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꿈꾸도록 길러진 것들

NOT TAKEN

by 임제이

총을 맞았다.

젖꼭지 옆 능선과 부풀어 오른 살덩어리 사이로 엄지손가락만 한 총알을 꺼냈다. 요즘은 꿈속에서도 ASMR 사운드가 들린다. ‘지지직 튁 자그지지직 부르르…’ 최근 극장에서 본 서브스턴스 때문이다. 대형 화면을 가득 채운 살점이 칼로 찢기는 소리. 너무 생생해서 내 것이 잘려나가는 기분이었다. 꿈이나 영화나, 실질적으로 아프지 않다는 것이 다행이다. 마침내 몸속에서 ‘가짜 덩어리’를 발라냈다.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내가 지금 그렇다.


사주는 믿지 않는 편이지만, 재미 삼아 여기저기서 모은 점괘가 이상하리만큼 딱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서른 후반엔 결혼을 하고, 아기도 하나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언니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좋다고 했다. 삼 년의 지옥이 끝나는 2025년부터 인생이 조금 나아진다고 하더니, 올 초부터 정말 무언가 달라지는 기분이다.

동화에는 왕과 왕비, 공주가 있다. 역사에는 권력의 다툼이 있다. 삶에는 누가 더 사랑하고 사랑받는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존재한다. 어떤 책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둘째 딸로 태어난 나는, 세상이 원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예뻐질 때마다 힘이 생겼다. 유능해질수록,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시대의 기술을 잘 활용할수록, 나는 커져갔다. 처음엔 스쳐 지나가던 눈빛들이 어느 순간 내게 고정되었고, 수줍어했고, 반짝였다. 어둠 속에서 나온 맹수는 거침이 없었다. 나는 관심을 받을수록,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남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가장 빛나는 보석, 모두가 탐내는 포식자가 되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가 태어난 이유인 것 같았다.


보스턴, 뉴욕을 떠돌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무엇이든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유명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배우가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보았고, 노래와 댄스를 배웠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법을 익혔다. 감탄과 박수를 받을 때면, 어쩐지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존재의 불안이 사라졌다.

부자가 될 수 없다면, 부자와 결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안전하고 가치 있는 인생이 보장된다고.

재즈 바에서 노래하는 장면을 수없이 꿈꿨다.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노래하는 나. 그리고 테이블 한쪽에서 나를 지켜보는 백만장자. 무대가 끝나고 그가 다가와 말한다. “넌 특별해. 널 위해 뭐든 해주고 싶어.” 나는 그 말이 인생의 정답처럼 들리는 사회에서 자랐다. 사랑받으면, 선택받으면, 보호받으면 성공이라고.


그러나 이제 안다. 나는 보호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누구의 선택을 기다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미 충분하다. 내 노래는, 내 이야기는, 어떤 조건 없이도 의미가 있다.


세상은 여전히 강요한다. 사랑스러울 것. 현명하되 남자를 위협하지 않을 것.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직접 쟁취하지 말고 얻어낼 것.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걷지 않겠다.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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