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린 구 씨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서있다. 얼마 뒤 그는 소규모 가구공장에서 일을 하고 매일 술을 마시며 미정이를 추앙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결핍된 사람들의 화학적 결합을 이뤄가는 이야기로 구 씨와 미정을 비롯한 서사에 큰 인기를 끌었다. 정작 내 눈길은 산포시 당미역에 있었다. 보통의 서울 사람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논밭이 펼쳐진 풍경에서 회사를 대중교통으로 다닌다는 사실에 공감이 갔다. 대학 신입생 시절 일산에 산다고 하면 어떻게 통학하냐는 주변인의 반응은 극 중 미정이가 느끼는 감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도권은 대한민국에서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를 통틀어 일컫는 지역 명칭을 뜻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산에서 자라고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에 나는 수도권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김동률 콘서트를 간다거나 중요한 약속, 하다못해 결혼식장을 가려고 해도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은 넘게 걸린다. 어디만 다녀오면 반나절이 훌쩍 넘는데 수도권에 산다는 게 정말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수도권이라는 말은 통합명칭을 가장한 서울을 말하는 게 아닐까.
태어나 자란 곳은 은평구에 있는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의 오래된 사택이었다. 연탄을 갈아야 난방이 가능했고 외풍이 심했다. 얼기설기 생긴 골목에서 공놀이를 하고 반지하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가 밥을 얻어먹었다. 닌텐도 게임보이를 자랑하는 동네형에게 한 번만 시켜달라고 절절매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어려운 형편에도 부모님이 게임기를 사주셔서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택시 매연이 많아 공기질도 좋지 않았고, 온수도 나오지 않아 감기를 달고 살았다. 일산 아파트로 이사 온 날 콸콸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물이 신기해서 동생이랑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이사 후 감기에 걸린 기억은 거의 없다.
강남에 산다고 하면 오오 했던 대학생 시절을 지나 이제는 서울에 산다고 하면 다시 쳐다보게 된다. 국민 평수 기준 이미 10억을 넘어버린 서울 집값을 미뤄볼 때 전세도 만만치 않고, 특히 자가라면 재산 규모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커지는 양극화에 강남은 이미 넘사벽이고 서울이냐 아니냐를 넘어 언젠가는 수도권이냐 아니냐를 논할 것 같다. 경기침체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지만 반값 아파트가 나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서울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서울이 아니다.
당미역에 내린 구 씨는 결국 서울 어딘가 제자리로 돌아갔고 미정을 다시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꺼낸다. 미정의 오빠인 창희는 망한 사업을 극복하고 서울 어귀에 편의점을 차려 생을 이어간다. 서울 사람이 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며 산포시의 빈 기억을 서울 사람으로 채운다. 결혼을 하며 인천시민이 된 지금 큰 이변이 없다면 여기에 살 것이다. 인천 역사는 공부하지 않은 채 주말에 있을 결혼식장 가는 광역버스를 검색하며 잠깐 한숨을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