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 자존심, 우월감, 아집 등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부딪치고 깨지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입게 된다.
-《장자, 나를 깨우다》, 이석명, p.159-
요즘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 중에 음식을 맛깔나게 먹는 방송이 있다. ‘출연자가 어떻게 저렇게 많이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내가 저렇게 맛있게 먹고 있다는 대리만족도 경험한다. 입안에 한꺼번에 넣을 수 있는 기술과 씹을 수 있는 치아도 부럽다. 딱 거기까지만 부럽다. 한편으로 그렇게 많이 먹은 것을 배 속에서 어떻게 다 소화시키는지도 궁금했다. 시청자들은 출연자의 먹는 모습만 본다. 내보내는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겉모습만 보고 속 모습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몸속에 들어온 것은 에너지로 쓰고 남으면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잘 내보내지 못하면 탈이 난다. 잘 먹지 못하면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먹은 것을 잘 내보지 못해도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다.
어느 시인의 ‘선암사’라는 시에 ‘해우소(解憂所)’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선암사》, 1999.
시인이 선암사 절에 있는 화장실인 ‘해우소’에서 경험한 것을 시로 지었다. 볼일을 보면서 우연히 해우소 벽면에 붙은 글귀를 보고 마음의 무장해제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시인은 그동안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감정들을 쏟아내었다고 했다. 해우소를 나서면서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러자 가슴이 시원해졌다. 몸속의 소변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소변까지도 몸 밖으로 시원하게 빠져나간 듯 마음이 가뿐해졌다.”라고 했다. 무슨 글귀가 그렇게 시인의 마음을 풀어놓게 했을까?
해우소는 한국의 사찰에서 대소변을 보는 ‘뒷간’‘화장실’을 일컫는 말이다. 몸속에 있는 대소변을 밖으로 시원하게 미련 없이 버리는 곳이다. 그곳은 마음속에 있는 근심 걱정, 괴로움도 미련 없이 내려놓으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원하는 욕구와 싫어하는 욕구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욕구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 내가 정한 기준에 맞아야 한다는 기대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 그런 욕구와 기대는 채워질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다. 채우지 못한 만큼 비난하고, 험담하고, 미워하고, 혐오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쌓인다. 분노, 모욕감, 수치심, 열등감, 좌절감, 무력감의 감정이 마음속에 남는다.
시인은 해우소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직면했다. 자신이 소화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생각과 감정을 본 것이다. ‘내 마음속에 이런 것을 담고 다니느라 내가 그렇게 괴로워했나?’라고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부끄러움과, 이제는 알았다는 안도감에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아는 순간 미련 없이 남김없이 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배가 불러 불편하면 비우러 화장실에 간다. 비우고 나면 몸 전체가 편안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소화되지 않은 것은 불편해도 화장실(해우소)에 가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서도 불편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곱씹어서 더 채운다. 비우려면 먼저 내 마음속에 무엇이 쌓여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나는 40대 초반에 경주에 근무할 때 몸속을 비우지 못해 수술까지 했던 경험이 있다. 며칠 만에 화장실에 가면 비우는 것이 고통이었다. 괄약근이 찢어지는 일이 반복되어 탄력성이 없어졌다. 그 당시에 나는 지방으로 좌천당했다는 억울함과 분노로 몸속을 태우고 있었다. ‘내가 당한 것만큼 갚아 주겠다’는 복수심에 몸과 마음은 활활 타올랐다. 매 순간 온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에 젖어있었다. 몸속에 들어온 것을 제대로 소화시키고 비우는 기능이 점점 약해졌다. 결국 수술(치열)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상대방을 향해 복수의 주먹을 날리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맞았다. 나 혼자서 마음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면서 그 칼에 내가 베인 것이다. 내가 해우소를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마음의 고통을 통곡하면서 비울 수 있었을 텐데……
내 몸속에 들어온 것은 밖으로 내보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내 몸속에 들어온 것을 오래 묵히면 밖으로 내보내기가 더 힘들어진다. 마음속에 쌓인 것(기억, 생각, 감정, 감각)도 오래 묵힐수록 단단해지고 딱딱해진다. 내보내기가 점점 어렵다. 나의 선택만 남는다. 내 마음속을 매일 그때마다 비우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숙성될 때까지 묵혀두었다가 고통스럽게 비울 것인가? 노자는 《도덕경》에서 “사람의 몸은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죽으면 굳어진다. 초목도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죽으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부드럽고 유한 것은 생의 현상이요,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현상이다.”라고 했다. 내가 사는 방법은 부지런히 몸과 마음속의 노폐물을 비워내는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을 부드럽고 유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내 몸과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차리기만 해도 해우소에서의 비움은 시작된다.
내가 다치지 않고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에게 깔끔하게 복수하는 방법이 있다. 내 마음속에 ‘상대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올라오면 즉시 ‘그 생각’이 올라왔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내 마음속의 해우소’에서 미련 없이‘그 생각’을 버린다고 상상한다. 내 마음속에 ‘분노의 감정’이 올라오면 즉시 ‘그 감정이’이 올라왔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내 마음속의 해우소’에서 미련 없이 ‘그 감정’을 버린다고 상상한다. 상대에게 복수하려고 내 마음속에 독을 품고 있으면 내가 먼저 쓰러진다.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복수를 할 수 있다. 내 마음속에서 복수의 독(생각, 감정)을 버려야 복수를 할 수 있다. 내 마음속에 복수의 독을 버리고 나면 현명한 복수의 방법이 보인다.
나는 상대에게 다양한 복수의 방법을 내 마음대로 골라서 쓸 수 있다. 품격 있는 복수를 할 수 있다. 나는 상처 치유를 넘어 심리적 면역력까지 덤으로 기를 수 있다. 그렇다고 용서를 해주라는 말은 아니다. 용서는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니까. 용서는 내 마음속이 깨끗하게 비워져 내가 용서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 내가 나를 충분히 연민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돌볼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억지로 하는 ‘밀어내기식 용서’는 가짜 용서다. 내 마음속에 원한과 증오, 분노의 감정이 여전히 쌓여 있다. 이런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일시적인 속임수다. 용서보다 내 마음속의 독을 비우는 일이 먼저다. 비운만큼 세상을 보는 내 마음의 여유 공간이 넓어진다. 내 마음속이 불편하면 언제든지 비워낼 수 있는 나만의‘선암사 해우소’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