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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친구 지혜 Jan 07. 2021

카드 고지서와 보험으로 나를 알리다

정신과 진료 사실을 알린다는 건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망설임이라는 늪을 건너야 한다.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검색 사이트에 #정신건강의학과추천 #우울증약부작용 등을 검색하면서 지금 병원에 가는 것이 과연 자신에게 옳은 선택인지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고민해 봤으리라. 요즘엔 병원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정신건강과 관련된 오해를 바로잡는 전문적인 정보들이 많이 올라와 있어서 다행이지만,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우울증에 대해 검색을 하면 약에 중독될 수 있다는 식의 ‘카더라’들이 난무했다. 이러한 변화는 정신건강과 관련한 사회의 시선이 ‘미신’에서 빠져나와 ‘과학’으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전문 지식을 얻고 약의 부작용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고 해서 곧바로 병원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 인식이 개선됐다고 해도 상대적인 결과일 뿐이고, 그 사회가 온전히 변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의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검색 사이트의 링크들을 타고 넘으며 고의든 아니든 끝내지 못한 고민을 계속할 것이다. 망설임의 늪에 빠져 고통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병원을 다니며 받게 될 유무형의 차별에 고통을 받을 것인지를 저울질하면서 말이다.


내가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한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곳은 카드사였다. “00정신과 의원 금액 00원” 나와 병원 사이의 은밀한 비밀일 수 있었던 일은 카드 영수증에 인쇄된 채로 내 손에 쥐어졌다. 마치 카드사가 나와 병원의 관계를 증명해 주는 증인이 된 것만 같았다. 증명서로서의 병원 영수증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걸 흔적을 남기지 않고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비밀이 탄로가 날 것처럼 느껴졌다. 찢어서 버리면 충분할까? 불로 태워서 재로 만들까? 먹어 삼킬까? 등 별의별 방법들을 고안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나는 첫 증명서를 어딘가에 흘려 잃어버렸다. 아마 어느 길가엔가 떨어져 나에 대한 비밀을 말하고 있었겠지. 


카드사 다음으로 내 정신건강에 대해서 알게 된 곳은 국민건강보험이었다. 병원을 처음 찾아갔을 당시엔 정신건강 상태가 위태로웠고, 너무 어리기도 했거니와 보험에 대해서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기에 F 코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F 코드는 정신과 질환으로 분류하는 질병코드를 의미한다. 병원을 다니면서, 그리고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거나 다니기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자연스레 F 코드에 대해서 알게 됐다. F 코드의 위엄은 대단했다.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에 대한 조언을 요구하는 글만큼이나 보험과 관련된 질문들이 있으니까. “들 수 있는 보험은 다 들고 병원에 가라”라는 현실적인 조언부터 시작해서 “국정원에 갈 거 아니면 F 코드는 상관없다”라는 안심시키는 답변까지 F 코드를 둘러싼 이견들이 인터넷에 넘친다. 모두의 말은 결국 다음으로 귀결됐다. F 코드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든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는 것은 인생에 큰 방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한다. 


한때 나는 1년에 축농증을 3번 이상 걸릴 정도로 기관지가 좋지 않았다. 자주 다니던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과는 안면을 틀 정도로 친해졌다. 어느 날인가는 축농증의 예후가 좋지 않아서 의사선생님이 조심스레 제안을 했다. “신경을 좀 풀어주는 약을 사용하려고 해요. 그런데 이게 우울증 관련한 약이기도 해서요. 이런 기관지 치료에도 쓰이는 거고 소량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진료실을 나서려고 문을 열었다. 그때 의사선생님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이런 약을 이미 처방받은 적이 있다고 뜨는데요?” 나는 뭔가 해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고, “아, 제가 우울증이 있어서 병원에 다녀요.”라며 빠르게 말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그 이후로 더 이상 축농증이나 감기에 걸린 일이 없었다. 


그렇게 카드 고지서와 보험, 그리고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까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비밀이 공공연해졌다. 나 또한 이렇게 내 비밀을 떠벌리고 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이제는 우울을 ‘이겨내는’ 게 아니라 우울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래서 우울증은 더 이상 감추거나 제거해야 하는 비밀이 아니라 내 일부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 행동으로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여전히 나는 “우울증을 의지로 이겨내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마주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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