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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Aug 31. 2020

여름의 한가운데에서도 여름이 그리운 때에

- 여름을 감각하게 하는 영화들 <남매의 여름밤>, <여름날> 외

추위를 많이 타는 터라 여름과 겨울 중 고르라고 하면 단연 여름이다. 폭염이 심한 해나 올해처럼 기나긴 장마가 오는 때면 계절이 빨리 바뀌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땀이 적고 더위를 덜 타는 나에겐 추위에 몸이 움츠러드는 겨울보다는 여름에 더 활력이 있는 편이다.


뜨거운 여름에 꽃이 핀다는 배롱나무


올해는 여름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뜨거운 태양과 잦은 비를 맞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푸른 잎들, 열과 성을 다해 울어대는 매미소리, 너른 바다나 깊은 계곡의 시원함. 아무리 더워도 여름, 하면 떠오르는 이 모든 것들을 올해는 마음껏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물론이고 길고 길었던 장마와 폭우를 생각하면, 내 여름을 돌려달라고 하고 싶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 그대처럼,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여름이 그립다는 느낌. 8월을 다 보내고 난 지금, 왠지 사무치는 기분이다.



<남매의 여름밤>과 <여름날>. 그 때문인지 최근 본 2편의 영화 속 여름이 유난히 특별하게 다가왔다. 제목부터 여름을 감각하게 하는 영화.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2019년에 만들어진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졸업 작품이자 첫 장편 데뷔작이다.


여름의 풍경, 여름의 맛    

*<남매의 여름밤>은 파랑으로, <여름날>은 주황색으로 표기합니다.


두 영화는 모두 주인공이 새로운 공간에 도착해 보내는 여름 한 때를 그린다. 재개발 구역인 집을 떠나 여름방학 동안 할아버지의 양옥집에서 지내게 되는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의 이야기 무슨 이유인지 서울에서 고향인 거제도로 내려온 승희(김유라)의 이야기. 이들의 여름은 겉보기엔 별다를 것 없이 조용히 흘러가지만 소소한 만남과 사건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며 뜨거운 여름을 보낸다.


영상 속 여름을 느끼게 해주는 건 기본적으로 열린 창문과 그 바깥의 푸르른 나무, 매미소리와 선풍기 바람 등이다. '고향집' 또는 '양옥집'이라고 하는, 도시가 아닌 공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공간에 배치할 수 있고(공간은 모두 실제 장소라고 한다), 자연으로 둘러싸인 거제마당에서 텃밭을 일구는 할아버지 덕분에 여름의 푸르름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두 영화는 그야말로 눈으로, 귀로 여름을 마음껏 감각할 수 있게 한다. 집 앞 슈퍼 평상에 앉아서 맥주를 마신다던지, 낚시를 하다 만난 동네 청년과 함께 (폐위된 왕이 유배되어 있던 성이라는 뜻의) '폐왕성'에 힘겹게 오르는 장면, 그 위에서 보는 거제도 바다 풍경 등도 그렇다.


<여름날>


여기에 더해 <남매의 여름밤>에서는 여름의 별미도 등장한다. 할아버지 집에 도착한 첫날 먹는 콩국수, 양옥집 2층에서 남매가 함께 먹는 비빔국수, 가족이 모두 모여 먹는 수박까지. 음식이 전하는 계절감을 맛볼 수 있다.


<남매의 여름밤>


가장 푸르른 때 도달하는 슬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에서 노부부가 자식들을 만나러 도쿄에 온 계절은 더운 여름이다. 부모님의 방문을 부담스러워하던 자식들은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2008)도 '여름'으로 기억되는 영화인데, 뜨거운 여름 가족들이 모이는 이유는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다 죽은 아들의 기일 때문이다.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네 자매가 모이게 되는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역시 배경은 여름이다.


<동경 이야기> / <걸어도 걸어도> / <바닷마을 다이어리>


가장 푸르른 때인 여름에 찾아오는 죽음은 계절의 눈부심과 대비되어 더욱 슬픈 정서를 준다. 땀과 뒤섞여 어딘가 보는 이를 더욱 지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할아버지의 죽음과 <여름날>에서의 할머니의 죽음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서서히 다가온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조금씩 마음을 쌓아가던 옥주에게, 그리고 이혼 뒤 자신을 떠난 엄마를 원망하는 옥주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은 그 자체로 상실의 경험이자, (엄마에 대한) 상실을 마주하는 계기가 된다. 동생 동주에게 엄마를 만나러 가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도, 사실은 자신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고, 장례식장에서 잠이 든 옥주의 꿈이 말을 한다. 집에 돌아온 옥주의 터져 나오는 울음이 말해준다.

<남매의 여름밤>


<여름날>의 승희가 머무는 거제도 고향집에는 돌아가신 엄마의 옷가지가 아직 남아있다. 누워있는 할머니의 곱슬거리는 백발을 영화가 몇 차례 보여주고 얼마 후 승희가 검정색 상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할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엄마의 죽음도 함께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홀로 '폐왕성'에 오른 승희의 뒷모습은 서울에서도, 고향집 거제에서도 '유배'되어 있는 듯한 승희의 감정을 드러낸다. 앞으로 펼쳐진 너른 바다가 그런 승희를 위로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여름날>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든 여름은 지나갈 것이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 때쯤 영화 속 인물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여름방학이 끝난 옥주와 동주는 다시 학교에 가게 될 테고, 승희는 아마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일상은 또 평범하게 흘러가겠지만 각자의 '상실'을 마주한 주인공들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지 모르겠다. 태양과 빗물로 훌쩍 자라나고 푸르름은 짙어질 대로 짙어진 식물들처럼, 한 뼘 더 자라고 한참 더 깊어져 다음 계절을 맞이할테니.


계절은 돌고 여름은 다시 오겠지만 내년의 여름은 올해와는 어떻게든 다를 것이다.


'우리'의 여름도, 어떻게든, 그랬으면 좋겠다.  




덧1. 두 영화에 대한 인터뷰 글


http://reversemedia.co.kr/article/286

http://reversemedia.co.kr/article/391



덧2. '여름 영화'들을 떠올리다가 더 생각난 영화들.

강릉 주문진을 배경으로 촬영한 <나는 보리>(2018), 일본의 지방 소도시를 누비는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 그리고 대망의... <  바이 유어 네임>(2017). 그리고 ......?

 여름이  가기 전에    봐야겠다. :)


+ 에릭 로메르 <여름 이야기>(1996), 기타노 다케시 <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 <기쿠지로의 여름>(1999)

+ 요즘 편안히 보고 있는 tvN <여름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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