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없이 봉천동에 발걸음하기
봉천동에 대한 첫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회사와 적당히 가까운 자취방을 구하다 보니 서울대입구 쪽을 찾았고, 서울대입구 쪽이라도 이왕이면 넓은 곳을 실제로는 15분쯤이지만 집주인이 ‘걸어서 10분’이라고 주장하는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연세가 지긋하신 집주인 할머니는 축지법이라도 써서 봉천동 일대를 휘어잡으시는 것인지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서울대입구에서 10분 내로 집에 도착해본 적이 없다.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은 내 탓이지만 부동산중개사와 집주인할머니에게 왠지 모르게 속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 처음 잡은 월세방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새로 집을 구했기 때문에 집들이를 한답시고 집에 친구들을 초청했으나, 역시 좋은 평가를 들을 수는 없었다. 친구 현종은 이곳이 ‘추잡하고 지저분한 동네’라고 평가했으며, 정미는 ‘언덕만 많고 주차할 공간은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희안한 동네’라고 평가했다. 나도 일단은 전입신고를 한 주민인지라 그 말에 반발심이 들어 무어라 한 마디를 하려 했으나 달리 뾰족하게 받아칠 말은 없었다. 다가구주택인지 다세대주택인지 모를 건물들이 언덕을 따라 우후죽순으로 들어와 있고, 곳곳에 있는 무당들의 신당 밖에 꽃힌 붉은 색, 하얀 색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은 밤에 보면 없는 귀신도 불러들일 것만 같은 곳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플라뇌르적 경험을 몇 번 하고 난 이후이다. 플라뇌르는 특별한 목적 없이 걷는 사람을 뜻하는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기분과 호기심에 따라 발길을 옮기는 산책하는 사람이다. 서울대입구역 근처의 봉천동은 동네가 불규칙하게 골목과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이 때문에 정처 없이 발걸음을 거닐기에는 제격이었다. 봉천역과 서울대입구역 사이에 위치한 집의 특성상, 기분에 따라 내키는대로 아무 역에서나 내려서 집을 향해, 또는 집에서 역을 향해 거닐곤 했고 이것은 플라뇌르가 된 기분을 만끽하게끔 해주었다. 주말의 한적한 낮에 이곳을 거닐 때면 런던의 곳곳을 산책하는 버지니아 울프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라도 드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동네의 숨겨진 재미라고 한다면 프랜차이즈 카페 대신 동네 곳곳에 위치해 있는 매력적인 카페들이다. 최근에 발견한 곳이 있다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잠깐 떠오르는 카페인데, 카페 이름 때문에 무언가 독일식을 표방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으나 내부는 대단히 모던 한국이 재현되어 있었다. 카페에 놓여있는 큰 책장에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책부터, <국어대사전>과 <제 3의 물결>같은 책들이 아무렇게나-하지만 정돈된 채로-꽃혀 있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대충 유튜브에서 ‘카페 음악’이라고 치면 나오는 재즈풍의 음악이었다. 카공족을 쫓아내기 위한 저상탁상과 인테리어와 이 모든 것은 함께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정통성이라곤 없지만 나름의 질서가 구현되어있는 듯한 그 공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곳은 퇴근 후 매일 책 읽기에 최적화된 공간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경험은 아이러니하게도 ‘깔끔하고 정돈된’ 이미지와는 먼 이곳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어딘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경험은 곳곳에 미로와 같은 골목들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발걸음을 통해 발견해 나가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이 신도시 아파트같은 곳이었다면, 동네를 걷는 경험은 오로지 아파트 단지를 걷는 경험으로 국한될 것이고, 차를 끌고 SNS광고의 상단에 노출된 카페/맛집에서 소비행위를 함으로써 경험이 마무리되었을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