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b n Wrestle May 31. 2020

주문진, 풀뿌리 문화

남애항부터 주문진까지의 2일간 기록

26일 아침, 죽도


바다와 무료함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으나 죽도의 한가로움이 슬슬 지루해졌다. 그래서 난 죽도의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를 떠나 남쪽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탔다.


남애항에서 향호 해변까지


버스로 10분 거리의 죽도 아래에 위치한 남애항에 내렸다. 남애항에서 내린 이유는 죽도 파타고니아 사장님이 그 곳에 맛있는 피자집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버스를 기다리기 전 잠깐 들렀던 파타고니아 매장에서 운 좋게 그 집 피자 한 조각을 얻어먹고 남애항을 행선지로 정했다.


남애항 등대와 바다


남애항 앞바다는 짙은 에메랄드 색을 띄었다. 부둣가에 서서 낚시하는 아저씨들을 제외하면 길거리에 사람 움직임이 없었다. 그 피자집 이름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바다를 왼쪽에 끼고 무작정 아래로 걷기 시작했다. 피자집이 있을만한 젊은 동네가 나오겠거니 생각했다. 이때까지만해도 내가 무거운 백팩과 더플백을 지고 한 시간을 넘게 걷게 될 줄은. 이 때 내가 걸었던 해변과 바다는 잊지 못 할 것이다.


남애항부터 향호해변까지 5 키로쯤 걸었을까, 먹구름이 재빠르게 그림자를 만들고 소나기를 뿌리더니 곧 거세졌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허겁지겁 주문진 야영장 앞에서 버스를 타 주문진 시내로 빠져나갔다.




주문진


한 시간 넘게 무거운 짐을 지고 걸은터라 나는 피곤함을 느꼈다. 주문진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큰 고민 없이 가장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를 정했고, 앞에 내렸을 때는 비는 멎었지만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됬다. 비 맞은 생쥐 꼴로 집 문을 두드렸다.


게스트하우스 K


조금 당황하시며 문을 열어주신 분은 사장님이었다. 외모로 봐선 아마 내 또래로 보였는데, 주문진 1세대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시다. 나처럼 이렇게 불쑥 찾아 오는 손님은 일년에 한 두 분 꼴로 나온다고 말하며 따뜻한 차를 준비해주셨다. 가정집 분위기의 이 게스트하우스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바로 널찍한 거실이 나온다. 한 벽 아래엔 도시별 독립 잡지들이 쌓여있고 그 반대편에는 좌식형 탁상이 두 개 있었다.


사장님은 나를 앉히고 게스트하우스 주변 맛집과 주문진 역사에 대해 소개를 해주셨다. 이 때 사장님이 직접 만드신 스무쪽 가량의 <강릉 여행 가이드 책자>를 함께 주셨다. 흑/백으로 인쇄된 A5 크기의 책자였다. 어릴 때 교회에서 주보를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어서, 조금 볼품은 없을지라도 사장님의 정성으로 채워진 이 가이드북이 너무 감사했고 귀했다. 게스트하우스 운영자가 으레 하는 호스피탈리티와도 달라 신선했다. 당연히 내가 유일한 손님이었기에 그 정도의 케어를 받았겠지만, 실제로 나의 자잘한 요청들에서 사장님의 특별한 배려심이 닿았다.


2020년 최고의 여행 가이드북


나는 시장기가 돌아 사장님이 추천해준 맛집 중 가까운 곳에 가 막국수를 먹고 영진해변을 걸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마침 사장님에게서 카톡이 왔다.


근처에서 주문진 문화 스타트업 관련해 모임이 있는데
시간 되시면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아요~

나도 어차피 조용히 쉬기만 할 생각은 없었던터라 기분 좋게 따라가기로했다. 이미 게스트하우스 건물 앞에서 다른 두 분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중 한 분의 차를 타고 주문진항 등대 근처에 있는 다른 게스트하우스 R 로 향했다.


마실와


이 게스트하우스는 내가 묵는 게스트하우스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강릉과 주문진에 오는 외국인 여행객의 8할은 묵는다는 이 곳은 백패커들의 성지였다. 1층에는 웨스턴 바 형식의 공간이 있었고 여기서 그 날의 모임이 진행되었다. 열댓 명이 모인 이 모임의 이름은 마실와, '마실을 오라'는 뜻이다. 참여자들은 게스트하우스, 설치 예술가, 드론 사업가, 독립출판서점, 지자체 문화부 소속의 사람들이었다.


모임 목적은 주문진의 문화 사업 계획을 토의하고 담당자를 정하는 것이었다. 곱슬 머리를 땋으신 여성분이 이 날 모임의 안건을 소개하고 진행하였는데, 남은 올해동안 주문진에서 진행할 문화 사업에 대해 얘기했다. 지자체를 통해 예산을 건의하여 승인 받은 지원금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 기간과 규모는 프로젝트마다 다르다. 회의 분위기는 밝았고, 우린 주문진에서 잡은 생선으로 튀긴 피시앤칩스에 평창에 있는 브루어리에서 만든 맥주를 함께 먹었다. 이 모두 R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의 후원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 조그만 도시에서 게스트하우스로 벌어야 얼마나 벌겠나. 이렇게 나누면 길게 상생한다는 것을 잘 아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의 비약이 많이 섞인 감상이다.


주문진 피시앤칩스와 화이트크로우 IPA. 캬!


자발적 주체자


나는 그동안 서울에서 하는 밤도깨비와 같은 문화 행사들은 모두 관련 지자체 행정과 사무실 책상에서 기획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젊은 청년들이 모여 주문진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 곳이 바로 기획실이며 사랑방이었다. 주문진을 넘어 강릉 지역에서 활동하는 창업가들도 모두 서로 아는 사이이며 꽤나 가깝게 교류하는 관계인 것 같았다. 다양한 배경의 창작자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주문진에 대한 이들의 책임감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주문진을 주문진답게 만드는 실천적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주문진을 찾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를것이다. 나는 운 좋게 주문진 풀뿌리 문화 운동의 한 면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발적 고민은 이 도시가 성장하는 원동력이 됨에 분명하지만 회의를 참관하면서 의문이 들었다.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 자리에 있던 22살 디자인 전공 주문진 토박이 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태백산맥을 넘어 가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여긴다고 한다. 서울로 가려면 태백산맥을 넘어 가야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 규모를 가진 강릉에서조차 상당히 많은 젊은 인구가 유출되고 있다. 이대로 가면 향후 받을 수 있는 지원금도 줄어들 것이다. 어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 곳 주문진은 노후화되고 있다. 특산물인 오징어 어획량도 줄면서 안타깝게도 더욱 활기가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이 곳 어민들과 건어물 시장 상인들, 그리고 회시장 상인들의 각기 다른 이해 관계가 오랜 기간 갈등하며 서로 반목하고 있다. 주문진의 낡은 이미지를 벗기려면 이들을 설득하는 일이 절대 쉽지 않겠다. 이것이 가장 큰 숙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젊은 동력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강원도 젊은이들은 생선잡이에 큰 관심이 없다. 멀리서 밀려오는 큰 변화의 파도를 막을 수 없다.


등대 밑 게스트하우스 R 사장님


이날 모임 공간과 먹을 것을 후원해준 게스트하우스는 존폐 위기에 놓여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금전적인 원인 때문일 것이다. 몇 번 월세가 밀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근 2년 동안 돈 없는 여행자들에게 소일거리를 하게 해 숙박을 제공했고, 갓 사회에 진출한 친구에게는 잠자리와 일거리를 주며 사회 경험과 소속감을 쌓게 도와주었다. 이곳은 게스트하우스이자 갱생의 공간이기도 했고 지속 가능한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곳이었다. 적어도 R 사장님이 이 곳을 통해 계획한 그림은 그랬다. 실제 긍정적인 변화도 많이 나왔다.


물론 멋진 사업 철학 뒤엔 철저한 계산이 필요하다. 이 것이 지속가능 여부에 결정적인 요소이니까. 사장님이 이 점을 간과하신 것은 아닐테다. 그래도 꾸준한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2년의 생명은 너무 짧다. 참으로 아쉽다. 1차 산업으로 집중된 이 곳 지역 경제에 활기를 주는 것은 젊은 여행자들인데, 이들이 주문진을 찾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없어지면 이는 결국 누구에게 이득일까? 지자체는 이러한 공간을 지원하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인큐베이터이자 엑셀러레이터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이러한 공간은 도시 발전에 분명 도움을 줄 것이다. 형평성 문제는 그 다음으로 논의되면 어떨까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의견도 내본다.




독립출판서점 사장님 왈, "책님이라 부르세요."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는 대부분 즐겁다. 특히 현지인과의 대화는 그 지역 상황이 그의 메시지에 엮여있으므로 관심을 끈다. 또 이날 흥미로웠던 것은 뒤풀이에서 나눈 이야기들이다. 그 중 강릉에 유일한 독립출판서점을 운영하시는 사장님과의 대화가 인상 깊었다. 동그란 안경테에 이마를 시원하게 오픈한 이 사장님은 약 마흔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굉장히 동안이셨고, 항상 미소가 입 꼬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 K 사장님과 티격태격 농담을 주고 받는 이 분은 책에 대해 놀랍도록 순수한 면을 갖고 있었다. 책 하나 하나에 인격이 담겨 있기에 존칭으로 인격체 대우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물론 농담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독립출판서점 사장이라면 엄청난 다독가인 동시에 자신만의 문학적 색깔이 확고해야 할 것이라 왠지 생각했다. 하지만 사장님의 철학은 내게 나름 충격을 주었다. 당시 그가 한 말을 정확히 옮기지는 못 하지만 대략 이렇게 말했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꼭 많이 읽어야 한다거나 한 책을 끝까지 다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 할 때 부담을 가져요. 굳이 평론가만큼 다양한 영화 장르를 섭렵하지 않아도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잖아요? 근데 왜 책을 좋아한다는 말은 어려울까요? 책의 한 장만 여러번 읽어도 느끼는 게 달라요.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귀를 딱 한 줄만 발견해도 난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요즘 말머리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어릴 때 자연스레 학습된 어휘들은 굉장히 한정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일에 큰 제약이 된다고 봐요. '결혼은 언제 할래?' 라는 문장을 봐도 우리에게 익숙한 어휘와 표현법이 이 것뿐인걸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으면 같은 물음을 가지고도 더 솔직하고 좋은 표현을 많이  쓸 수 있어요.

또 글이란 것은 읽을 때랑 쓸 때가 완전히 다른 경험입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책을 읽을 때도 작가가 쓴 글을 나라면 어떻게 썼을까 생각하며 읽으면 색다른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이 사장님은 자신이 운영하는 서점에 방문한 손님들로부터 받은 한 문장 한 문장을 모아 책으로 엮었고 이 모든 사람들을 저자로 올려 작가를 만들어주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다음날 짐을 싸는 중 게스트하우스 방 문에 붙어있는 이 글귀를 만났다.



자기 자리에서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에겐 모두 기쁨의 얼굴이 있다. 내가 여행 중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열정이란 오직 자기만 다룰 수 있는 불과 같다. 혹 열정은 삶에서 자기다움을 찾는 과정일 수도 있다. 이 끊임없는 과정 중에 지금 행복함을 찾자, 지구별을 잠깐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니까.



essay by Jun Woo Lee

photo by Jun Woo Lee


작가의 이전글 그 시절 죽도와 지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