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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b n Wrestle Dec 31. 2020

중립적인 미래와 능동적 충동

올 한 해 나의 옴니버스적 소회

1. 이립

논어에서 공자는 만 30세를 이립, 모든 (학문의) 기초를 세우는 나이라 했다. 마음이 도덕 위에 확고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세운 기준과 방향을 가지고 다음 40년 삶의 토대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나는 1월 1일 새벽, 회사에 일이 생겨 비상 출근을 한 것으로 내 30대를 시작했다. 동파로 인해 건물의 배관이 크게 터져 고객사의 임차 공간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렇게 2020년을 예상하지 못 한 사건과 함께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고, 여러 만남과 이별, 다양한 시도와 거절을 통해 나의 토대와 도덕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비 온 뒤 굳는 땅이라 하지만 일 년 동안 굳을새 없이 나의 마음에 계속 비가 내렸다.


1. 결국 다 거저였다

상실의 2020년을 살아보니 나의 의지와는 반대로 놓아줘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영영 가질 줄 알았던 것들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거나 나의 노력이 충분치 않아 내 손을 뿌리치듯 사라진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들은 모두 거저먹듯 얻게 되어 잠깐 내 안에 머물다 갔다. 진정 내 것이 아니었던 것들은 내가 미처 인지하기 전에 살며시 나를 떠났기에 상실감은 덜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은 내 곁에 잘 붙어 있는지 살피는 일에 나태했다.


내가 가진 대부분이 당연스레 얻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한 해였다. 이 사람과의 만남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인연으로 이어진 것도 당연하게 느껴왔다. 직장도 당연스레 내 자리라고 생각하고 매일 아침 출근한 것 같다. 이걸 유독 느끼는 이유는 올해 특히 가지고 있던 것들을 애써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몸은 멀어져도 마음은 멀어지면 안 되었다. 건강, 사랑, 가족, 친구, 일, 그리고 내 비전을 지키려다 보니 내가 이를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 그 첫 시점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2021년은 더 지키고 구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지금에서 한 번의 노크, 한 개의 메시지, 하나의 부탁, 한 번의 인사, 한 번의 감사의 제스처가 더 필요할 것이다.


1. 땡스기빙(thanksgiving) & 폴기빙(forgiving)

올해 발견한 나의 의외의 모습도 있었다. 감사와 칭찬에 있어서 불필요할 정도로 입을 무겁게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감사와 겸손의 제스처와 별개로 입이 해줘야 할 역할이 있다. 지난 시간 동안 표현에 있어 인색했던 나를 돌아본다. 내 주변에 있어주는 것들을 둘러보니 과분하다는 생각에 드는 반성이다. 자연의 끈기와 불변함에 대해서는 찬탄하면서, 소중한 것들은 항상 내 주변에 있을 것처럼 당연시했던 나에게 매월 나만의 땡스기빙 의식을 만들어본다. 동시에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게 내 사과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도 가져본다.


1. 방치된 문제들

인생 과정을 집을 관리하는 것으로 비유해본다. 집 관리에 신경 쓰기를 게을리하면 평수에 관계없이 잡동사니나 이쁜 쓰레기, 더러운 오물들이 집 여기저기에 쌓이게 된다. 거실이 아닌 욕실에 40인치 텔레비전을 놓고 산다든지, 안방 바닥에 죽은 쥐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 식으로 말이다. 때때로 우린 집 안 관리에 소홀해 저녁마다 퇴근하고 들어오면 그나마 깨끗한 곳을 찾아 잠을 청하기에 바쁘다. 2020년은 내 집안 관리에 주의를 돌린 시간이었다. 내가 가진 악습관부터 겉치레뿐인 행동, 미래 성장에 중요하지만 내 머리 구석에 방치하고만 있던 것들을 일광 건조하고 쓸고 닦는다. 내 신변을 정리하며 방치되었던 문제를 고치거나 적어도 도움을 요청해야 할 필요성을 가진다.


상실감을 포함해 다양한 심적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은 짧지 않다.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 인생이 주는 집안 허드렛일(chores)이다. 시련은 기대와 현실의 나의 괴리가 오래될수록 방치될 수 있고, 후에 그만큼 더 고통스럽다. 수많은 거절과 상실을 겪고 있는 지금은 스스로를 변호하고 청소할 수 있는 기회다. 부적절한 결정이란 없다. 과거의 나에게 선택권이 있던 만큼 지금의 내게도 선택의 권능이 있다.


1. 가지 치기

우리 집 옆에 있는 감나무 한 그루는 올해도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에 가지 치기를 당했다. 잘 익은 주황색 과육을 다 떨군 후 앙상히 서 있는 게 영 볼품없다. 강수량이 적은 겨울을 버티기 위해 필수 가지들로 양분을 집중시키고 썩을 수 있는 가지들을 포기하는 대단한 계획을 감행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 변했다. 선택지에 있는 수많은 가능성은 오히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여정의 목적을 깜빡하게 만든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해야 하는 일만 구분하려고 노력한다. 캔버스 위에서 내 붓질에 집중하지 옆 자리로 옮겨가 물레를 돌리지 않는다. 내 인생을 의미 있고 값지게 만들 일들은 소중히 육성하고 내 인생을 금전적으로 풍족하게 만들어줄 일들은 위험과 확률 게임을 수반하더라도 전념하는 게 내 가지치기 계획이다. <As Little Design as Possible>에서 조너선 아이브는 진정한 단순함은 어수선한 장식들이 없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함 안에서 질서와 순서를 만드는 일이라 했다. 이 단순함의 철학이 애플 제품에 적용될 수 있다면 내 인생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재기 X, 사재낌 O

고백하건대, 이번 연말에는 거의 매 퇴근길에 택배 알림이 도착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이것저것 사 재꼈다. 공허함을 채우려는 노력 중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가장 쉽고 변변찮은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중의 필요를 계획하고 사놓는 사재기도 아니고 당장 내일의 일상을 살 내게 기대감을 줄 수 있는 물건이라면 사재 꼈다. 죄책감이 슬슬 들기 시작한 건 퇴근 후 계단을 오를 때 나도 잊고 살던 택배가 문 앞에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 보일 때였다. 호모 콘수무스, 소비하는 삶. 그 대신 난 조금 덜 떨어진 스튜핏 호모 콘수무스였다.


1. 조급함

내 마음은 한시라도 입을 닥칠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나를 의심하고 고민에 빠지게 하고 무기력하게 했다. 인생 게임이 단계별로 정직하게 나아지는 롤 플레잉 스타일이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나는 그마저도 참을성이 없는 편이다. 덜 두리번거리기까지, 그리고 빠른 결과를 원하는 것이 신기루와 같은 허상의 욕망이라는 것을 배우기까지 나 또한 내 마음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야 했다. 나를 두렵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이성적인 끈을 놓게 만드는 공포가 어디서 오는지 말이다. 좋은 것들은 보통 느리게 찾아온다는 말은 내겐 그리 설득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좋은 인생이 반드시 특출 난 실력만을 요구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글 솜씨가 잼병인 사람도 소중한 이에게 보내는 엽서 한 장 끝내주게 쓰지 못한다는 법 없으니까. 그래서 조급함은 호흡을 망친다. 이건 단거리 전력질주가 아니라 마라톤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게 어떤 경기든 이겨야 한다.


5K를 돌파하고 박수를 친다


1. 정서 지능(Emotional Intelligence)과 메타 인지(metacognition)

그동안 절박하게 탐색했던 것이 성공의 성배가 아닌 자기 치유의 방법이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올 한 해 가장 많이 읽은 주제다. 이 두 키워드는 우리 세대와 어린 세대가 제정신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꼭 익숙해져야 할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의 속도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속도와 그 속도로 인해 여기저기서 잡아당기는 중력에서 나를 지키려면 내가 왜 이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깐 멈춰 생각해야 한다. 문제를 다시 정의하고 사유의 시선을 바꾸는 능력이다. 어디서 싸울지 내가 전쟁터를 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1. 작은 성공은 가장 값싼 해결책

조급한 내가 긴 호흡을 가지기 위해 한 훈련 방법은 일상에서 작은 성공들을 최대한 많이 경험하는 것이었다. 용어 해설집 5장 읽기부터 온라인 강의 듣기, 아침 침대 정돈 등이다. 특히 올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러닝은 내게 영감을 주고 조급함을 이겨내는 의식이 되었다. 분명 보이지 않는 큰 변화를 그리고 있다. 작게는 호흡부터 통제함으로써 작은 성취들에 익숙해지는 것이 목표다. 이게 내 조급증을 고치고 집중력을 기를 수 있게 도와줄 가장 값싼 해결책이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을 정해놓고 꾸역꾸역 글을 쓴다. 꾸역 꾸역에 의의가 있다. 꾸역꾸역 하면 어떤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3-60 프로젝트>도 그래서 시작했다. 매일매일 작은 성취와 작은 노력들을 세 줄씩 기록했다. 좋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60일 목표를 채울 수 있었다.

6명의 사람들과 함께 60일간 매일 세 줄씩 쓰는 과정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1. 배짱과 끈기

서울에서 살아가는 타지인들이 고향에 내려가는 이유 중 하나는 인생의 최전선에서 싸우다 다친 부분을 부여잡고 치료받기 위해서다. 나도 고향에 내려갈 때 마음의 병을 가지고 내려간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처방을 내려주시고 나는 그 처방전을 들고 서울에 온다. 이번에는 엄마가 내게 배짱을 처방해주셨다. 추가로 현금을 두둑이 지니라고 하셨다. 내가 요새 위축되어 있는 것을 보신 것이다.


배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쉬운 단어 같지만 마땅한 현실적인 예를 들기 어렵다. 답을 찾던 중 고객사의 과장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회사는 이번 코로나로 인해 O2O 사업에 큰 타격을 입었고 현금 흐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나에게 과장님이 이렇게 말했다. '판교에서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이 회사에 온 후 정말 힘든 일이 많았던 한 해였지만, 회사가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일해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조금 의아하고 혼란스러웠다. 보통 회사가 어려워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려 하기 마련일 텐데. 나도 우리 회사에서 두 번이나 그런 광경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의 그릇으로는 듣는 즉시 이해되지 않았지만, 과장님의 말을 곱씹어 볼수록 내 생각엔 저게 배짱의 의미인 것 같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볼짱은 보기 위해 내가 정한 마음, 그 태도. 도덕의 기초. '내가 해보면 되지'에 이미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자기 확신이 전제된 것 같다. 나도 담대하게 준비하리라. Enjoy the risk consciously.


1. 윌리엄 제임스의 능동적 충동과 합리성의 감상

등 누일 따뜻한 곳에서 배 부른 상태로 있다 보면 사실 별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삶에 난처함이 생길 때라야 인간은 추구하고 갈망하고 분발한다. 인생의 욕망을 끊임없이 느끼는 우리는 삶 자체의 충만함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삶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미래가 중립적일 때 우리는 현실에 집중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은 정신적 자극제가 되는 반면에 습관은 정신적 진정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동적인 능력을 믿고 미래를 정의하자. 그랬을 때 비로소 원초적 물음이 실천적 물음으로 변환한다. 생각이 행동으로 변환될 때까지는 미완성 상태다. 이때 능동적인 본성은 실천에 즉각 도움이 된다.


'모든 분발은 헛되다'라는 운명론은 결코 크게 세력을 떨칠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을 열정적으로 대하는 충동은 그러한 말로써 파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하라.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전체 인간이 움직인다. 내가 세운 성공(성장) 가설이 참인 것처럼 행동하고, 그 가설이 거짓이라면 스스로를 실망시킬 결과를 기대한다. 실망감을 느낄 날이 지연될수록 처음 세운 가정에 대한 믿음은 보다 강해진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믿음 자체가 가정을 검증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어라, 그러면 당신은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믿지 말아라, 그러면 당신은 또한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차이는 믿는 것이 당신에게 대단히 이롭다는 것이다.


개인적 신념에 의존하자. 성공은 행위의 에너지에 달려 있고, 에너지는 다시 우리가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에 달려 있으며, 믿음은 다시 우리가 옳다는 믿음에 달려 있다.


1. Joys of Being Wrong

데이브 샤펠이 무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시대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으니 우리 모두 무모하게(recklessly) 자신을 표현할 의무를 갖자고. 그렇지 않으면 나중 세대는 ‘틀리는 즐거움’, 혹은 ‘내가 가진 기준이 흐트러지는 재미’를 영영 모르게 될 것이라고. 세상은 점점 양극단으로 치우치고 우리들은 타이트하게 조여져 있다. 어떠한 형태의 자기표현도 조심스러워졌다. 항상 옳아야 된다는 강박관념, 항상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약한 영혼은 점점 살아남기 어려워질 것이다.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길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형식의 예술을 표현하는 일에 있다.



essay by junwoo

photo by Drew Bea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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