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 친구 지혜 Jan 24. 2021

의사 찾아 삼 만리2

겨울엔 비타민D를 드세요

첫 번째 병원은 약이 잘 맞지도 않고 거리가 멀어서 병원을 옮겼다. 두 번째 병원에서는 의사에게 내 모든 이야기를 밝혔으나 비밀이 지켜지지 않아서 다른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 번째 병원은 거리도 적당했고, 나만 의사 앞에서 조심히 말하면 문제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앞선 두 병원과 비교할 때, 세 번째 병원은 아담했다. 작은 대기실의 한쪽 면에는 통유리로 햇살이 들어왔다. 10층 이상의 높은 층에 있는 병원이라 그런지 보이는 전망이 훌륭했다. 오전에 가면 이제 막 중천을 향해가는 햇살 아래 만물이 그늘 없이 빛나는 모습이 좋았고, 해가 질 무렵이면 저 멀리 태양이 지는 곳으로 붉은빛이 휩쓸려 가는 모습이 경외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기실에서의 풍경을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 병원을 내가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대기실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기다림 반 설렘 반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그곳을 마지막으로 찾아간 지도 이제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나는 병원 프런트에서 나에게 약을 건네주던 간호사 선생님과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기억한다. 특히 의사 선생님은 내 고등학교 시절 내가 좋아했던 윤리 선생님을 꼭 닮았다. 그곳에서 듣던 라디오 클래식 FM과 노란빛을 띠는 인테리어까지 그곳이 내게 준 이미지는 아늑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곳을 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더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다. 아픈 환자도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도 모두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의사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인연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은 한 달 가까이 입원을 했다. 안타깝게도 입원 후에 바로 진료를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의사 선생님을 만나려면 약 3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보통 약을 짧게는 2~3일, 1주일, 2주일, 길게는 한 달 단위로 준다. 그 당시 나는 2주 단위로 병원에 방문했기 때문에 3달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재밌게 읽고 있던 소설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와 같이 병원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존 의사 선생님을 대신해 진료를 맡은 임시 의사 선생님은 한 마디로 성의가 없는 분이었다. 책상 위에 버젓이 내 진료 차트를 덮어둔 채로 나에게 물었다. “병원에는 무슨 문제로 오셨죠?” 나는 그때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앞의 환자가 진료실에서 나온 지 1분도 되지 않아 내가 이 의사 앞에 앉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내 차트를 펼쳐볼 새가 없었을 것이다. 나 이전에 진료실 의자에 앉았던 환자들과 나 이후에 이 의자에 앉게 될 환자들에게도 나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겠지.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 “넌 도대체 뭐가 문제니?”라고 묻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남들보다 ‘우울한’ 데에는 모종의 명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실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은 ‘이유 모를 우울’에 시달리고 있다. 처음에는 내 우울이 어디서 오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만약 우울의 근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운아이다. 자신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그 이름을 적어도 알고는 있는 거니까. 


나는 마치 5글자로만 말하는 게임에 걸려든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우울해서요.” 


우울증의 수많은 증상들과 내가 겪는 어려움을 모두 소거하고 결국 ‘우울하다’란 단어만이 내 앞에 덩그러니 남았다. 내 대답을 들은 의사의 표정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라는 표정으로 자신의 미끼에 걸려든 물고기를 쉽게 낚아챘다. 


“그럼 여름과 겨울 중에 언제가 더 힘든가요?” 

이 의사가 내 우울에 대해서 어떻게 판정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나는 낚싯바늘에 채여 낚싯줄에 끌려다니는 물고기처럼 질문에 휘둘려 대답을 했다.


“아마 겨울이오.”


[비타민D, 2000IU]


그 의사는 나에게 네모난 쪽지 하나를 휙 던져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비타민D를 꾸준히 먹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나는 그저 알겠다고 말하고 자리에 일어섰다. 내가 일어난 자리에는 상처를 입은 물고기 한 마리가 퍼덕거리는 것마저 포기한 채 가만히 눈만 뜨고 있었다. 


아, 내 우울은 비타민D 2000IU 정도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의사 찾아 삼 만리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