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b n Wrestle Aug 15. 2022

아끼지 마라

아낄 것은 따로 있다

가계부를 쓴 지 2년째다. 토스 앱과 개별 카드 앱을 통해 소비 내역들을 긁어모은 후, 내가 만든 시트에 기입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내 씀씀이를 소상히 기록함에도 불구하고, 저번 달에 정한 지출 계획을 그다음 달에 제대로 이행한 적이 없는 것 같다. 100%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매월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기록한다. 때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계속 쓰다 보니, 내가 돈을 어디에 써서 얼마 남겼는지를 확인하는 용도를 넘어, 나라는 사람의 캐릭터도 보이기 시작한다. 매일 편의점 지출 기록이 있다면, 그만큼 절제력이 낮은, 단짠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연약했던 이준우가 보인다. 나의 게으른 모습들이 보인다. 반대로, 교보문고에서 책을 5권 샀다는 것은(이미 집에 읽어야 할 책이 많음에도), 더 나아지고 싶다는 삶에 대한 욕구를 읽을 수 있다. 내 돈을 어디에 썼는지 체크한다는 것은, 내가 그 돈으로 무엇을 얻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다.


월 초 수중에 있는 돈에서 쓴 금액을 (-)하고 남은(=) 게 얼마인지를 숫자로 보는 것. 그래서 월말 얼마를 남겼는지(+), 혹은 더 썼는지(-)를 보는 것. 남긴 돈의 크고 작음을 확인하는 게 가계부의 대표적인 목적이다. 단순히 얼마까지만 써야 하고 얼마를 남겨야 하는지만 계획하다 보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그 달은 그 정도로만 살겠다(live)고 생활의 선을 긋는듯하다. 마치 앞으로의 한 달이 예측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꼴이다. 2년간 계속해서 가계부 대시보드를 조금씩 업데이트한 이유는 지출 내역을 깔끔하게 보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지출 내역별로 그것이 매몰성이었는지 투자성이었는지 구분하기 위함이다. 이 지출이 내게 더 많은 기회에 노출시킬 수 있는 것인지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더 큰 사회적 자본을 얻거나 미래 기회를 포착할 투자였는지 재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가계부를 쓰는 행동으로 내 일상 행동을 넘어 내 모험성도 평가할 수 있다.


가계부 작성을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지출액과 저축액이 단순 숫자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데 그 지출을 한 꺼풀 벗겨보면, 돈 쓴 진짜 이유(significance)가 보인다! 가계부를 작성하다 보면 지출 순간에 느낀 감정을 다시 곱씹어볼 수 있다. 그날 ‘이 술 값을 왜 내가 산다고 했지?’ 라며 계산대 앞에 섰다면, 작성하는 지금은 그 느낌이 다를 수 있다. ‘그때 사길 잘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 덕분에 그 일을 완수하기 수월했기 때문에’라고 느꼈다면 그 술 값으로 미래 가치를 산 것이다.


이렇게 가계부는 숫자라는 정량적인 도구를 결합해서 조금 더 의미 있는 한 달 점수를 내볼 수 있다. 오늘 지출 내역은 미래의 지출 계획에 영향을 미친다. 이번 주에만 50만 원을 쓰면 다음 주는 줄여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우리에게 의존적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나 내린 결정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미래에 있을 나의 인플루언서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생각하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최근 내가 쓰고 있는 돈의 흐름을 보면 내가 on-track으로 가고 있는지, 내 장기 계획에서 완전히 벗어났는지 알 수 있다.


절제라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세대에서 미덕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절제와 자기 통제는 이제 마케팅 키워드로 자주 쓰이고 기믹 인플루언서들의 간편한 전략으로 전락했다. 절제와 자기 통제 방법까지 남을 통해 배워야 한다면 이 세상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나중엔 내가 이룬 성공조차 나답게 자축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최대한 뺏기지 말아야 한다.


남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에 중독되어 내가 어느 부분에서 영향을 받는지, 그 미세한 도파민 센서조차 무뎌지고 있다. 남의 모습에서 어떤 모습을 닮고 싶은지, 혹은 그 사람 자체가 되고 싶은 것인지 구분하는 일조차 귀찮아졌다. 그래서 우선 사고 본다. 이런 항복적인 자세는 그만해야 한다. 가계부를 쓰다 보면 스스로 갸우뚱한 지출 내역들을 찾게 되는데, 여기서 내 과거 행동을 건설적으로 비평할 수 있다.


참을성과 통제력은 작금의 관음적인 플랙스 문화에서 인기 없는 가치다. 그래서 더욱 수호해야 한다. 참을성이란, 사고 싶은 것을 사지 않겠다는 단적인 결정을 넘어, 남이 가진 것이 나에게도 머스트-해브가 아니라는 든든한 마음 챙김(mindfulness)이다. 세상이 자꾸 나만을 위해 준비한(curated) 상품이 있다고 유혹해도,  뜨고  베어가는  도둑놈 같은 세상에서 나를 지킬  있는 것은 나뿐이다. 남이 무조건 아끼라고 아끼지 마라, 아낄 것은 나의 통제력이지,  자체가 아니다.



essay by 이준우

photo by Allef Viniciu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