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오늘도 자만(自慢)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by 치유 컴패니언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국경이 없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중략).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 이렇게 여행은 시야를 활짝 열어준다.

-칼 세이건 Carl Edward Sagan의 《코스모스 COSMOS》, p.632-


“여보! 천천히~ 천천히 드세요!”밥을 다 먹고 내 옆에 앉아있던 아내가 밥을 먹고 있던 나에게 한 말이다. 순간 나는 기분이 확 나빠졌다. “나를 평가하지 말아요!”“‘천천히 먹으라는 말 대신에 맛있게 먹어요.’라고 해줘요!”내가 아내에게 한 말이다. 아내는 일어서서 부엌으로 가버렸다. 같이 밥을 먹고 있던 애들도 슬슬 눈치 보면서 일어나서 거실로 갔다. 나 혼자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내 머릿속이 갑자기 띵해지는 느낌이었다. 한꺼번에 밀려 올라오는 지껄임으로 병목현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는 내가 지금 화가 나는 이유가 수백 가지도 넘는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밖에 말을 못 할까?” “꼭 내가 듣기 싫다는 말을 골라서 할까?”“내가 큰 걸 요구한 것도 아니잖아?”


화(火)의 감정이 내 가슴과 어깨, 목, 머리까지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심호흡을 표 나지 않게 두세 번 했다. 식판을 들고 싱크대로 갔다. 요즘 우리 집에서는 ‘코로나 19’ 예방을 위해 식판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설거지를 하려고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평소에 설거지는 내가 해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나보고 부엌에서 나가라고 했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들렸다. ‘오늘 저녁 설거지는 정리해야 될 게 많아서 자기가 해야 된다.’는 말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머쓱하다는 느낌도 올라왔다. 내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느낌이었다. 걸어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돌부리에 넘어진 꼴이었다. ‘내가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밥 잘 먹고 있는데 나보고‘천천히 먹어’라는 말을 누가 했나?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서 세게 던지고 싶다는 충동이 올라옴을 알아차렸다. 고무장갑을 그냥 툭 던지고 부엌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달그랑거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더 크게 들렸다. 아내는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오지 않았다. 식탁 의자에 앉아있었다. 집안에 적막이 흘렀다. 내 눈은 TV를 보고 있었지만 마음의 무대에는 방문객이 넘쳐났다. 나도 ‘말하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음의 문이 닫히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 마음의 무대에는 ‘이렇게 조금의 이해도 배려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라고 속삭이는 잔소리꾼들이 득실거렸다. 폭주하는 내 마음속 생각 기관차를 멈출 브레이크가 크게 흔들거렸다.


생각-기억- 감정 회로에 연결되기 직전이었다.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들숨과 날숨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코를 스치는 공기의 흐름과 복부의 움직임에 주의를 가져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지금 내 마음의 무대에 올라오는 생각, 감정, 몸의 감각 느낌을 알아차렸다. 피하지 않았다. 무엇이 올라오든 알아차리고 바라보기로 했다. ‘내 기분을 조금도 몰라주는 아내가 밉다.’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전히 가슴은 먹먹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내 마음의 무대에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 위해 휴대폰을 볼까?’라는 충동이 올라왔다. 이런 충동도 알아차리고 바라보았다. 내 마음속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저 바라보고 받아들였다.


9시쯤 아내는 잠자러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소파에 앉아 내 마음속에 올라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명색이 말하는 법을 코치하고 상처 치유도 돕는 전문가이고 심리학자인데……’라는 자책감이 올라왔다. ‘내 문제도 처리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해보라고 권유할 수 있을까?’ ‘위선이고 사기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이런 감정과 생각이 내 마음의 무대에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중히 받아들였다. 나는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코와 복부의 들숨과 날숨 흔적을 알아차리고 바라보았다. 이제 들끓던 생각과 감정의 파도가 잔잔한 물결로 바뀌었다. 가슴도 조금 편안해졌다. 나는 나에게 버럭 화난 감정을 느끼게 했던 방아쇠(trigger)가 궁금해졌다. ‘천천히~ 천천히 먹어요.’라는 아내의 말이.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면서 심상으로 우선 아내와 나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다. 처음 만났던 기억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었다. 결혼식 신부의 모습, 신혼여행, 시댁 처음 가던 장면, 시부모와 있었던 장면, 신혼 시절, 이사 간 집, 가족여행, 40대 초반에 내가 많이 아팠을 때, 살면서 말다툼했던 기억을 한 장면 한 장면 바라보았다. 얼굴 모습, 옷차림, 말투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기억 장면을 너무 가까이도 아니고 너무 멀지도 않은 마음의 거리에서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음의 무대에 기억과 같이 올라오는 감정, 생각, 몸의 감각 느낌을 하나씩 알아차렸다. 알아차린 것을 있는 그대로 마음속에서 말(言)로 분명하게 읊었다. 배도 당겼다가 어깨도 묵직했다가 호흡이 가빠지기도 했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냥 기억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아내를 위한 연민과 사랑의 문구를 마음속으로 읊었다. “내가(아내가) 원한, 억울함, 무시당함, 모욕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내가(아내가) 건강하기를,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평안하기를, 즐겁고 행복하기를, 순수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2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이제 화난 감정의 에너지는 사라졌다. ‘내가 왜 그런 반응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나는 아내로부터 ‘천천히 먹으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당신은 지금 불안해하면서 허겁지겁 먹고 있어요.’라고 지적받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속에서‘나는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싶은 욕구가 묻어있었다. 그리고‘당신이 나를 함부로 그런 말로 망신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도 묻어있었다.


나는 아내와 부딪힌 순간 자동적 반응을 했던 것이다. ‘나를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해?’‘내 자존심이 상했어!’‘그래서 화도 나고 짜증도 나!’라는 동물의 전형적인 생존 반응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보이는 자동적 반응인 투쟁-도피 반응이다. 이 반응에는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우선 생존이 급하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아내가 한 말이 나의 생존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천천히 먹으세요.’라는 말이 나를 위험에 빠지게 했었나? ‘수행을 해왔던 사람이 이런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동물적 반응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올라와 부끄러웠다. 아내에게 ‘아, 그래요.’‘지금 내가 그렇게 허겁지겁 급하게 먹는 모습으로 보이나 봐요?’라고 한 박자 쉬어도 되었을 텐데.


다음 날 아침을 먹었다. 나도 아내도 별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퉁명스럽지는 않다. 그저 서로를 배려하고 조심(操心)하는 신호를 주고받았다. 점심을 먹고 주변 공원을 같이 산책했다. 원수(怨讐) 지는 사이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기대가 한없이 크기 때문이다. 서운함이 늘 따라다닌다. 가까운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 받는다.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럴 줄 몰랐다는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각자 속마음 털어놓기로 기대, 욕구, 바람을 직면해야 한다. 그런 기대, 바람,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따라오는 친구들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감정과 생각, 내 몸의 감각 느낌을. 가까운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원하고, 배려받고 존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내의 말에 반응했던 투쟁-도피 행동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신호였다. 알량한 자존심이 내 몸과 마음속에 웅크리고 숨어있었다. 내 마음속에 풀지 못하고 남아있는 집착과 혐오의 조각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그런 조각들이 느닷없이 얼굴을 내밀 때 나는 당황스럽고 불쾌하고 불편하다. 내가 한순간 흔들릴 수도 있다.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남겨진 조각을 뽑아낼 수 있을지 결정된다. 이제 어떤 것이 나를 자극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라는 나의 자만(自慢)을 알아차려야 한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나도 상대방도 상황도 매 순간 변화한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뻔뻔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 자신을 신뢰하고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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