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빗발치듯 쏟아지는 미움이 눈치 없이 왕왕댄다. 몇 개는 들여다보다 속이 쓰려 덮어버렸다.
“너만 빼고 네 주변 인간들은 다 악마냐?”
“나르시스트.”
“나한텐 맨날 배달음식 시켜주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스테이크 해주고.”
“지겨운 레퍼토리.”
“허당끼를 채워줘서 고맙게 생각하진 못할망정.”
“너 이사할 때마다 내가 항상 옆에 있었던 건 모르지?”
“너 일자리도 알아봐 주고.”
“넌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 같아.”
“서운하고 안 좋은 것만 기억하고.”
“본인만 생각하는 지극한 이기주의자. 그러면서 피해자 코스프레.”
마흔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깨달았다. 언니가 나를 규정해온 이 모든 말이 어쩌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자신이 없었던 게,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그런 사람으로 단정 지었고, 내가 그것을 믿어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엄마 뱃속에서부터 나는 아들이길 바라는 기대를 받았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까지도, 음순이 유난히 커서 고추가 아닐까 착각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그러나 결국 부푼 기대를 산산이 깨뜨린 아이. 할머니와 아빠, 그리고 엄마가 실망했던 그 태초의 순간, 나는 여자아이였다.
단추를 엇갈리게 끼우고, 바지가 흘러내려도 매무새를 다듬지 않는 아이.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늘 주변을 맴돌다가 언니가 소리쳐야 헐레벌떡 달려오는 아이.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북적이는 시장에 갔을 때였다. 한 남자 상인이 끄는 수레에 발등이 밟혔다. 순간 따끔했지만, 그보다도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부끄러웠다. 아저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정신없던 엄마 아빠의 눈빛이 기억에 남았다. 그들의 시선은 내 발이 아닌, 저 멀리 출구를 향해 있었다. 단순히 시장을 빠져나가는 문제 이상이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얽히고설킨 사슬, 그걸 끊어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시급해 보였다. 나는 감히 내 발을 내밀고 “아파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 일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건, 어린 나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발만 내려다보던 아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을 품고 있었을까. 없는 듯 조용히 지내다 누군가 온기를 던져주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뻤다. 반면 언니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꺼이 사람들을 욕했고, 슈퍼에 가면 언제나 망설임 없이 빵빠레를 집어 들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왜 나는 군것질 대신 저축을 택했고, 왜 모든 비난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참아냈을까. 그렇게 하면 더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왜 나는 점점 더 불행해졌을까.
오랜만에 목욕탕에서 때를 밀었다. 이태리타월을 손에 끼우고 팔을 긁어내리자, 나무 조각이 사포질에 흩어지듯 오래된 각질이 부스스 떨어졌다. 둔부, 종아리, 손등, 가슴, 배, 발가락 사이. 온몸을 문지르며 밀려 나온 때가 바닥에 쌓였다. 문득, ‘때밀이’가 한국에서만 유독 발달한 문화라는 것이 떠올랐다. 인간의 세포는 7년마다 완전히 교체되지만, 우리는 정작 7일 묵힌 각질은 견디지 못하고 벗겨내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쉽게 잊으면서, 보이는 것에는 유난히 예민한 태도. 자주 씻을 여유도, 건조한 피부를 보호할 오일도 부족했던 나라. 그러나 때를 밀어낼 섬유는 반드시 찾아냈고, 거기에 ‘이태리타월’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마치 유럽에서 온 것처럼. 피부에 살짝 검은 구정물이 묻어나면 조바심이 나고, 남이 볼까 불안해하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는 수치심이 많은 민족인지도 모른다.
어떤 책에서 읽었다. “수치심은 자신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감정이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고 쉽게 이름 붙이고, 그걸 대하는 태도는 늘 조급하다. 나와 다르면 금세 도망치고, 그러다 80%의 사람이 ‘이상한 것’에 면죄부를 주면 그제야 안심하며 그 무리에 섞인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원했던 존재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들조차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사람들은 사실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남들이 다 하는 잘못된 행동에 휩쓸리고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한다.
나는 원하는 것을 얻으면, 또 다른 것을 원했다. 마치 처음 원했던 것이 그게 아니었던 것처럼.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구멍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애초에 나는, 불충분한 사람이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