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신적 삶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심한 열등감과 함께 시작된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알프 레드 아들러, 《인간의 이해》, p.93 -
6살 손자의 양쪽 귀를 잡고 위로 올리면서 “목이 쭉 빠지면 키가 좀 더 커질 텐데…”. 나의 할머니께서 어린 손자를 앞에 두고 혼자서 자주 하신 말이다. 손자가 동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키도 작아 걱정되셨던 거다. 현재 내 키는 173cm, 몸은 66kg으로 보통은 된다. 이런 신체 조건은 고등학교 2~3학년 때 2년 만에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키가 작아서 중학교 때까지 출석번호가 앞에서 4번을 넘지 않았다. 책가방이 땅에 닿는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거의 매일 밤 날아다니다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키가 크는 꿈이라고 했다. 이제 겉모습은 보통 수준이 되었다. 뭐가 문제가 있겠는가?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배짱을 가져보지 못했다. 늘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었다. 40대 초반에 죽을 만큼 아픈 경험을 겪을 때까지.
어렸을 적에 동네 아이들과 달리기 시합을 많이 했다. 힘이 좋은 아이가 먼저 달려 나가면 모두 따라 뛰었다. 나도 따라 뛰었지만 늘 꼴찌였다. 악을 쓰고 달렸다. 자갈길 신작로를 달리다가 자주 넘어졌다. 내가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나는데도 자기들끼리 달려가는 아이들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를 했다. 4~5명이 달리면 4등 아니면 5등이었다. 4등으로 공책 한 권 받아 들면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공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혼자 좋아하면서도 구경 오신 어른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달리기를 못 하는 아이네’라고 나를 보고 수군거린다고 생각했다. 창피하기도 하고 주눅이 들었다. 나도 3등 안에 들 수 있었으면 우쭐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초등학교 입학식을 하고 집으로 오는 중에 내 자존심이 구겨진 일이 있었다. 우리 집은 시골의 면 소재지에 있어 학교와 가까웠다. 개천만 건너서 논둑으로 따라오면 집이 보인다.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와 둘이서 개천을 건너서 논두렁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기억나는 것은 그 친구가 내 허리띠를 가지고 달아나고 나는 악을 쓰면서 따라가던 모습이다. 내가 악을 쓰면 쓸수록 친구는 더 재미있어하면서 달아났다. 힘으로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체념에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내가 고함을 얼마나 질렀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그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없다. 운동도 잘하고 호탕하고 좋은 친구였다. 지금 그 친구가 있다면, ‘그때 내가 그랬노라고 하면서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텐데’하는 아쉬운 생각이 올라온다.
예전에 시골에서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오면 집안일을 거들었다. 소를 몰고 풀을 먹이러 다녔다. 동네에 가장 큰 형이 소몰이 대장이 되었다. 동생들을 지시하면서 무사히 해가 질 무렵에 집으로 소를 몰고 돌아오는 것이 큰 역할이었다. 소몰이 대장 형은 매일 놀이를 하나씩 만들어 시합을 시키곤 했다. 그중에는 내가 제일 하기 싫고 자존심 상하는 놀이가 있었다. 닭싸움, 저수지에서 헤엄치기, 서로 마주 보고 주먹으로 싸우기 같은 놀이다. 힘이 약한 나는 ‘오늘은 또 무슨 놀이하지? 또 그런 놀이를 하라고 하면 어쩌지?’하면서 늘 긴장하고 불안했다. 끝나고 집에 오면 또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나는 약하다, 힘이 없다’는 메시지가 내 마음속에 쌓여가고 있었다.
시골에서는 겨울에 동네 앞 논바닥에서 동네 사람들이 편을 갈라 축구를 하곤 했다. 어른들부터 내 또래 애들까지 선수로 뛰었다. 나는 거기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했다. 골을 넣고 고함치면서 자신만만해 보이는 또래들이 부러웠다. 축구 경기중에 또래들이 어른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나는 무대 밖에서 부러워만 했다. 저기에 끼일 수 없다는 사실에 풀이 죽었다. ‘이럴 때 누나나 형이 있었으면’하고 바랐다. 내가 의지할 수 있고, 보호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나는 공부, 운동 등 어느 것도 잘하는 게 없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했다. 누구에게도 나의 이런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있었던 경험이다. 내가 학급 반장을 했다. 나는 반장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나는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나는 힘도 약하고 자신도 없었다. 반 친구들이 나를 반장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반장을 시키셨다. 나의 어떤 면을 보시고 반장을 시켰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용기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반장을 했다. 교실 맨 앞 책상에 앉아있는 조그만 아이가 반장이었다. 자율학습 시간에 ‘조용히 하자~’는 내 말에 나보다 덩치가 큰 여학생들이 종종 놀렸다.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학습 분위기를 조용히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감이 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보이지 않았다. 무력감이 올라왔다. 그냥 체념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신체 조건이 남들보다 좋지 않아 경험한 감정은 바로 열등감이었다. 열등감이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감정이다. 누구나 신체적‧심리적‧사회 환경적으로 상대적인 부족감과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등감은 늘 긴장을 일으킨다.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인 알프레드 아들러 Alfred Adler는 열등감을 어떤 방향으로 활용하는가에 따라 개인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보았다. 즉 과거의 열등감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이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상받아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부추기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중학교 이후 40대 초반까지 열등감의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에 빠져있었다. 공부를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머뭇거렸다. 자신감이 없었다. ‘나는 잘할 수 없다. 나는 못 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두렵다’는 마음속의 지껄임에 굴복했다. 남의 눈치를 많이 살폈다. 그것도 은근히 살폈다. 한편으로 과시하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연민의 웃음이 나오는 기억이 있다. 공업고등학교 다닐 때다. 시골에서 같은 도시로 유학(?) 온 애들은 3명이었다. 나는 공업고등학교에 다녔고, 친구 2명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다. 2학년 때부터 내가 초라해지고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두 친구는 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실습장에서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파란 청색 재킷 작업복을 입고 불꽃이 튀는 용접도 하고 기름 냄새를 맡으며 실습을 했다. 나는 집(이모집)에서 학교까지 대부분 걸어서 다녔다. 1시간 거리였다. 지나치는 사람들과 특히 여고생들에게 당당하게 보이고 싶었다. 내가 모범생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공업고등학교이지만 내가 어려운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모자는 각을 잡고 쓰고 다녔다. 교복은 늘 깔끔하게 입었다. 걸을 때는 앞으로 똑바로 보고 사관생도처럼 걸었다. 들고 다니는 책가방에는 1m 정도 되는 기다란 자를 밖으로 나오도록 넣고 다녔다. 이렇게 해서 내 자존감을 지키고 싶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혼자서 마음속에서 지껄이는 속삭임에 끌려다녔다. 나도 모르게 남을 의식하고 긴장하고 허장성세를 하는 꼴이었다.
내가 한 발씩 내딛는 모든 삶의 과정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을 당차게 마주할 자신감이 없었다. 한번 결정을 내리는데 망설이고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습관이 되었다. 상황을 먼저 마주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서야 움직였다. 겉모습은 소극적이었다. 속에서는 열등감을 보상하고 싶다는 욕구는 쌓여만 갔다. 나의 행동과 속마음은 어긋날 때가 더 많았다. 억지로 주어진 일을 해내기 위해 에너지는 두세 배 이상 들었다. 열등감 콤플렉스에 갇혀 있음을 알지 못했다. 죽을 만큼 힘든 괴로움을 겪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작업을 하면서 알아차렸다. 내가 어릴 때 경험한 열등감이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