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글쓰기 스타일] 01
기획서는 단순히 잘 쓴 글이 아니다. 명확하고 간결하게 전달하는 업무 도구다. 기획서 글쓰기는 기획서만의 특수한 문체를 형성하게 한다.
기획서를 쓸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다른 글이었다면 절대 쓰지 않을 문체를 자꾸 사용하게 된다. 기획서도 글쓰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일반적인 글을 쓸 때와 기획서를 쓸 때 마음가짐은 사뭇 다르다.
기획서는 협업의 도구이며 의사소통의 핵심이다. 그래서 기획서의 문체는 일반적인 글쓰기와는 다를 수 있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다. 기획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명확한 의사 전달이다. 그러기 위해선 불필요한 요소를 생략하고 간결하게 써야 한다.
기획서는 잘 쓰는 것보다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 기획서에서 자주 발견되는 몇 가지 기획서적 허용을 꺼내본다.
IT 업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내 기획서에는 의외로 한자가 많다. 학술적인 용어나 전문 용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글을 간결하게 만든다. 정보 전달에도 용이하다. 문장 길이를 줄이고 정보를 압축해 핵심을 전달하기 좋다. IT 프로덕트를 만들다보니 영어 표현도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한자와 영어가 섞인 괴상한 한영(漢英) 혼용체가 탄생한다.
과제 목표
(a) 사용자가 앱에서 새로운 주소를 설정하려는 경우 가급적 상세 POI 정보를 포함한 주소를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b) 새 주소 등록 시 상세 POI 주소 선택 넛지 UI 제공
(a)도 문제될 건 없지만 (b)가 조금 더 짧고 명확하다. '사용자', '가급적', '포함한' 등 없어도 의미 전달에 문제가 없는 표현은 제거했다. '새로운 주소'는 '새 주소'로, '~하는 경우'는 '시'로 줄였다. '주소 설정'은 등록, 변경, 삭제 등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어 '주소 등록'으로 의미를 좁혔다. '유도한다'도 '넛지(nudge) UI 제공'으로 바꿔 이 과제에서 할 작업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글을 쓸 때 마침표가 빠질 수 없지만 내 기획서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문장이 "~니다"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표 대신 단어 또는 음슴체(?)로 문장을 맺는다. 이쯤 되니 아주 조금이라도 글 길이를 줄여보려는 발악 같다. 기획서에서는 문장들을 가급적 이어 쓰지 않으려는 편집증도 있다.
문제점
(a) 주소 신설이나 폐지, 통폐합, 명칭 변경 등 여러 가지 이슈로 사용자가 앱에서 이용하고 있던 기존 주소 정보가 현재는 달라져서 유효하지 않은 주소일 수 있다. 사용자가 과거와 달라진 주소를 사용할 경우 배달이 잘못되거나 배달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b) 주소 신설, 폐지, 통폐합, 명칭 변경 등으로 사용자의 기존 주소가 현재 달라졌을 수 있음 과거와 달라진 주소를 사용할 경우, 잘못 배달되거나 배달 소요 시간이 길어질 수 있음
(a) 문장의 "있다"를 "있음"으로 바꾸면 (b) 문장이 된다. 어미를 바꾸면서 글의 전반적인 요소들도 어미에 맞춰 다듬었다(줄였다). 이어져 있는 두 문장은 줄을 나눠 리스트 형식으로 표현했다. 전달하려는 정보를 정리해 읽고 이해하는데 조금 더 수월해진 느낌이다.
일반적인 글에서는 문장부호를 많이 사용할 일이 없다. 기껏 해야 마침표(.)나 큰 따옴표("), 작은 따옴표(') 정도? 하지만 기획서에서는 이보다 더 자주 사용되는 문장부호가 있다. 블릿(∙)과 콜론(:)이다.
주소 등록 시 필수 정보
(a) 사용자가 배송지 정보를 입력할 때 기본 주소, 상세 주소, 연락처를 필수 항목으로 수집해야 한다. 기본 주소는 배달지를 명확히 지정하기 위해, 상세 주소는 아파트 동과 호수 같은 추가적인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다. 연락처는 수령자와 연락을 하기 위해 필수로 수집해야 하는 항목이다.
(b) 배송 정보 입력 시 필수 항목
- 주소: 기본 주소지 정보
- 상세 주소: 아파트 동/호수 등 추가 정보
- 연락처: 수령자 확인 및 연락용
기획서는 글쓰기를 구조화한 양식이다. 일필휘지로 명문을 쓰는 것보다 고치고 또 고쳐서 구조가 눈에 잘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줄글이나 긴 문장, 또는 문단을 만들 필요는 없다.
내용이 길어지면 블릿을 사용해 각 문장을 리스트로 나눈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면 콜론 뒤로 상세한 내용을 적는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이해가 되지만 기획서는 각 내용마다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획서를 쓸 때 자주 쓰는 문장부호가 또 하나 있다. 콤마(,)다. 원래 콤마는 한 문장 안에서 서로 다른 내용을 다룰 때 사용한다. 그리고 평소의 나라면 이 경우 차라리 두 개의 문장으로 나누는 편이다.
하지만 내 기획서에서의 콤마는 용도가 조금 다르다. 글을 읽기 쉽게 하기 위해 쓴다. 한 문장 안에서 강조해야 하거나 명확하게 표현해야 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 앞에 콤마를 둔다. 그럼으로써 읽는 이에게 쉬는 타이밍을 주고 다시 집중을 요구한다. 일반적인 글쓰기와는 콤마를 사용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문장이 아주 짧더라도 그 안에서 콤마를 배치할 수도 있다.
과제 진행 시 고려사항
(a) 서비스가 사용자의 주소 정보를 임의로 수정하지 않아야 하고 변경할 주소가 있을 경우 사용자가 이를 직접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설계가 필요함
(b) 서비스가 사용자의 주소 정보를 임의로 수정하지 않고, 변경할 주소를 사용자가 직접 확인하고 업데이트 할 수 있는 플로우 설계 필요
기획서를 통한 명확한 의사 전달은 과제의 가능성을 넓혀준다. 그래서 꾸준히 간결한 기획서 글쓰기를 추구하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이 정답은 아닐 수 있다. 중요한 건 좋은 기획서를 쓰기 위해 꾸준히 다양한 변칙을 허용하는 열린 자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