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준의 모티브 120]
영화에서 '최고의 상'하면 아카데미의 오스카상이다. 이 상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배우 윤여정이 수상했다. 그녀는 영화 '미나리'에서 자연스러우면서도, 웃기고 울리는 할머니 역할을 해냈다. 사실 그녀는 굳이 미국까지 가서 그 영화에 출연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이미 국내에서 그녀와 일하고 싶어 하는 작가와 감독들이 줄을 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예능까지 잘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인을 통해 미나리 극본을 받아서 읽게 된 그녀는 너무 사실적인 이야기에 감독의 실제 이야기인지 물어보았고, 그렇다는 대답에 흔쾌히 출연 승낙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제작비가 수 백억에서 수 천억이 든다고 하는 요즘 시대에 20억에 불과한 저예산 영화다. 돈 보고 한 것도 아니고 나이 이른 이 넘어서도 좋은 작품과 새로운 연기 환경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도전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비평가협회 상과 골든 글러브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고, 마침내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배우 윤여정과 영화 미나리는 평단의 인정뿐만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호응을 얻으며 이 어렵다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흥행 대세라고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브레이브 걸스'다. 2017년에 내놓은 곡 '롤린'이 1,800일이 지나 5년 만에 멜론 차트 1위에 올랐다. 과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이 그룹을 띄운 사람은 다름 아닌 군인들이다. 역주행 짤로 유명한 동영상을 보면 관객의 반응이 장난이 아니다. 댓글에는 “전쟁 때 이거 틀어주면 전쟁 이김.”, “군생활을 이곡 하나로 버텼다”라는 글들이 나오고, 논산훈련소의 실로암과 함께 군인들을 미치게 하는 사제 군가로 불린다.
말년 병장도 침상 위에서 몸을 흔들게 만들고, 선임이 제대하면서 후임들에게 인수인계하는 노래.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자신들을 위로해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노래라 응원하게 되었고, 60만 대군의 응원이 쌓여 성공으로 까지 이어진 것이다.
윤여정 배우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5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브레이브 걸스의 롤린이라는 곡이 1위까지 역주행하는 데에는 5년이 넘게 걸렸다. 사람들은 '존버 정신의 승리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버티기만 한다고 모두 성공할 수 있을까?
윤여정 같은 경우에는 NG 내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다들 프로인데 자신 때문에 일이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깐깐하다고 소문난 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긴 대사로 유명한 김수현 작가의 '사랑이 뭐길래'에 출연했을 때는 132장이나 되는 대본의 대사를 한 번에 다 치고 기절해 버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그녀는 잠자기 전에 대사를 되뇌다 보면 막힌 부분이 생각나 다시 대본을 보고, 또 보고 하다 보니 잠을 못 이뤄 일을 할 때는 수면제를 먹어야 잠에 들 수 있다고 한다.
브레이브걸스는 그 오랜 시간 하루도 안 빼먹은 것이 있다고 하니 그것은 바로 연습이다. 긴 시간이 되었든 짧은 시간이 되었든 연습은 매일 같이 꼭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노래도 부족하고, 안무도 의자에 올라가서 추는 부분이 어려워서 하던 연습인데, 몇 년 동안 세상에서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간에 연습 만은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비가 오는 악천우 상황에서도 웃으며 노래하고 관객들과 함께 즐기면서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알려진 데로 윤여정은 조영남과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자신이 밝힌 대로 먹고살기 위해서 연기를 다시 시작한 생계형 배우다. 미국에서 돌아온 것이 1983년인데 아들 둘 딸린 이혼녀를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혼 풍토를 조장한다고 목소리 거슬리는 그녀를 TV에 출연시키지 말라고 방송국에 항의 전화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니 단역이든 조연이든 주어진 역할이면 가리지 않고 했다. 또한 다음 역할을 따내기 위해서는 잘해야 했다. 그녀의 연기는 도시적인 부잣집 사모님에서 시골 촌부, 성을 파는 아줌마에서 수녀님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또한 이렇게 주어지는 많은 역할을 소화하면서 실력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신인 가수는 아이돌만 한 해에 60여 개 팀, 300여 명 정도가 나온다. 브레이브 걸스는 나름 유명한 작곡가 용감한 형제가 제작한 팀이지만 그녀들이 올라갈 수 있는 무대는 많지 않았다. 무대 중에 가장 열악한 곳 중에 하나가 군대 무대라고 한다. 보통 부대는 산속에 숨어있으니 이동 시간이 오래 걸리고, 지급되는 페이는 적고, 무대 조명이나 음향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백령도를 왔다 가기 위해서는 1박 2일이 걸리지만 아무리 어려운 무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
배우는 감독의 디렉팅을 받기 때문에 주어진 연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주어진 대사 속에서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살아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배우 윤여정의 연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하다. 예전 70년대 영화를 보면 뭔가 신파 같고 과장되어 보인다. 하지만 윤배우는 그게 어색하고 싫어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추구했고, 그 결과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인 듯 보인다. 같은 역할도 윤여정이 하면 뭔가 다른 사람으로 보이고, 다양한 역할을 하지만 그 역할마다 꼭 맞는 사람 같아 보이는 것이 그녀의 연기다.
브레이브 걸스에서 가장 먼저 인기를 얻은 가수는 꼬북좌로 불리는 유정이다. 꼬북이 캐릭터처럼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 보는 사람도 미소를 짓게 만든다. 또한 무대 안에서 공연을 하는 멤버들의 표정을 보면 관객들과 눈을 맞추고 호흡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무대를 즐긴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치 자신에게 손짓하는 듯한 제스처와 표정에 군인들은 그만 녹아내리고 가슴이 심쿵하는 것이다. 공연하는 그 순간만큼은 무대 위에 있는 가수도 밑에 있는 관객들도 모두 무아지경에 빠져 보인다.
코로나로 일 년 넘게 어려운 시간을 버텨오고 있다. 그 사이 아파트 값은 엄청나게 오르고,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도 많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잘 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들도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버티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 그렇다고 그냥 버티기만 한다고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성공에도 일정 기준이 있다. 그 기준 이상으로 오르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파고들며 자신의 실력을 올려야 한다.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고 나쁘고를 가리기보다는 소화하며 즐길 수 있는 순간까지 해내야 한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꿈꾸었던 그 순간이 올 것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이른 넘은 할머니 배우를 아카데미가 알아주는 것처럼. 있는지도 몰랐던 무명 가수를 소환해 가장 멋진 무대 위에 올려주는 것처럼.
※ 본 칼럼은 월간 TOOLS의 기고 요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