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 주관적 리뷰이기에 자의적 해석이 듬뿍 담겨있을 수 있습니다.
<어스>는 <겟 아웃>에서 관객들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조던 필' 감독의 최신작이다. <겟 아웃>은 작년 오스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등을 휩쓴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겟 아웃>이 상영중일 당시 재밌다는 평을 많이 들었지만, 결국 보러가지는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개봉한 당일에 바로 예매를 해서 영화를 보고왔다.
조던 필 감독의 영화에는 그만의 신선함이 있다. 그리고 이 신선함은 극장가에서 '화이트 워싱'을 경계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체감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저 흑인 배우들이 주연이 되어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것뿐인데도, 다른 헐리우드 미국영화들과는 색다름을 느낄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스>역시도 백인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오는 구성으로 촬영했다면, 그저그런 B급 호러무비로 취급되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감독이 흑인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정체성을 영화내에 녹여낸 것 그 자체가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겟 아웃>은 미국이 낳고, 한국이 키웠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한국은 미국을 제외한 <겟 아웃>의해외 흥행 1위국이였다. 심지어 처음 배급사에서는 한국에서 이 영화의 흥행이 어렵다고 판단해 개봉을 주저했지만, 이 영화를 한국에서 보기위해 관객들이 직접 예고편을 제작해 SNS에 홍보했고, 이를 통해 <겟 아웃>은 폭발적인 네티즌의 반응을 얻게되어, 배급사가 이에 흥행가능성을 인지하고 개봉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역시, 영화를 사랑하는 민족..!!)
Melting Pot, '우리' 안에 갇힌 토끼
영화 초반에는 한뼘 남짓한 작은 케이지에 갇혀있는 흰토끼가 클로즈업 되어 스크린에 비쳐진다. 그리고 연이어 점차 풀샷으로 바뀌며, 흰토끼 이외에도 드문드문 흑토끼, 갈색토끼, 연한 베이지색의 토끼가 전체에 섞여 있는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미국이 '백인'들이 주류인 사회이지만, Melting Pot이라는 별칭처럼 흑인, 동양인, 히스패닉등이 뒤섞여 있는 사회라는 걸 비추는 것 같아 보였다. 백인이 주도하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내려다보면 다양한 인종들이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며 어우러져 공존하며 살아가는 사회인 것이다.
이어진 화면에서는 한 부부와 작은 소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하면 모두 백인이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아버지가 놀이공원에서 한 게임 앞에서 몰두하고 있는 가운데, 소녀는 혼자서 걸음을 옮긴다. 소녀가 걸어가면 모두 그 소녀를 무감한 눈으로 훑는다. 소녀 역시 그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지나간다. 그러다 골목에서 한 백인남성과 눈이 마주친후 소녀는 한 낡은 공포 체험관인 거울의 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그녀와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마주하고, 말을 잃게 된다.
여기서, 소녀가 공포체험관에 입장하기전 카메라가 후줄근한 백인남성을 꽤 오래 잡고, 소녀가 그곳에서 돌아온 후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것처럼 말을 잃게 되며, 아버지는 상담가에게 아이에대한 조언을 구하다 나와서, 소녀의 옷을 잠시 추스러주고 어깨를 도닥이며 지나간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린소녀에게 가해진 성적인 폭행이나 인종차별적인 Hate범죄가 있었다고 추측하며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아니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 한 가족을 이루어낸 소녀를 비출때에도, 산타크루즈 해변에는 그들 외에는 모두 백인이고, 그들 가족은 백인친구 가족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 아버지인 게이브는 백인 친구인 '조쉬'를 계속해 언급하면서 자신과 비교하고, 여주인공 애들레이드는 조쉬의 부인인 키티에게 '너는 리프팅 시술을 받지 않아도 되서 좋겠다'라는 말을 듣는다.(흑인은 피부가 좋다는 인식) 그리고 딸인 조라는 조쉬부부의 쌍둥이 딸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떨어져 앉아있는다.
또한, 차안에서 그들은 '5달러를 줄테니 마약을 달라'는 가사의 노래를 자녀와 들으며, 가사가 이상하다는 아들의 말에 리듬에 집중하면 된다며 노래를 즐긴다. 그리고 아이가 욕설을 쓰는 것은 또 엄격하게 단속하며 훈육한다. 그리고 식탁에서는 올림픽에 딸아이가 나가야된다며 입씨름을 하지만, 그 올림픽 종목은 당연하게도 '육상'이다.(육상은 흑인이 지배하는 스포츠 영역이나 다름없다) 영화 초반내내 이런 미묘한 차별적 언행, 내재화된 차별이 영화를 둘러싸고 맴돈다. 그래서 그들의 도플갱어가 등장했을 때에도, 그들이 실체가 아닌 '본체의 내면속 취약한 자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Black Self Hatred, 블랙팬서와의 대척점
인터넷에서 흑인들에게 <블랙펜서>가 큰 호응을 얻으며, '와칸다 포에버'라는 문구가 신드롬처럼 퍼져나간 것은 '와칸다'라는 외세의 침략을 받지도 않고 부강한 가상의 나라가 그들의 뿌리에 대한 갈망을 해소시켜줬기 때문이라는 글을 보았다. 즉, 미국내 동양인등은 적어도 그 뿌리가 명확하며(한국계, 중국계등) 돌아갈 나라도 어느정도 경제력을 지닌 국가인 반면, 흑인들은 오랜시간부터 미국땅에서 살아와 그 뿌리가 불명확하고 돌아갈 아프리카 대륙도 아직 그 발전이 더뎌, 그들은 그들의 뿌리에 대해 컴플렉스를 지니고 살아왔는데, <블랙펜서>가 이를 사이다처럼 해소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블랙펜서>와 <어스>는 대척점에 서있는 것 같아 보인다. 가상의 국가로 흑인들의 갈망을 충족시켜준 <블랙펜서>와 달리 <어스>는 그들이 당하고 있는 차별을 온연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들 사이에는 'Black Self Hatred'라는 자기혐오 정서가 있다고 한다. <어스>에는 은연중에 이 'Black Self Hatred' 정서를 옅볼 수 있다.
영화내에서 도플갱어들은 본체에게 내재화된 취약점을 드러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아들 제이슨은 늘상 가면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구석진 좁은 창고에서 이것을 쓰고 숨어 있는다. 그 가면은 붉은 도깨비 가면이지만, 제이슨의 도플갱어인 플루토는 흰색 마스크를 쓰고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마스크 속 진짜 얼굴은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다.
영화내에서 다른 도플갱어들과는 달리 플루토는 제이슨이 그동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마술을 그의 앞에서 성공하자, 순간 주춤하면서 빈틈을 보인다. 이것은 실패의 경험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 도플갱어(취약점)을 약하게 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플루토의 마지막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장면도, 본체인 제이슨과 대칭되게 플루토가 반대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편견에 이어지는 편견들
그러나 이 영화에서도 여러 한계점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조쉬의 부인인 키티의 복제는 본체와 싸우는 와중에 거울앞에서 립스틱을 바르고, 또한 여주인공 애들레이드를 공격하다 말고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가위로 긋는 행위를 보인다. 외모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전형적인 가벼운 백인여성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쉬는 공포가 고조되는 가운데서도 부인에게 싱겁고 가벼운 농담이나 건네는 멍청한 이미지로 그려졌다.
그리고 여주인공인 애들레이드는 결국 복제와의 싸움에서 이겨내지만 (실제 복제가 애들레이드였지만, 나는 이것을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마주하기 두려웠던 그 취약점을 극복해내는 계기는 바로 제이슨을 찾고자 하는 '모성애'였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결말부분이 아주 후련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녀가 아들없이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 도플갱어와 싸워 나가는 모습이 담겼다면, 더 결말이 속시원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마지막에 손을 마주잡아 만들어낸 인간띠에서도 백인, 흑인들만이 띠를 이루며 동양인, 히스패닉등은 비추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처럼 편견은 편견을 다룬 영화속에서 조차도, 계속해서 새롭게 재생산되고 되풀이되는 것이다.
Hands Across America, 초연결사회에서의 연대
영화에는 수미상관으로 ‘Hands Across America’ 캠페인이 등장한다. 이것은 빈곤층을 돕기 위해서 1986년 미국에서 진행된 인간 띠 만들기 캠페인이다. 영화 마지막에서 복제들이 서로 맞잡은 붉은 띠는 '겉으로의 빈곤함이 아닌, 내면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로 연대하라는 의미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9년은 국경의 경계를 넘어, 그리고 인종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이다. 영화속에서 연신 핸드폰을 손에 쥐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조라를 비추는 것도 이런 연결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극중에서 초반에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키면, 그 배로 나에게 돌아온다'라는 대사를 가장 어린아이인 제이슨이 한다.(어린이의 시선에서 나왔기에, 더 와닿는 대사였다) 즉, 결국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하며, 그 혐오들은 다시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이 현실에서 그 혐오들은 의미없는 것이며, 결국 현대사회에서는 개개인의 내면끼리의 진정한 연대가 요구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어스>, '미국'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어스>라는 작명은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우리'라는 의미와, '미국(United State)'의 약자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한국어로 번역해 제목을 달았다면, 한국사람들에게는 혼란이 왔을 것이다. 한국인에게 '우리'란 '우리 가족', '우리 엄마'처럼 쓰이는, 이미 따스함과 단단한 연대를 담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2016년에 개봉한 <우리들>이라는 영화는 아이들의 세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 영화는 어른들의 도움없이도 스스로 친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어린 아이들의 몽글몽글하고 풋풋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미스테리 반전영화인 <어스>와 아이들의 따뜻한 성장물인 <우리들>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인 영화이지만, 이 둘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따뜻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어렵고 공포스럽지만, 결국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제목의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두 영화의 분위기가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이를 극복하고 나서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점은 남녀노소, 인종, 국경을 떠닌 공통서사이자, 이를테면 클리쉐라 할 수있는 것이다. 즉, <어스>는 겉으로는 전통적인 공포 스릴러물로 포장됐지만, 그 끝에는 결론적으로 '우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 '우리에 대한 감독의 인식'을 가득하게 담아낸 영화나 다름없었다.
반전을 위한 반전, 지하세계 미스테리 강자 <IT>
<어스>는 여러모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겨둔 영화이지만, 그 결말은 다소 의아했다. 그들의 복제들은 지상의 인간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왜, 누가, 그곳에 그런 장치를 만들어두었는지 설명이 부족했다. 마지막의 반전 역시,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어스>의 관객평이 전작인 <겟 아웃>보다 좋지 않은 것은, 이런 설정의 엉성함을 관객들이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이야기의 타당성, 개연성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설정에 방점을 두지 않은 것은, 관객들에게 그 해석의 여지를 넘겨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 결말 덕에 그에 앞서 쌓아온 서사들이 가볍워졌다. 말그대로 반전을 위해서만,관객을 놀래키기 위해서만 이야기가 지금껏 달려온 느낌이엿다.
영화 서두에 지하시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버려진 도로', '폐공장'등 지하세계에 대한 미스테리한 실마리를 준다. 처음에는 몰랐다. 이 실마리가 결말로 가는 중요한 단서이자 수미상관이 되는 장치라는 것을. 그런데 결말까지 보고나니 차라리 지하세계의 미스테리한 존재들에대해 그린 작품을 본다면 차라리 <IT>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스>와 <IT>은 둘다 취약한 내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를(<어스>는 복제를, <IT>은 광대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 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게다가 둘다 시종일관 미스테리한 공포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어스>보다 <IT>이 관객들에게 비교적 더 친절한 이야기 풀이법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둘 중 한 영화를 봐야한다면 차라리 <IT>을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