은 문장 안에 다 들어있지 않아
말해도 엄만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 안에는 엄청 많단 말이야.'
"그 말 취소해 엄마... "
"그래 취소할게. 미안해"
용서한다는 의미로 서로 안고 나서도
땅을 보며 터덕터덕 보란 듯이 불만스럽게 걷는걸 보니.
확실한 사춘기네요
요즘 말과 행동이 유독 미워지는 중입니다.
좀 자라면 쉬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까요?
아이들과 함께 걷는 삶이란...
그렇게 도착한 프라하에서의 첫 번째 숙소는
이들의 선조의 선조부터 살았을 법한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에 들어서 있는 한인민박집이었습니다.
"저렴한 민박이지만 아침저녁 한식을 먹을 수 있고
특히 밤마다 무제한 맥주랑 삼겹살을 먹을 수 있다니까...
시설이 좀 낙후되어 있다는데 뭐 어때
프라하에 왔으니 응당 오랜 저택에 한번 묵어봐야지.
게다가 프라하 중앙역에서 가깝기까지 하다.
그래 결정!!"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였죠.
빈티지가 공포로 느껴지는 낡은 계단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카펫이
관절마다 삐그덕 삐그덕
그냥 누워있는 것도 힘든데
왜 밟고 가고 지랄이냐며 따져 묻습니다.
화장실은 위아래층이 모두 고장 나
남녀가 한 칸짜리 화장실과 샤워실을 함께 써야 했고
군대에서 사용하던 것과 비슷해 보이는 침대와
유서 깊어 보였던 타월과 매트커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미지근한 성격을 자랑하던 라디에이터까지.
숙소 안의 모든 시설들은 여행자들의 확실한 불편을 위해 설계되어 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여기서 아이들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으려나요...
모든 게 불만족스러운 제 마음에도 불구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말에
아이는 조금 전의 일은 모두 잊었다는 듯 다시 웃고 있네요
"얘들아 맛있는 거 먹는대! 그리고 나서 마법의 성을 보러 갈 거야!"
아이의 여행에선 날씨나 숙소 컨디션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겠죠
갖가지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거리로 나와 무엇을 먹고 싶냐 물으니
엄마가 주는 건 뭐든... 하며 환한 웃음을 보이네요.
따뜻해 보이는 식당 앞에서,
작은 촛불과 꽃이 반기는 둥근 식탁 앞에서
난생처음 보는 체코 음식 앞에서...
아이는 매번 더 환한 웃음을 갱신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엄마도 좀 웃어하듯이...
못 이긴 척 웃어 보이며 아이를 카메라에 담습니다.
"우와~ 완전 대박! 완전 멋져!"
불과 1년 전만 해도 어딜 가나 좀처럼 과한 표현을 하지 않는
늘 착하고 순종적이던 아이였죠.
100점 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는 완벽 주위 경향이 걱정되긴 했지만
어쩜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그렇게 잘하냐는 주위 엄마들의 부러움에
많이 우쭐했던 것도 사실이예요.
그랬었죠.
하지만 아이가 바뀌는 데에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죠.
"엄마! 점수가 뭐 그리 중요해?"
"애들은 집에서 공부를 하나봐..."
이제 막 점수가 중요해지기 시작한 때인데 어쩜...
물론 더 변한 건 제쪽입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다섯 개씩이고
눈코 입이 온전하다면 그것만으로도 벅차던 엄마.
별 탈 없이 자라는 아이에게 무한감사를 드리던 저는
아직 여전한지 되물어 봅니다.
다른 아이와 달랐으면.
더 뛰어나고 더 똑똑했으면. 그러면서도 착하고 순수했으면.
이왕이면 늘씬하고 예쁘게 자라줬으면...
끝도 없는 비현실적인 바람들이
아이를 담는 프레임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긴장하지 말고
재밌게 학교생활을 해달라 한건 불과 1년 전 일이었죠.
이제 이 녀석은 제 키를 넘보고 있습니다.
이미 자신만의 성을 쌓기 시작했으므로
멀리서 지켜보는 것, 그 이상의 행동은 관심이 아닌 간섭이죠.
따뜻하지만 벗어던지고 싶지는 않은 적정한 온기
그것이 필요하겠죠. 압니다.
전 늘 이론에 빠삭하니까요.
까를교의 야경은 넘치지 않는 온기가 뭔지 알려줍니다.
은은한 불빛에 멀리 보이는 프라하 성과
다리를 수놓은 섬세한 조각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어요.
빨간색 트램은 짤랑짤랑 두부 아저씨의 핸드벨을 닮은 소리로
이따금 사람들을 멈춰 세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도 목표물을 만난 사격수처럼 숨을 멈추고 저격하듯 사진을 찍었죠.
영원히 잡아두고 싶은 장면은 몇 분 마다 눈앞에 닥쳤고
카메라 안에는 그림 같은 도시의 모습이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빛, 소리, 온도 모든 풍경이 적당합니다.
너무 많은 자극이 불편했던 시신경에
어두운 블타바 강은 오히려 위로를 주는 듯 합니다.
그 풍경 안에서
모든 무거운 것들을 검은 강안으로 던져 버리자고 다짐했었죠.
최고의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에 밀려 내 일을 하지 못해 생기는 초조함
젊음에 대한 집착과 노후에 대한 불안.
내친김에 많이 다니고 찍고 써야 한다는 강박까지...
모두 떨어내고 나니 가볍습니다.
비로소 아이를 보고 웃음이 나오네요.
달콤한 뚜르들로를 하나 사서 나눠 먹으며 걸으니
이젠 엄마가 너무 좋다고 고백까지 합니다.
그래 그러면 되었죠.
그런 날이 있습니다.
뭐가 어떻든 마지막엔 다 잊고 행복해지는...
딸의 오늘 같은 그런 날 말입니다.
큰 아이가 저만큼 자라 어깨를 나란히 하니
저에게도 그런 날이 더 많아지네요.
참 고맙습니다.
이 아이와 여행이 허락된다는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