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무들은 내년에도 여전히 그 나무들이어서

겨울에 올리는 가을산에 대한 단상

by 한가지

(24년도 11월, 가을 북악산을 보면서 썼던 글입니다.)


오늘은 꽤 시끄러운 장소에서 글을 쓰고 있다. ​고층에 위치한 이 카페는 아는 직원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는 사내 카페다. 층고가 적당히 높고, 사방이 통창으로 되어있어 주변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들어온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끌고 사람도 끄는 지점은 뾰족하게 솟아있는 북악산이다. 그 북악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가 가장 인기가 많다. 가을에서 겨울로 지나는 지점, 북악산의 나무들은 짙은 녹색을 띠고 중간중간 붉은빛의 나무들도 보인다. 누가 성격이 급한 건지 늦장을 부리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시선을 잠시 옮겨오면, 옹기종기 다양한 빛을 띠는 북악산을 배경으로 회사원 무리가 역시나 옹기종기 왼쪽에 한 곳, 오른쪽에 한 곳 모여있다. 희끗희끗한 머리의 50대 중년 남자가 이런저런 손짓을 하며 대화를 이끌고, 뿔테 안경을 쓴 중년 여자는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조금씩 눈길을 준다. 30대로 보이는 젊은 직원은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의 오른쪽 테이블에서는 행사준비를 하는지 직원들이 영어로 된 이름표들을 정리하고 있다. 왼쪽 구석에는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가죽잠바를 입은 핑크색 머리의 젊은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다. 아마도 나처럼 직원을 신분증 삼아 이곳에 잠입한 이방인인 듯싶다. 나는 거북이 등딱지만 한 가방을 메고 빨간색 니트집업과 흑청바지를 입은 채 혼자 수상하게 노트북을 하고 있다. 나도 그 사람만큼이나 이 배경에서 혼자 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저 여자처럼 고개를 푹 숙이게 된다.

한 무리의 회사원들이 빠져나가고, 다시 우뚝 솟아있는 북악산을 본다.'어느 쪽은 붉은색, 어느 쪽은 녹색. 누가 성격이 급한 건지, 늦장을 부리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문장을 쓰면서 어떤 사람이 인생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사는 것인지, 어떤 사람은 늦장을 부리며 느긋하게 사는 것인지 그 속도의 기준점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붉은색을 기준으로 하면 녹색은 언제 겨울이 올지 모르는데 한가로이 선선한 가을바람이나 즐기고 있는 답답한 녀석이다. '저러다가 갑자기 찬 바람이 들이닥치면 어떻게 하려고.' 녹색을 기준으로 하면 붉은색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올해의 청명한 가을 하늘을 즐기지도 못하고 앞일만 생각하는 성급한 녀석이다. '저러다가 한번 실수하지.' 반대로 이럴 수도 있다. 붉은 나무는 '나도 이 가을날씨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좀 즐겨야 하나?' 라며 불안해할 수도, 녹색 나무는 '나도 빨리 겨울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라며 초조할 수도 있다.

나의 주변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나 자신을 평가하는 게 얼마나 쉽고 익숙한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것 없이 나만 생각해도 그렇다. 심리검사에는 TCI라는 기질 및 성격 검사가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격 요소들을 측정하는 검사다. 그중 '사회적 민감성'이라는 기질이 있는데 그 기질의 점수가 높은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에서 타인의 표정과 선호 같은 사회적 신호들을 민감하게 캐치한다. 네가 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내 옆 사람은 편안한지 언짢은지, 내 앞에 사람이 이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지 없는지 그 여러 가지 신호들이 아주 자동적으로 처리된다. 나는 그 검사에서 백분율 99%가 나왔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민감성이 상위 1%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 검사를 해석해 준 선생님의 표정과 말이 아직도 떠오른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참 피곤하겠어요."라고 했다. 뭐, 나는 그 반응이 위로가 되었다. 모르면 편하기라도 하지,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해주지 않기란 참 곤욕스럽다.


한편으로는 내가 무엇을 말했을 때 상대방의 표정이 탐탁지 않으면 내가 뭔가 실수한 것 같다. (그 사람은 그저 골똘히 생각할 뿐일 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면 내가 말을 설득력 있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내 말의 일부만 듣고 다른 상상에 빠졌을 수도.) 내가 노래를 할 때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잘한다고 하면 그게 나의 천부적인 재능인 줄 안다.(그럴 수도, 아닐 수도.) '너는 말을 참 잘 들어주는 것 같아'라는 피드백을 여러 번 받으면 심리상담가라는 내 일이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한다.(놀랍게도 상담은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사람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나는 어떤 말은 삼키게 되고, 어떤 모습은 숨기게 되고, 상대방이 좋아하고 손뼉 치는 모습만 남기려 애써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평가를 받으면 마음은 좋아서 방방 뛰고 머리는 그런 마음을 진정하려 애쓴다. 그런 평가가 나의 어떤 부분을 성장시킬 수도 있지만, 나의 어떤 부분은 누르고 억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자. 어쩌다 보니 친구에게 며칠 전부터 글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글을 보고 싶다고 해서 조금 주저하다가 보여줬는데 묘사가 잘 되어 있고 톤이 일정하며 표현이 풍부하고 전반적으로 잘 쓴 글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어제보다 더 많이 고치며 쓰고 있다. 그리고 고치지 않고 더 편하게 쓰려고 애쓰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때 이런 식이다.

예전에 나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을 많이 신경 쓰는 거야? 좀 더 편하게 살 수는 없어?'라고 나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잘하지 않는다. 벌이 꽃의 꿀을 찾게 되는 것처럼 나를 외부로 향하게 하는 어떤 시스템이 좀 더 민감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꿀을 필요 이상으로 배불리 먹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다가, 의식하지 않고 다시 나대로 존재해 보는 이 프로세스를 그냥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평가' 자체가 원인은 아니다. 평가라는 것은 어떨 때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만 솔직한 감상이 되기도 한다. 모두 같이 살아가는데 서로가 서로의 감상이 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자신의 잣대로 상대방을 고치려고 하거나 과한 칭찬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만 아니라면, 감상은 감상일 뿐이라고 인정하면 된다. 옳거나 틀린 것은 없다. 그러니 나의 글도 옳거나 틀린 것은 없다. 나는 누군가를 찌푸리게 할 수도, 기쁘게 할 수도, 슬프게 할 수도, 신경을 거슬리게 할 수도, 웃게 할 수도, 즐겁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함께 살아가기에 나타나는 감상과 반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누군가는 아직도 녹색을 유지하고 있는 나무를 보며 뜨거웠던 지난여름을 돌아보고, 누군가는 벌써 단풍이 든 붉은 나무를 보며 가을을 환영한다. 이 나무들은 내년에도 여전히 그 나무들이어서 군데군데 자신의 색으로 산을 물들일 것이다. 그 나무만의 정해진 속도로. 내년에도 이 북악산을 볼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그냥 지금은 '아, 시간이 흘러가고 있구나' 라며 바라보고 감상할 뿐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