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복코, 서양코

단편소설

by 글쓰는 앳지


니코복코, 서양코

1991년 8월, 삼복더위는 맴맴 울어대는 매미 소리마저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끈적이는 공기 속에서 나른한 오후를 견디고 있을 때면, 장난스레 날 놀리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니코복코, 우리 소띠 서양코, 학교 다녀오냐?"


그 말끝엔 언제나 장난기 어린 웃음이 묻어 있었다. 나는 코에 힘을 주고 다니거나 빨래집게로 코를 세우곤 했지만, 할머니의 놀림은 끝이 없었다. 그때는 서운하기만 했던 그 말들이, 훗날 엄마를 통해 듣게 된 할머니의 지난 세월과 맞물리며 깊은 애정의 표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광주리 속 새참과 개울가의 조약돌


김금복, 할머니의 본명.

11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유년 시절부터 가족을 위해 손을 쉬지 않고 살아야 했다. 농번기에는 광주리에 손수 만든 새참을 한가득 담아 나르느라 종종걸음을 쳤고,

집안일을 하다가도 젖먹이 동생을 둘러업고 빨래터로 향하곤 했다.


개울가에서 산더미 같은 빨래를 하던 어느 날,

동네 방앗간집의 훤칠한 청년이 할머니를 발견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개울물처럼 맑고 고운 얼굴을 한 소녀에게 눈길이 갔던 걸까.

그는 자그마한 조약돌을 몰래 던져 장난을 걸며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할머니는 귀까지 붉어져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도 그는 계속 찾아와 조약돌을 던지거나, 강아지풀로 팔과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장난을 쳤다.


그 청년은 마을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여름이면 포도밭 원두막에 앉아 한자로 빼곡한 고서를 읽었고, 마을 어르신들의 부탁을 받아 갓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박학다식을 칭찬했고, 그는 마을의 자랑이었다.


그런 그가 어여쁜 소녀 금복에게 유독 관심을 보였다.

밤늦게 몰래 찾아와 인절미 떡이 시었다며 툭 던지고 가버리기도 했고, 방앗간 뒤편에서 ‘너희 집 소보다 네 눈이 더 크다’며 놀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소녀는 내심 설렜을 것이다.


방앗간에서 시작된 숙명


이듬해 겨울, 대학생 청년은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 한밤중, 금복은 그를 만나러 나갔다.


빈 방앗간. 찬바람이 스미던 그곳에서, 두 사람은 숙명 같은 첫날밤을 맞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복은 첫째 딸을 임신하게 되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읍내까지 들썩였고, 이웃 마을까지 뒤집어놓을 만큼 큰일이 되었다.


방앗간 집 부모는 쉽게 승낙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신한 금복이의 불러오는 배를 보며 고민하던 중, 점쟁이 할머니가 던진 한마디에 마음을 돌렸다.


"금복이는 이름 그대로 복덩이여."


그렇게 할머니는 방앗간집 며느리가 되었다.


전쟁, 그리고 상처


결혼 후, 연달아 쌍둥이 아들까지 낳으며 삶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며 평화는 깨졌다.


할아버지는 입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으나, 자진해서 육군 장교로 복무를 시작했다.

1.4 후퇴 때 남하하며 전차 지뢰를 밟았고, 왼쪽 다리와 팔을 잃었다.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할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전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절망은 깊어졌고, 결국 도박과 사기로 남은 재산마저 잃었다. 알코올에 의지하던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졸지에 젊은 과부가 되었다.


그 와중에 시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농약을 마셨고, 시어머니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남겨진 네 남매를 홀로 키워야 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억척스레 살아냈다. 방앗간 일을 도와주던 일꾼을 내보내고 직접 방아를 찧었으며, 새벽부터 밤까지 손을 쉬지 않았다. 그렇게 힘겹게 버텨낸 세월이 쌓여, 할머니의 자식들은 할아버지를 닮은 명석한 두뇌로 판사ㆍ검사 형제를 동시에 배출한 동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장난 같은 위로, 그리고 마지막 인사


앞만 보며 악착같은 삶을 살아낸 할머니의 애정 표현은 늘 서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를 놀리는데 재미를 붙였다.


"니코복코, 서양코!"


나는 코를 만지며 투덜거렸지만, 할머니는 한결같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군에 간 손주를 보기 위해 떡을 이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정류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갑작스레 쓰러지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천국으로 가는 급행버스를 타고 떠나셨다.


가장 맛있던 돼지바


여름이면,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목에서 항상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돼지바 하나만 사줘!"


나는 할머니의 팔에 매달리며 졸랐다.


"말코 소영, 니코복코, 서양코. 이눔아, 이쁘다 이뻐!"


할머니는 그렇게 놀리면서도 결국 돼지바를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돼지바를 그때 먹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떠난 후, 다시는 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슈퍼를 가도 똑같은 돼지바는 있겠지만, 친할머니도 아닌 동네 할머니의 품속에서 먹었던 돼지바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남겨진 것들


할머니가 떠난 지 오래지만, 여름이 되면 여전히 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학원 가방을 짊어진 8살의 나, 그리고 나를 기다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내던 할머니.


할머니의 손길, 향기, 웃음소리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리움은 때때로 장난처럼 내 마음을 건드린다.


"니코복코, 우리 서양코."


그 말이, 그 애정 어린 장난이 여전히 내 가슴을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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