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세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타고난 운명이나 운수’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이 아침을 시작하는 일 중 하나가 신문 속, 오늘의 운세 확인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운세를 보며 그날 하루의 운을 미리 예측해 보는 것인데 주로 태어난 해의 띠를 기준으로 운세를 본다. 즉 내 오늘의 운세는 내가 태어난 해에 달려있는 것이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운세를 믿지 않았다. 한 해에 태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들의 하루 운세가 다 똑같다는 것은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이런 굳은 마음으로 나는 단 한 번도 점이나 운세를 본 적이 없다. 물론 직접 운을 점쳐보지 않아도 운세란 늘 알게 되기 마련이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께서는 늘 본인의 운세보다 자식들의 운세를 더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운세가 매우 좋단다. 닭띠에 가을에 태어났기 때문에 먹을 복과 재물운도 있고 좋은 직업에 특히 배우자를 잘 만난다고 했다. 어릴 적에야 엄마가 알려준 내 운세의 대부분이 결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마흔 줄이 넘어선 지금은 사실 많은 것이 결정되어 있다. 취업은 물론 이미 결혼도 했고 특별한 반전이 없다면 가질 수 있는 재물 수준도 대충은 정해진 것 같다.
엄마가 말한 ‘대박’ 수준은 아니지만 나는 적당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엄마가 늘 주장한 내 운세만큼 살아내지는 못한 건 확실하다. 이렇게 인생의 절반쯤 살아본 결과 내 인생은 ‘운세란 믿을 수 없는 것이다’라는 믿음에 대한 강력한 증거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운세를 조금이나마 믿는다.
확실한 증거도 나온 마당에 왜 생각이 바뀌었냐고 묻는다면 이것 역시 내가 살아온 시간에 기반한다. IMF 직후 취업시장에 나온 95학번들의 취업이나 황금돼지 띠라고 출산율이 급등했을 때어 난 아이들의 입시가 다른 해에 태어난 사람들의 그것보다 어렵다는 건 이제 증명된 사실이다. 우리 아빠처럼 6.25 전쟁이 있던 해에 태어난 50년생들의 어린 시절이 힘들다는 것 역시 당연하다. 아빠 말에 따르면 아빠가 어릴 적에는 같은 반에 아빠 없는 애들이 많았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화로운 시대라고 생각했는데 단숨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사람들은 특정 연령이 다른 연령보다 현격히 적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젊은 남성 비율이 매우 낮아지고 있다는 뉴스는 더더욱 확실한 증거이다.
어릴 적에는 이 세상이 개별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같은 해에 태어난 많은 사람이 공통의 운세를 가진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이가 든 지금 이 세상은 엮이고 엮인 하나의 커다란 실타래처럼 느껴진다. 코로나 시기를 경험하며 더 크게 느꼈지만 한 국가는 물론 이 지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혼자만 잘 살 수 없다. 심지어 바다 건너 저 멀리 다른 나라의 대통령이 누가 당선되었는지 조차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기후변화만 해도 그렇다. 오늘 내 행동이 스페인의 홍수나 중국이 가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혼자만 잘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우리는 그야말로 ‘운명 공동체’인 것이다. 어찌 보면 운세에 대한 내 생각 변화는 나이를 먹어가며 운명에 대한 믿음 강화, 순응으로 볼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과정 중 하나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혼자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살던 독고다이 시절에는 알 수 없던 같은 해에 태어난 이들과 운명을 ‘함께’ 같이 한다는 것의 의미를 나이가 먹어가며 배워가고 있다. 나와 함께 마흔 고개를 넘고 있는 이 세상 81년생 닭띠들의 오늘이 행복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