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무기력……(중략). 자신의 행동이 쓸모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 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패배나 실패를 경험했을 때 또는 통제 불능의 상황에 처했을 때 생겨난다.
-마틴 셀리그만 Martin E. P. Seligman, 《낙관성 학습》, p.137, 물푸레, 2006/2012.
최근에 아는 지인이 나보고 “이제 유튜버 한 번 해보시죠?”라고 했다. 그 지인은 내가 유튜버를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보고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했을 수도 있다. 나의 첫 반응은 ‘어이구, 내가 그걸 어떻게 해요?’였다. 마음속으로는 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안 된다’였다. 시작도 하기 전에 불가(不可)라는 딱지를 붙였다. ‘안 된다. 하지 못해, 어려울 거야, 준비도 안 됐는데.’‘자료도 없고, 장비도 없고, 어떻게 촬영해야 하는데,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이미 하고 있는데 명함도 못 내밀 텐데……,’ 머릿속에서는 안 되는 이유와 조건들이 쏟아져 올라왔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예전처럼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직도 일을 벌일 때 실패할까 봐 두려운 생각이 먼저 올라온다. 요즘은 속마음 털어놓기 연습을 하면서 그래도 조금은 느리지만 그냥 일을 벌여 보기도 한다.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하는 경험을 쌓아나가고 있다. 진작 이렇게 했더라면 하고 후회도 한다. 그 전에는 남들이 하는 것이 부러워서 나도 해보고 싶었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혜민 스님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순간, 바로 그 결과가 그 마음 안에 담겨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나는 ‘무언가를 해볼까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낸 것이다. 결과는 ‘하지 않는 것’으로 정해졌다. 내 마음속에 잠깐 일어났던 불씨는 바로 꺼져버렸다. ‘왜 이리 자신감이 없을까?’하고 자책을 했다.
나는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어떤 것이든 밀고 나가지 못했다. 자신이 없었고 방향도 몰라 불안했다. 이렇게 나는 무슨 새로운 것을 하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냥 한 번 해보고 다른 방법으로 바꾸어 나가면 될 텐데, 해보지도 않고 마음속으로 온갖 부정적인 비관적인 시나리오까지 만들어서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아이디어를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선뜻 나서지도 못하면서 내가 가진 정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대리만족감을 느끼고 싶었던 마음도 일어났다. 정작 남들이 그런 것을 시작하면 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들도 나처럼 고민하면서 ‘시작하기 힘들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다른 사람이 내가 어렵게 시작한 것과 같은 것을 한다고 할 때도 마음속이 불쾌했다. ‘내가 얼마나 어렵게 시작했는데 내가 하는 게 쉬워 보였나 아니면 탐이 났나?’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마음속으로 비아냥과 비난을 했다. 누군가가 그의 성취에 대해서 말하면 괜히 깎아내리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무기력함과 옹졸함에 짜증이 올라왔다. 내가 시작하지 못했던 일을 다른 사람이 먼저 한다면 격려하고 칭찬했어야 했다. 반대로 남의 성취를 깎아내리고 그와의 관계를 멀리했다. 나는 남들이 내가 하는 것을 따라 하면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더 완벽하게 준비하고 더 차이가 나게 밀고 나갔다. 물론 그 과정에 내가 배운 것도 있지만 치른 대가도 많다. 시간과 에너지가 지나치게 소모되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 마술 지팡이를 나만 가져야 했다. 남들도 마술 지팡이를 가지면 나는 자랑할 게 없었다. 그 무리에 당당하게 끼어들 수가 없다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나는 어린 시절에 체격이 작고 약했다.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달리기, 뛰어내리기, 싸움하기, 씨름하기 어느 것 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 동네에서 축구 시합을 할 때도 또래 애들은 참가하는데 나만 참가하지 못했다. 어른들이 공을 못 찬다고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의 기분을 똑똑하게 기억한다. 멀리서 지켜보다가 쓸쓸하게 혼자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다. 내가 초라하고 참으로 못나 보였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은 나의 무기력함과 초라함을 보여주는 날이었다. 누구도 내가 달리기에서 꼴찌 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겠지만, 그 당시 나는 주눅이 들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로부터 칭찬 들은 적은 없고 질책만 들었던 기억이 있다. 농사일을 거들 때도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깔끔하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잔소리가 이어졌다. 화가 나서 일을 하기도 싫었고 몸이 긴장돼서 실수도 더 많이 했다. 어머니가 보는 데서 일을 하면 늘 긴장부터 했다. 아버지로부터는 질책을 단 한 번도 받아본 기억이 없다. 반면에 칭찬도 받아 본 기억도 없다. 아버지께서는 마음에 있는 말을 표현을 못 하셨다. 체구가 작은 10살 아들이 땔나무를 땀을 뻘뻘 흘리며 하고 와도 ‘잘했구나’하는 말씀을 못 하셨다. 옆에 계셨던 할머니께서 아버지께 ‘칭찬도 좀 해줘라’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국립 공업고등학교 입시 신체검사 시력 측정에서 탈락했다. 공업고등학교 기능사 자격증 시험 낙방 등의 비관적·부정적 기억이 많이 있다.
이후 나는 40대 초반에 마음의 상처를 받기 전까지 비관적 믿음에 얽매었던 것 같다. 나쁜 일에도 비관적이고 좋은 일에도 ‘운이 좋았다.’는 식으로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자기 계발을 위해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늘 머뭇거렸다. 한쪽 발은 나가려고 하고 다른 한쪽 발은 발목이 잡혀 나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비난과 질책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좌절하고 주눅 들었던 기억, 시험 실패의 기억 등이 발목을 붙잡고 있는 말뚝이었다. 인도나 태국 등에서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으로 새끼 코끼리의 한쪽 발을 밧줄로 묶어 말뚝에 묶어둔다고 한다.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마다 안 된다는 좌절감을 맛본다. 반복될수록 체념과 무기력이 학습된다. 이제 다 자란 코끼리는 말뚝을 뽑고 달아날 힘이 충분히 있다. 그런데도 코끼리는 시도하지 않는다. 이미 안 된다는 믿음이 행동을 묶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속마음 털어놓기를 하면서 알아차렸다. ‘나는 할 수 없을 거야’‘나는 소질이 없어’‘내가 잘하는 게 없다’‘나는 주류에 끼지 못해’‘자신감이 없다.’는 속삭임의 뿌리를 알아차렸다. 속마음 털어놓기를 하면, 불행한 사건에 대해 전체적인 맥락을 알아차릴 수 있다.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런 생각의 뿌리인 믿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믿음, 학습과 조건화가 나의 과거 어떤 경험이 쌓이면서 만들어졌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그 기억 속에 숨어있던 두려움, 좌절감, 고통, 슬픔의 감정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놓아줄 수 있다. 속마음 털어놓기는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과 감정이 계속 영향을 주고받는 갇힌 회로를 끊을 수 있다.
나는 속마음 털어놓기를 매일 하면서 아직도 성장 중이다. 선뜻 일을 벌이지 못하지만 한 가지씩 행동으로 옮겨보고 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안 된다는 비관적인 목소리가 올라오면 다정하게 받아들인다. ‘그럴 수 있다.’라고 인정해준다. 어린 시절 질책과 잔소리로 움츠러들었던 내 안에 있는 아이를 부드럽게 꼭 안아준다. 등을 토닥여 준다.‘괜찮아’, ‘하나씩 하면 돼’, 누가 뭐라고 비난하고 잔소리할 사람 없다.’라고 말하면서. 아이의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 에너지도 억누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결정하기가 여전히 힘들지만, 그냥 저절로 내지르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내가 속마음 털어놓는 연습을 한 이후에 변화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