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공포가 덮치면 사람들은 숫자보다 현금을 원한다. 투명성 보고서가 아무리 깔끔해도, 계좌에 달러가 들어오지 않으면 신뢰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 대규모 상환 요청(Bank Run)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상환(Redemption)은 버튼 하나로 끝나는 과정이 아니다. 사용자의 지갑에서 코인을 소각(Burn)하고, 수탁 은행에 보관된 국채나 레포 자산을 현금으로 청산(Liquidation)한 뒤, 그 현금을 사용자의 은행 계좌로 송금하는 세 단계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즉시성이 단 한 번이라도 깨지면, 시장은 "발행사에 돈이 없다"는 신호로 읽고 페깅(Pegging, 1달러 유지)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속도가 신뢰를 결정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고도화된 발행사들은 준비금을 한 덩어리로 운용하지 않는다. 유동성 층위(Liquidity Tiers)를 설계해 자산을 세 겹으로 나누는 방식이 2026년 현재의 실무 표준이다. 수익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잡으려는 설계지만, 우선순위는 언제나 안정성이 먼저다.
첫 번째 층위는 전체 준비금의 1015%를 차지하는 즉시 가용 현금이다. 대형 은행의 당좌예금에 예치되어 24시간 언제든 송금이 가능하다. 두 번째 층위는 전체의 5060%를 구성하는 역레포(Reverse Repo)와 초단기 국채로, 영업일 기준 하루 안에 현금화된다. 세 번째 층위는 만기 90일에 가까운 국채들로, 평상시엔 가장 높은 이자 수익을 내지만 비상시에는 시장 매각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하는 마지막 방어선이 된다.
세 겹의 설계만으로는 부족할 때를 대비한 방어 매뉴얼도 존재한다. 단기간에 과도한 상환이 몰리면 일일 상환 한도를 설정하거나 수수료를 높여 투매 속도를 늦추는 조치가 가동된다. 동시에 발행사에 직접 현금화를 요청하는 대신, 유니스왑(Uniswap) 같은 탈중앙화 거래소(DEX)에서 다른 사용자와 교환하도록 유도해 직접 상환 압력을 분산시킨다. 공포 심리가 확산되는 속도보다 유동성 공급 속도가 빨라야 페깅이 유지된다.
위기의 순간에 투명성 소통은 기술적 방어만큼 중요하다. 실시간 준비금 증명(Proof of Reserves) 데이터를 5분 단위로 업데이트하며 "충분한 자산이 있다"는 사실을 수치로 보여주는 행위 자체가 심리적 방어선을 구축한다. 2023년 서클(Circle)이 SVB 사태로 일시적 페깅 붕괴를 겪고도 살아남은 건 신속하게 BNY 멜론으로 창구를 옮겨 상환 중단 없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온오프 램프(On/Off-ramp) 파트너의 역량이 발행사의 리스크 관리 역량과 직결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 대금을 받은 납품업체가 즉시 현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거래 은행과의 API 연동이 얼마나 매끄럽게 작동하느냐가 유통망 전체의 신뢰도를 결정한다. 기술 인프라가 비즈니스 신뢰의 기반이 되는 구조다.
유동성 층위 설계는 수익성을 일부 희생해 안정성을 사는 과정이다. 3단계 자산을 줄이고 1단계 현금 비중을 높이면 이자 수익은 줄어들지만, 뱅크런이 왔을 때 회사를 살리는 건 결국 그 1단계 현금이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탐욕보다 신중함이 더 오래 살아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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