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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12.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4-

열기의 도시 -1-

비행기는 밤 열 시 삼십 분쯤에 도착했다. 비행기는 길고 하얀색의 몸체의 밑에서 매끄러운 동그라미 모양의 검고 커다란 바퀴를 꺼내어 활주로에 내려앉는 것으로 네 시간 삼십분에 달하는 비행의 끝을 알렸다.

곧이어 커다란 반원의 동선으로 어둠에 반쯤 잠긴 활주로를 선회하던 비행기의 움직임이 멈추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즐거운 여행 되셨습니까? 늘 승객 여러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대한항공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셨는지요? 저희는 방금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 하였습니다. 현재 싱가포르의 시간은 밤 아홉시 삼십 칠 분입니다.” 

나는 기장의 안내 방송에 따라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시차에 맞춰서 한 시간을 늦게 맞춰 놓으며, 문득 한국에서의 기억도 한 시간 정도 나를 늦게 찾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한 손에는 입국수속을 필요한 여러 가지 서류들을 손에 들고 비행기를 빠져나와 게이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통로에 가득 찬 가지각색의 피부색의 사람들을 보고 내가 타국에 도착했음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환경.

지금의 나는 단지 수많은 관광객 중에 한 명이었고, 어느 누구도 신경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이 현실이 그동안 무거웠던 나를 조금은 가볍게 해주는 것 같았고, 덕분인지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걸음이 경쾌하게 느껴졌다.   

입국 심사는 매우 빠르고 간편하게 끝났다. 처음 겪어본 입국심사에 긴장한 내가 파란색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공항 직원에게 딱딱한 몸짓으로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내밀자, 인도인으로 보이는 공항 직원이 여권과 티켓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어떤 목적으로 싱가포르를 왔나?”

라고 물었고, 나는 그저

“관광.”

이라고 한 단어를 내뱉은 것이 끝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직원은 나의 여권 첫 장에 도장을 찍고 

“좋은 여행이 되기를” 

한 마디를 덧붙이면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도 그의 미소에 미소로 대답했다. 그것으로 입국심사는 끝이 났다. 나는 생각한 것 보다 너무나도 쉽게 끝난 입국심사에 다소 어리둥절해하면서 입국 심사대를 나섰다.

나는 잘 몰랐던 사실이었지만, 싱가포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찾는 국가 중 하나였다. 입국 심사대 앞 곳곳에 ‘xx여행사’ 또는 ‘xx투어’ 등의 한글로 적혀있는 플랜카드들이 제법 많았다. 예상치 못한 한국어들의 홍수에 나는 꽤나 당황했고, 혹시나 누군가 나를 알아 볼까봐 검정색 모자를 더욱 더 깊숙이 눌러 썼다. 수하물을 찾는 잠깐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공항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늦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덥고 습한 바람이 숨을 막을 기세로 몰아쳤다.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후가 내가 타국에 왔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해 주었다.

공항의 바로 앞에 위치한 택시 정류장은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길게 늘어진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고, 내 앞에 몇 명의 여행객들이 택시를 타고 떠난 후에, 등에 'Security' 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안내 요원들이 내 차례임을 알렸다. 내 앞에 멈춰선 택시에서 내린 알록달록한 꽃무늬 반팔 셔츠와 시원해 보이는 크림색 반바지를 입은 유쾌한 인상의 젊은 택시 기사가 나의 짐을 트렁크에 넣는 것을 도와주었다.  

“래플즈 호텔로 갑시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 시동을 걸고, 도로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차는 다소 낡아보였지만 그동안 관리가 잘 되었는지 조용하고 깔끔했다. 다만 에어컨이 시원치 않은 게 유일한 흠이었는데 나는 기사에게 에어컨을 조금 더 강하게 틀어달라고 했으나, 왠지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나는 차라리 에어컨을 꺼달라고 하고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의 풍경을 감상했다. 깔끔하게 잘 포장된 도로 옆에 늘어서 있는 야자수 나무가 가로등의 빛을 받아 주황색으로 빛나며 어둠이 깔린 도시를 점점이 밝히고 있었다. 그 노란빛이 가득한 이국적인 풍경이 나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었다.

“어디 나라 사람?”

기사의 영어는 악센트가 강하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음이 높낮이의 격차가 컸다. 중국어의 흔적이 짙게 느껴지는 영어였다. 기사의 다소 알아듣기 힘든 영어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대충 추측하여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배웠던 영어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고, 세상은 넓고, 같은 영어라도 다양한 표현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자신을 가리키며 천천히 말했다.

“한국.”

“아하! 한국!”

기사가 ‘아하!’와 같은 톤으로 ‘한국’을 발음했다. 

“북쪽? 남쪽?”

“남쪽.”

“남쪽!”

택시가 천천히 우회전을 하면서, 나의 몸도 가볍게 오른쪽으로 쏠렸다. 도로를 가득채운 자동차들은 일사불란하게 헤드라이트를 좌우로 켰다 끄기를 반복하며 도로로 들어오고, 나갔다. 점점 도로 양 옆으로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인도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으로 봐서 점점 도심가로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한국사람 많이 와요. 근데 대부분 여자들이 오는데. 남자 혼자 온 건 처음 봤어요. 그것도 젊은 사람이. 싱가포르는 무엇 때문에 왔어요?”

‘한 여자랑 헤어졌어요. 아니, 처음부터 그녀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요.’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벙긋거리면서 무언가 다른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창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아무런 이유라도 꾸며서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말 대신 어색한 웃음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를 내리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호텔의 정면은 마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낡은 유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다소 따뜻해 보이는 빨간색 지붕에 흰색 기둥으로 이루어진 고풍스러운 석조 아치 모양의 지붕 밑에 길을 따라 기념품, 향수 등을 파는 자그맣고 고급스러운 아케이드가 줄지어 서 있었고, 아케이드를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야외에 차려진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과 정원에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생기 가득한 나무들이 보였다. 내가 호텔의 풍경에 빠져있는 동안, 기사는 트렁크에서 내 짐을 꺼내어 정원 안쪽에 위치한 로비에 가져다놓고는 택시와 함께 저 멀리 노란빛 풍경으로 사라졌다. 나는 멀어지는 택시를 뒤로 하고, 정원을 둘러보며 천천히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로비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고풍스럽고 편안해 보이는 갈색의 소파들과 깔끔하고 단단해 보이는 테이블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복잡하고 화려하게 치장하기 보다는 심플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손님을 위한 배려가 잔잔하게 깔려있는 모습이 엿보였다. 높은 천장에 매달려있는 자그마한 샹들리에들이 대리석을 따뜻한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은 마치 어렸을 적 지내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향수를 느끼고 해주고 있었고, 조용히 로비를 돌아다니던 직원들이 멍하니 로비를 바라보던 나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지어주는 미소조차도 따듯하게 느껴졌다.

내게 제일 먼저 다가온 인도인으로 보이는 호텔 직원은 밤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매우 친절했고, 덕분에 나는 한결 편안하게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체크인을 마친 후에 내 짐을 받아든 직원 두 명을 따라 예약해둔 이 층의 객실로 이동했다.

짐을 방 안에 내려놓은 직원이 객실 안에 비치되어 있는 전화기를 가리켰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기 비치되어 있는 전화로 저희를 부르시면 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웰컴 드링크로 저희 래플즈 호텔의 이 층에 위치해 있는 롱 바의 시그니쳐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을 준비해 드릴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두 잔이 제공되며 원하시면 논 알코올로 즐기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알코올이 들어간 것으로 부탁하고 일단 샤워를 할 것이니 약 삼심 분 후에 가져다주면 고맙겠다고 덧붙이며 지갑을 꺼내어 그에게 다시 한 번 감사 인사와 팁을 건넸다. 

직원이 조용한 움직임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땀에 젖은 긴 바지와 셔츠를 벗어 버리고는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이 상쾌하게 머리부터 쏟아졌다. 싱가포르는 확실히 더운 나라였다. 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이곳의 열기는, 직접적으로 내 피부를 통해 시시각각 내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고 있었다.

나는 이 열기의 도시. 싱가포르에 있었고, 서율은 사계절의 나라. 한국에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한 차가운 기억만은 아직도 내 마음 한 편에 남아 있었고, 때문에 나는 가끔 내 마음의 창에 김이 서리는 기분이 들었다. 싱가포르의 낮의 열기는 내 마음의 냉기도 몰아 낼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샤워를 마친 나는 가운을 입고 배낭에서 노트와 필통을 꺼내어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 싱가포르의 분위기, 공항의 간단한 입국절차, 싱가포르 택시의 친절하고 정직한 느낌, 호텔 직원들의 친절함 등을 노트에 적었다. 간만에 느껴보는 연필의 특유의 사각거림과 부드럽게 칠해지는 검정색의 느낌이 좋았다.      

 ‘나는 기사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점을 찍었다. 진행 중인 문장인지, 완성된 문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점이 열 개를 넘었을 때, 일기를 덮고 연필을 필통에 넣었다.

그 때, 누군가가 객실을 노크했다. 일어나서 문을 열자 호텔 직원이 유리잔 두 잔이 담겨진 쟁반을 들고 있었다.

“웰컴 드링크입니다.”

직원은 테이블 중앙에 싱가폴 슬링 두 잔을 내려놓고는 더 필요한 게 없는 지 물었고, 내가 괜찮다고 대답하자 편안한 밤이 되라고 밤인사를 건네고는 조용히 움직여 객실을 나갔다. 

나는 쓰던 일기를 덮고는 싱가폴 슬링이 담긴 잔을 바라보았다. 지는 석양을 닮은 붉은 빛의 음료가 길고 가느다란 잔에 가득 차 있었고 잔의 가장자리에는 파인애플과 체리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잠시 잔을 바라보던 나는 잔에 입을 대었고, 곧 새콤하고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좋은 음료였다.

싱가폴 슬링 두 잔을 비우자 저 먼 흐린 기억 속의 어느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가 싱가포르에 대해 이야기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남자가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서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녀가 했던 말들과, 그녀가 했던 행동들과, 상처들…. 잊자. 잊자.

침대에 눕자 아주 잠깐, 침대가 혼자 자기에는 너무 크다는 생각을 잠깐 했고 그 생각이 가시기 전에 잠이 들었다.     

어디선가 자그맣게 윙윙-. 거리는 에어컨 소리가 들렸다.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열리는 만족스러운 잠이었다. 그동안 신체에 쌓여있던 묵은 피로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신선한 활력이 대신했다. 마치 몸 안 가득, 손끝까지 봄이 가득 찬 기분이었다. 그 기운에서, 나는 이곳 싱가포르에서 나의 지난날과는 다른 밝은 무엇인가가 내 인생에 들어올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일단 날씨를 확인해볼까. 창문에 다가간 나는 황금색의 아침 햇살을 기대하며 양 손으로 격자무늬가 새겨진 나무로 된 창문을 당겼다.       

창문을 열자마자 시야를 가득 매운 엄청난 폭우가 나의 기대를 보기 좋게 무너뜨렸다. 황급히 창문을 다시 닫았는데도 빗방울들이 제법 방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수건으로 그 찰나에 방바닥에 생긴 자그마한 웅덩이를 닦아내고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짓던 나는 일단 목욕을 하기로 마음먹고 욕실로 향했다. 어젯밤 침대와 마찬가지로 욕실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고, 뜨거운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근 후에야 연결된 그 두 가지 생각의 발원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외로워하고 있었다. 서율이 들어왔다가 나간 자리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 새로운 땅에 오자마자 그리움을 느끼다니.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나는 누군가를 옆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일까. 뜨거운 증기 안에서 나는 나의 외로움의 잔영을 보았고, 잠시나마 그 증기 안에서 누군가의 인영을 본 것도 같았다. 나는 한동안 머리를 뒤로 젖히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다보았다. 

목욕이 끝난 후, 공항에서 샀던 가이드북과 조그마한 노트를 펼쳐놓고 갈 만한 곳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비가 저렇게 오니 당장은 돌아다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오후에는 비가 개지 않을까.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아침부터 먹어볼까. 짧은 베이지 색 면바지에 흰색 난방을 입고 간단한 소지품을 챙긴 후에 문을 열고 나섰다. 마침 문을 열자마자 복도에서 어제 나의 체크인을 도와주었던 직원을 만났다. 그는 내게 잘 잤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아주 잘 잤다고 대답했고 곧이어 그에게 밖에 내리고 있는 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비가 언제쯤 그칠까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가 활짝 웃으며 대답하기를

“아. 비는 이미 그쳤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엄청난 폭우가 그 사이 멈췄다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지켜보던 그가 슬며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아마 믿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마침 조식을 드셔야 될 시간이시기도 하니까, 식당 위치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가시면서 직접 확인하시면 될 거에요.”

짙은 갈색의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에는 나처럼 조식을 먹기 위해 이제 막 방을 나온 사람 몇몇이 있었는데, 그 직원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하자 내 뒤로 사람들의 줄이 늘어섰다. 우리는 천천히 그 직원을 따라 일 층으로 향했다.          

일 층에 있는 티핀룸에서 조식 뷔페를 진행 하고 있었다. 흰색의 깔끔한 식탁보가 깔려 있는 테이블에 삼 단 티어가 놓여있었고, 과일이나 딤섬은 뷔페식으로 즐길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홀 가운데에는 커다란 하프가 놓여 있어 식사를 하는 동안 아름다운 음악과 멋진 정원을 감상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백 팩에 생수와 노트, 가이드북과 카메라를 집어넣고 방을 나섰다. 호텔을 나서며 직원에게 아까전의 기상 현상에 대해서 물었다.

“‘스콜’이라고 부르는 현상입니다. 여기서는 흔한 일이지요. 여행하시다가 비를 만난다 하더라도 크게 걱정 하실 것은 없습니다. 순식간에 엄청난 양이 쏟아지는 아주 강력한 비지만 금방 그치거든요. 어느 건물에서 연인과 키스를 하며 기다릴 수 있는 정도죠.”

나는 잠시 서율을 떠올렸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일단 이 층 롱 바 앞에 마련된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배낭에서 어젯밤 잠들기 전에 훑어본 가이드북과 노트를 꺼내어 흥미로운 장소들을 찾아보았다. 

주롱 새 공원. 멀라이언 공원. 센토사 섬, 정도가 먼저 눈에 띄었고, 나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멀라이언 공원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았다.

‘싱가포르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멀라이언은 상반신은 사자, 하반신은 물고기로 되어 있는 동물로 싱가포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전설에 의하면 싱가포르에 엄청난 태풍이 다가왔을 때 바다에서 멀라이언이 나와서 그 태풍을 막아주었고, 그 후로 사람들은 멀라이언을 기리기 위해서 석상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멀라이언 파크는 싱가포르를 찾은 사람들은 꼭 한 번씩 들리는 명소이다. 강과 바다의 접점에 위치해 있고, 거대하고 장엄한 멀라이언 상이 물을 내뿜는 모습은 아주 시원한 느낌을 준다. 거대한 머라이언 상 뒤편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작은 머라이언 상이 하나 더 있다.

MRT 래플즈 플레이스 역 근처에 있음.’     

가이드 북에는 멀라이언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입을 크게 벌리고 우렁차게 포효하는 사자의 상체와 물에 빛나는 비늘을 가진 멀라이언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한국의 장승을 닮아 있었고, 나의 호기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나는 오늘 첫 번째 행선지를 멀라이언 파크로 정하고, 짐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나는 호텔 입구에 서서 배낭을 열고 휴대용 여행 가이드북을 꺼냈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책으로, 주요 관광지와 도로 등이 요약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이동 중에는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었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멀라이언 파크는 내가 있는 래플즈 호텔에서 동남쪽으로 약 두 블록 정도 떨어진 다리 건너편에 있었다. 나는 멀라이언 파크로 가는 길을 대충 기억해놓고 휴대용 가이드북을 뒷주머니에 꽂고, 호텔 정문을 나섰다.

스콜이 한 차례 지나간 싱가포르의 거리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아직 채 개지 않은 회색 하늘 아래 도로 군데군데에 생긴 제법 큰 물웅덩이는 눈에 보일 만큼 빠르게 줄고 있었고, 그 위로 아지랑이가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아지랑이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여행이 시작되었다.     

싱가포르의 한낮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더웠다. 물론 내가 살다온 한국의 여름도 꽤나 더웠지만 다소 끈끈한 습기가 흐르는 여름과는 다른 느낌이랄까. 오직 강렬하게 순수한 햇빛만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저 높은 하늘로부터 내리쬐는 열기와 그 열기를 반사하는 대지 사이에서 조금씩은 녹아있었고 녹아있는 사물들은 조금 더 순수해지고 솔직해지면서 본질에 대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곧, 그 강렬한 열기가 그 생각마저 녹여버렸고 나는 곧 걷는 것에 대한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계속해서 걸었다. 걷고 풍경을 살펴보는 것 말고는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가끔 생각나는 시린 과거도 곧 강렬한 열기에 녹아버렸다. 그것은 확실히 지금까지 싱가포르에서 겪은 일 중 제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 뜨거운 나라에서 나는 조금씩 내 자신에게 집중해 가고 있었다. 내 몸과 마음을 감싸고 있던 불순물들이 끈끈한 땀으로 녹아내리며 나는 화로 속의 철처럼 좀 더 순수한 것으로 제련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블록 가운데 쯤,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수레 하나를 발견했다. 수레에는 ‘1 piece = 1 dollar’ 라고 적힌 자그마한 팻말이 꽂혀 있었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레 안쪽에서는 앞치마를 한 청년 한 명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고, 호기심이 동해 수레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광경을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그 청년이 만드는 것은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님이 얇고 네모난 모양의 바삭한 과자와, 약간은 두터워 보이는 갈색의 식빵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수레 안쪽에 준비된 여러 가지의 직사각형의 아이스크림 중에 하나를 그 사이에 끼워서 판매하고 있었다. 청년에게서 아이스크림을 받은 사람들의 표정이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다. 

곧 내 차례가 왔고, 나는 지갑을 뒤적여서 환전해 두었던 싱가포르 달러를 꺼내 청년에게 내밀고 비스킷과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청년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이스크림을 꺼내  비스킷 두 개 사이에 끼워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한 입 물었다. 비스킷이 부서지는 바삭-.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단맛의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품고 있던 서늘한 냉기가 입 안에서 짜르르 하고 퍼졌다. 그 기분 좋은 차가움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퍼졌다. 

아이스크림 트럭을 지나 계속 걸었다. 길은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고 나는 목적지가 있었다. 

계속해서 길을 걷다가 문득 바다 특유의 냄새가 느껴졌다. 짠 내와 비린내가 미묘하게 섞여 있는 그 냄새.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저 앞 쪽에 바다와 지평선이 보이기 시작했고, 조금 못가서 커다란 석상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라이언 파크에 도착했다. 커다란 하얀색 멀라이언 석상이 입으로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고 있었고 멀라이언 동상 앞에 펼쳐진 ‘마리나 베이’ 라는 이름의 강 건너편에는 두리안을 닮은 외관과 싱가포르의 대표 종합 예술단지로 유명한 에스플러네이드와 건물 옥상에 유연한 곡선 모양으로 지어진 수영장으로 유명한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이 보였다. 

석상 주위에는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멀라이언과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온갖 언어들이 주위에서 날아들었고, 중간 중간에 귀에 익은 한국말도 들렸다.

유명한 관광지라고 해서 미리 예상은 했지만,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지금의 내겐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최대한 빨리 사진을 찍고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멀라이언 동상의 사진을 찍기 위해 렌즈를 들이댔다.

조심스럽게 초점을 맞추고, 밝기를 조절하던 나는 멀라이언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카메라를 좀 더 확대했다.

그 순간, 멀라이언이 나를 쳐다보았다. 멀라이언의 회색 눈동자가 내 눈을 관통하고, 그 안의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저 렌즈 안에 비춰진 그 명징한 눈동자를 바라볼 뿐 수밖에 없었다.

오감이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일 분 일 초가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쪼개지며 시야가 좁아졌고, 나의 세계 안에는 오직 나와 멀라이언만이 존재했다. 내가 쉬는 들숨과 날숨, 내가 흘린 땀의 끈적임, 나의 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쿵-. 쿵-. 쿵-. 박동이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잠시 후에,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영감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예언이었다. 나는 이곳. 싱가포르에서 내 인생의 방향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할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멀라이언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세상의 초침이 다시 자신만의 속도를 찾았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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