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진작 벗어 날 껄’- 소중한 시간은 다 지나갔다

by 치유 컴패니언

“우리는 자신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느낌을 스스로 차단해왔다는 것을 때로는 놀라우리만치 명확하게 깨닫는다.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으나 놓쳐버린 순간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살지 않은 삶을 슬퍼하기 시작한다.”

-《삶에서 깨어나기》, 타라 브랙 Tara Brach, p.297-


저녁을 먹고 아내와 같이 집 주변을 걸었다. 소공원에서는 농구하는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숨을 헐떡이며 시합을 하고 있었다. 배드민턴장에는 중년의 부부들이 서로 짝을 지어 공을 넘기고 받으며 함성을 질렀다. 킥보드를 타는 아이에게 아빠가 헬멧을 다시 씌워주고 있었다. 엄마는 벤치에 앉아 흐뭇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올라왔다. 내가 아이들과 같이 저렇게 온전히 같이 있어 준 적이 있었나? 삶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나의 40대 중반 이전까지의 삶에 대한 회고이다. 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40대 중반 이전과 이후가 많이 달라졌다. 40대 초반에 죽을 만큼 힘든 상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때 살기 위해 택한 방식이 속마음 털어놓기였다.


나는 과거를 회상하면 40대 이전의 기억은 대부분 회색빛처럼 흐릿했다. 어릴 때부터 신체적 열등감으로 늘 당하기만 했다는 기억이 배경으로 깔려있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앞에서 대들어 싸우지는 못했다. 그냥 마음속으로만 반감을 쌓아갔다. 내 마음속에서는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욕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는 공업고등학교에서 걸어서 통학할 때 당당하게 힘이 있어 보이려고 각을 잡고 다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마음속에서만 나를 추켜세우고 있었다. 시골 고향에서 도시로 공부하러 온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나는 초라함을 느꼈다. 그들은 인문계 고등학생이었고 나는 공업고등학교에 다녔다. 나는 그들과 시골에서는 몰랐는데 도시에서는 비교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도 공업고등학교 학생에 대해 좋게 봐주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점점 자존감은 떨어졌다. 반대로 내 마음속에서는 오기(傲氣)가 쌓였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증표인 기능 자격시험에 떨어져 너무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아쉬움과 억울함이 두고두고 남았다. 시험 트라우마를 겪었다. 떨어진 이유는 처음 시행된 컴퓨터 답안지 채점이었다. 답을 잘못 옮겨 적었기 때문으로 위안 삼아 이해하고 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털어놓지도 못했다. 나는 혼자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기능사 자격이 없어 공장에 취직을 하지 못했다. 동기들은 3학년 1학기에 대부분 산업체 공장에 취직해서 실습을 나갔다. 3학년 2학기에도 나는 몇 명 남지 않은 동기들과 학교에 다녀야 했다.


초라함, 무기력함, 막연함, 외로움, 답답함, 죄책감, 좌절감, 패배감, ‘왜 나한테만 이런 어려움이 오는 거야?’라면서 운명에 대한 비난과 울분이 차올랐다. 내 속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가슴에 묻었다. 그때 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조언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100명 중 99명이 모두 취직했으니, 취직하지 않은 1명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를 지켜줄 수 있었던 한 가닥 자존감은 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해서 돈 버는 것이었다. 그것마저 사라져 버렸다. 점점 무리에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을 못 하고 고향에 있을 때였다. 부모님이 서울에 있는 친척분에게 취직자리를 부탁했다.


나는 서울 을지로 인쇄 골목의 조그만 인쇄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직원은 기술자 3명에 경리사원 1명, 영업사원 1명이 전부였다. 내가 하는 일은 사장이 시키는 영업 심부름이었다. 인쇄물을 포장하고 배달하는 일, 주문받아오는 일 등 모든 잡일을 다했다. 나는 인쇄공장 천장의 창고를 치우고 몸만 누워 잠만 잘 수 있는 곳에서 살았다. 사장이 밤새도록 일 시킬 수 있는 조건이었다. 대가는 밥 한 끼 사주는 것이 전부였다. 야근 수당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받아본 적도 없다. 그 당시에 나는 노동 착취를 당했으면서도 항의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조차도 못했다. 나는 사회생활을 해본 적 없는 얼간이었다. 나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장이라서 급여도 여자 경리직원보다 적었다.


나는 매달 돈이 모자라 월급 가불(월급을 미리 당겨 쓰는 것)을 했다. 명절에 돈이 없어서 두 번이나 고향에 가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서 막연하게 청계천 상가 골목을 걷는데 짜장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먹고 싶어 목구멍에 침이 넘어갔지만, 돈이 없었다. 한참 동안 서서 식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인쇄소를 그만두고 중국집에 취직하면 짜장이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기술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쇄소에서 계속 일을 해도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었다. 말이 영업이지 사장 심부름하는 일이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고, 무능하고, 자신감 없고, 무기력한 사람인가?’ 자책을 했다. 나에 대한 분노와 짜증, 비난이 올라왔다. 내가 한심(寒心)하게 느껴졌다.


나는 인쇄소 생활 4년을 하고 고향에서 군 복무를 했다. 단기사병(당시에는 방위병이라고 함) 근무를 했다. 호적상 나이가 늦어서 내 첫째, 둘째 동생뻘 되는 후배들과 같이 근무했다. 고향 동기나 후배들에게 고향 사람들 보는 앞에서 군기(軍氣) 잡는다고 기합도 받았다. ‘내가 현역으로 군 복무를 했더라면 자신감이라도 길렀을 텐데’라는 막심한 회한이 밀려왔다. ‘왜 이렇게 나는 자존감이 상하는 상황을 계속 겪을까?’당당하게 정상적인 무리에 속하고 싶었는데, 매번 변두리에 밀려나 있는 느낌이었다. 제대 후에 석 달 동안 대학 입시 공부를 했다. 학습지 책 8권으로 집에서 혼자 했다. 나에게는 마지막 내 자존심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대학 가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라고 체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가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속에서는 ‘내가 대학 갈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계속 올라왔다. 나를 위로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은 ‘갈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여건상 못 가는 사람’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이후에는 미련 없이 서울로 가서 인쇄소 업계에서 돈을 벌기로 했다.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인쇄소 영업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길도 찾으면 있었을 것이다. 공무원 시험도 있었고, 다른 공장에 취직자리도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냥 내가 아는 길만 우물쭈물하면서 걸어갔다. 눈먼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합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욕심이 생겼다.


나는 집안 어른들께서 십시일반으로 보태주신 돈으로 입학금을 냈다. ‘1학기만 다니겠습니다’라고 부모님께 약속했다. 그 당시에 나는 25살이었다. 그 이후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신 나의 대학 생활은 여유가 없었다. 졸업 후 2년까지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지만 실패했다. 이후에 공기업에 취직하는 행운을 얻었다. 결혼도 하고 회사에서 승진도 했다. 내가 인쇄소에서 일하던 때와는 여건상으로는 훨씬 좋아졌다. 그에 따라 나도 변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나의 내면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내 안에 쌓여 있던 충족되지 못한 욕구의 에너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정받고 싶고, 무리에서 밀려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존 에너지였다. 속마음 털어놓기를 하면서 이런 경험이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조금씩 알아차렸다. 그중에서 내가 완벽주의로 나를 몰아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40대 초반 경주에서 근무할 때의 경험은 아쉽기만 하다. 집 문제로 나 혼자만 경주에서 살고 가족과는 떨어져 살았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나와 아내, 아이들에게는 괴로운 기억이 남아 있다. 내가 좌천당했다는 마음에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경주에서의 삶은 좌천당한 것에 대한 응징과 추가 보복당하지 않기 위한 완벽한 일 처리에 매몰되어버렸다. 새집으로 이사한 지 석 달도 안 되었는데 경주로 발령을 받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경주 사무실에 근무하던 인력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나 혼자만 근무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회사에서 지방 근무를 시킬 때는 집이나 애들 학교 전학 문제 등을 감안해서 당사자의 의견을 듣고 발령해왔다. 나는 인사 발령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회사의 일방적인 좌천 인사였다.


나는 이 사건을 소화하지 못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열등감, 무력감, 좌절감, 자존감에 불이 붙었다. 분노의 감정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비난과 험담의 말이 내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당장 응징하고 싶은 충동이 수시로 올라왔다. 화병 증상, 공황 증상, 비행기 공포부터 기차, 터널, 교량 등 온갖 공포증이 나타났다. 몸에도 불면증부터 시작해서 대장, 치아, 어깨 등에 문제가 생겼다. 그 당시에는 죽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았다. 마지막 선택을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해 나갔었다. 마지막 선택을 하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속마음을 털어놓아 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먹은 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감사할 뿐이다.


속마음 털어놓기를 통해 40대 중반 이후에는 내 마음에 숨 쉴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이전에는 몸은 늘 긴장되었고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힘이 더 많이 들었다. 물을 먹지 않으려는 소를 끌고 억지로 먹이려고 애쓰는 주인의 모습이었다. 상황에 따라 좀 더 유연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내가 정한 기준과 원칙에 맞게 빡빡하게 밀고 나갔다.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렸다. 마음에 한 뼘의 여유 공간이 없었다.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즐기지 못했다. 나는 속마음 털어놓기를 계속하면서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전 같으면 벌써 가슴이 빡빡하게 느껴지고 비난의 말을 했을 텐데, 마음속에서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라는 생각이 올라오면서 가슴은 조이지 않았다.


요즘‘내가 이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대(바람), 기준을 조금만 더 낮추었어도 힘들지 않았을 텐데…. 의무감과 죄책감 완벽함에 대한 부담감 없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오직 고통스러운 외길만 가지 않고 다른 길도 찾을 수 있었을 텐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감사하다.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알아차렸으니. 깜깜한 마음의 감옥에서 헤매다 한줄기 밝은 빛을 본 것 같다. 감옥을 벗어날 길을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이전 06화6. 고통의 대가로 알게 된 어리석음의 가리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