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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우즈 제로

by 잡귀채신

본격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영화 <크로우즈 제로> (2008)


여러분은 관심 없으시겠지만 나는 등록금 비싸게 내고 '영화'를 전공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처음에는 화색을 하고 '아~ 영어 잘하시는구나!'라고 하시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극장 가서 보는 영화라고 얘기하면 반색을 하고 티 안 내는 척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그냥 건강에도 좋은 체육 같은걸 전공으로 하고 영화는 동아리 활동으로 할걸-하고. 그렇게 치면 그냥 대학을 가지 말걸-하고. 그렇게 치면 또 의무교육도 받지 말걸. (응 여기까지)

그런 소심한 생각을 하는건, 학부생일 때 누군가가 '넌 무슨 영화 좋아하냐?'라고 물어왔을 때, 내가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나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 같은 작품 이야기를 하질 못했고, 바로 이 작품, <크로우즈 제로>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분노조절기를 끄고 <크로우즈 제로>가 왜 어때서? 하실 텐데, 반갑다. 악수하자.

일본, 야쿠자 2세가 노는 동네, 스즈란 고교에서 벌어지는 패싸움 이야기. 누가 누구보다 쎄고 또 걔는 쟤보다 더 쎈지 아닌지 그게 그냥 제일 중요한 영화.


이것이 바로 <크로우즈 제로>의 줄거리닷!

간단, 명료 그 잡채!

그리고 줄거리에는 결코 쓸 수 없는 이 영화만의 핵 중의 핵이 있는데, 바로 '간지'다.

나는 바로 그 부분, 절대 '줄거리'안에 포함시킬 수 없는 지점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고, 특히 그런 점을 잘 살린 작품을 좋아한다. 오구리 슌의 저 자태와 간지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냥 패싸움 영화이기만 했어도 사실 나는 좋아했겠지만,

딱 이 장면 때문에 좀 더 깊이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소주 한잔 마신 것처럼 입에서 '크' 소리가 나온다.

거친 산업현장을 배경으로 웅장하고 검은 바다가 넘실대는 와중에, 안전장치도 좀 부실해 보이는 곳에서 주머니에 손 넣고 서서 저런 대화를 하는 두 남자. 영화는 패싸움을 하는 인간들에게도 우정이 있음을 보여준다. ( 영화 <바람>도 내가 참 좋아한다) 이런 건 이렇게 후까시를 잔뜩 넣어줘도 괜찮다.


나는 옛날사람이라서 이런 진한 감성을 한 번씩 충전을 해줘야 찐하게 또 살아갈 수 있다.

덕분에 힘이 넘치는지 괜시리 껄렁하게 식탁 의자 다리를 발로 한번 차봤는데

기분이 좋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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