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알 것
1/ 노벨 문학상
한강 작가가 한국인(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대서특필되며 들뜬 한 주였다. 2016년에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상을 받았지만 단연 노벨 문학상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한강 작가의 문장들이 온지구 독자들에게 비슷하게 높은 수준으로 감화시키고 감동시킨 결과라고 생각한다. 음악에서 그래미 어워드나 영화에서의 오스카, 혹은 아카데미에는 매년 수상작과 수상 아티스트에 대한 잡음이 존재하는데, 노벨상은 그 선정 과정부터 시작하는 절차가 꽤 길고 다층적이다.
원문이 한글로 쓰인 작품이 어떻게 외국인 심사역들의 최종 선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한 주 동안 나를 따라다닌 중요한 질문이었다. 나는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아직 없기 때문에 더욱 이유가 궁금했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이 된 이분의 글이 어떻게 세계인에게 읽혔을까. 또 최고의 평가를 받았을까.
내가 도달한 결론은, 한강 작가는 자기가 쓴 모든 텍스트를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 알고 있다는 것. 완벽하게 꿰뚫고 있다는 것. 사용한 단어들이 모두 작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는 것.
직접적인 개념뿐 아니라 파생해서 사용할 수 있는 의미까지 알고, 또 그 상황에서 의미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단어를 알고 있다면, 그 단어들은 작가의 손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말하고자 하는 핵심의 주변에서 요란하게 탭댄스를 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도한 목적지로 문장들이 달려갈 수 있다면 어떤 언어로 번역되었든 읽는 이들의 입에서는 거의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2/ 흑백요리사
맛 얘기를 하니 장안의 화제인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를 빼먹을 수 없겠지. 맛 크리에이터들이 자기가 조리한 재료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를 가지고 겨루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용된 재료와 조리한 방식을 듣고 음식을 먹으면 맛이 더 좋아지는 법이다.
시청자들은 조리 과정과 플레이팅 된 음식을 보고 설명을 듣는다. 백종원 안성재 심사위원은 시청자들을 대신해서 미각 평가까지 함으로써 그 요리사의 작품을 함께 평가하는 것이다. 재료가 내 손바닥 안에 있느니 목표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창의성이 나오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훌륭한 임기응변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관록이건, 집착이건.
재료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그리고 의도에 맞게 조리가 되었는지, 실제로 음식을 씹었을 때 의도한 맛이 나는지, 이것과 노벨문학상 평가 기준과 무엇이 크게 다를까 싶다. 손질하는 것이 음식이냐, 텍스트냐, 그리고 내가 그것을 얼마나 제대로 아느냐.
3/ 시각장애 안마사의 비극
며칠 전, 9시 뉴스에서 슬픈 내용을 접했다. 5년 넘게 안마원을 경영해 온 시각장애인 안마사가 지자체의 부정확한 경고문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고인은 자신의 기본 일상생활을 돕는 활동지원사에게 카드 결제 등 안마원운영 관련 작업을 부탁했는데, 의정부시는 이것을 불법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을 장애인 보조금 부정수급으로 단정 짓고 2억 원을 환수할 수 있다는 경고문을 고인에게 보냈다. 고인은 이 경고문을 듣고 심히 낙담하여 자신이 운영하던 안마원 탕비실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인은, “삶의 희망이 무너졌다”, “열심히 살았는데 범죄자가 됐다”, “너무 허무하다”는 유서를 남겼다. 그는 안마원을 통해 노모와 두 아들을 뒷바라지한 성실한 가장이었다.
의정부시는 고인에게 ‘활동지원자에게 안마원 일을 부탁한 것은 불법‘이라고 했다. 근데 해당 상대는 시각장애인이다. 누군가 옆에서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식사부터 빨래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손님이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면 이게 맞는 카드인지, IC칩 방향이 어디인지를 시각장애인이 알까? 이런 분이 5년 동안 안마원을 열심히 운영했다.
지자체는 너무 나쁜 행동을 했다. 상식도 없었을뿐더러 제대로 알고자 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상황을 확실히 알아보려고 했다면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5년까지 영업할 수 있었을지, 일반인의 도움이 필요할 부분이 무엇일지, 해당 활동지원사가 고인을 얼마나 오래 돕고 있었는지 를 알고자 했다면 불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줄이며,
대부분의 경우, 잘 몰라도 우리 생명에 지장은 없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나 대신 알아봐 주거나, 완벽하게 알지 않아도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을 테니까. 모든 인간은 이렇게 산다. 타인을 통해 부족한 지식을 보충하고, 잘못된 정보는 지적받고, 아는 것들은 공유하며.
근데 필요한 수준보다 덜 알고 있는 것은 문제다. 만약 그 분야로 돈을 벌고자 하거나 벌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다. 누군가의 생계가 달린 행정을 처리하는 곳이라면 더 큰 문제다. Dave Chappelle의 말처럼, 누군가의 생계를 뺏는 행위는 그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같다(‘Taking a man’s livelihood is akin to killing him.’).
잘 알면 명료해지고, 덜 알면 말이 늘어진다. 내 글만 보아도 주절주절 길지 않는가!
제대로 안다는 것은 고민의 축적이다. 치열하게 구하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훈장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해졌다. AI는 생산의 혁명이다. AI는 단순히 창작의 지평을 넓힌 것이 아니라 창작에 드는 비용을 거의 0으로 만든 것이 더 큰 효과이다. 이제 우리는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확실히 알지 않으면 멀리 가기 어려워질 것이다. 인간끼리의 경쟁뿐만이 아니라 기계만도 못 하게 될 수 있다.
Ask, and it shall be given you. Seek, and you shall find. Knock, and it shall be opened unto you.
Matthew 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