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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의 불꽃

by 잡귀채신

여러분은 비염이라는 병의 위악성을 알고 있는가.


나를 낳으신 어머니조차도 내가 코에 휴지를 박고 나타나면 "환좌뫄뫄놥솼눼(환자마마 납셨네.)" 하며 눈을 흘기신다. 비염은 절대 동정을 유발하지 않는다. 성가실뿐. 그러면서도 공기청정기를 정성스레 가동해 주시는데, 그 은혜는 꽃가루 시기가 지나야 갚으...려 고 시도정도는 할 수 있게 되겠지. 내 안에 콧물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효도를 담을 공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병이든 그것만 아니면 그 어떤 성취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니까 '비염'만 아니면 대박 큰일 낼 거니까 다들 조심해 아주.


문제는 일 년 365일 '비염'상태라는 거다.

3,4,5월과 8,9,10월은 특히 심하고 나머지는 그냥 좀 심한 정도다. 노력도 안 해본 건 아니다. 이비인후과대로 다 가봤고, 내과는 물론 안과까지. 실제로 계룡산에서 수련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명의 밑에서 10년을 수발들며 이런저런 희한한 병마와 싸우는 별별놈의 환자를 다 보고 오신 분께 진료도 받아봤다.


문제는 T세포라고 한다. 이 놈이 뭐 쪼마난 가루 하나만 들어와도 난리법석을 떠는 바람에 면역 과잉이 되는 거라고 한다. T세포 이 짜식을 어쩐다? 후드려 패보기도 하고, 좀 앉아봐 해서 타일러도 보고, 비싼 거래 하면서 선물도 바쳐봤지만 T세포 녀석의 주접떠는 본성만큼은 본인도 뭐 어쩌질 못해 미안해하고 있다. 얘도 알고 보니 악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가끔 죽자고 나를 괴롭히는 누군가를 보면 저 인간이 왜 저러나 미친 건가 하며 그냥 악마로 태어나서 저러는구나 하면 어찌어찌 내 마음이 달래진다. 아니 악마로 태어나신걸 내가 뭘 어찌해. 저러다가 퇴마사 한놈한테 제대로 걸리면 뼈도 못 추릴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 인간이 알고 보니 악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목격하면, 그때는 내 마음도 꼬이기 시작한다.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혼란한 세상과 오롯이 마주하게 된다.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찜찜함 속에서, 뇌가 파스스 건조되어 바람에 날리는 걸 꼼짝없이 지켜만 보게 된다.


나에게는 악마였던 어느 인간이 공원에서, 이 나라 정부도 외면한 그 퇴물 대접받던 어르신들에게 따스한 육개장 한 그릇씩을 듬뿍 퍼드리는 모습을 보았던 그때가 떠오른다. 팔에 돋은 소름을 하나씩 손톱으로 꾹꾹 누르고 있는데, 그런 나를 발견한 그 인간이 나에게도 육개장을 내밀었던 뜨듯하게 멀미 났던 기억. 그 육개장을 발로 차버렸다면, 세상이 갑자기 리버스 되어 바다에 구름이 떠있고 물고기가 하늘을 헤엄치고 나는 쌍놈의 자식이 되어있고 그 인간은 날개를 달고 천사로 칭송받겠지. 그럴까봐, 나는 잠자코 그 육개장만 밥도 없이 들이켰다.


내 T세포는 지금 내가 너무 소중해서 안달 나 있다. 따끈한 육개장을 퍼주는 그런 마음인 거다. 미안한데 그게 따끈한 게 아니라 마그마급이라서 그렇지...

그 마음을 알고 나니 코를 푸는데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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