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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14.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5-

열기의 도시 -2-

멀라이언 파크를 벗어나 손목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시계는 이제 정오를 가리켰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의 화살들이 피부를 관통할 기세로 날아들고 있었다.

마침, 멀라이언과의 일도 있고 해서, 나는 시야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카페로 들어서자마자 강렬한 에어컨의 냉기가 나를 맞았다. 하루 내내 지속되는 강렬한 열기 때문일까. 싱가포르의 건물들은 냉방 설비가 상당히 잘 되어 있는 덕분에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곧 몸을 감싸고 있던 끈끈한 땀들이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연유와 원두커피가 섞인 달콤하고 짙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어진 나는 엉덩이를 쭉 뺀 상태로 반대편 의자에 다리를 걸치고 투명한 유리창 저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멀라이언 석상을 바라보며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문득 더위로 지쳐있었던 육체가 서늘한 바람과 편안한 의자를 만나자 휴식을 요구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대한 멀라이언이 새끼 멀라이언을 데리고 해가 지고 있는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끝이 갈라진 그들의 꼬리가 황금색 해변위로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꼬리 아래서 석양에 젖은 파도가 해변을 쓰다듬었다. 눈물을 흘리는 해변을 뒤로 하고 파도는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잠시 후, 새끼 멀라이언과 산책을 하던 큰 멀라이언이 해먹에 누워 있던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안녕하신가. 왕자의 후손이여.”

나는 멀라이언들과 해변을 거닐었다. 곧 밤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나갔다. 파도 위에 뜬 달빛이 영롱하게 해변을 비추었다. 모래들은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황홀하게 빛났고, 나는 멀라이언과 있었다.

“왕자의 후손을 보는 건 오랜만이군.”

멀라이언은 저 멀리 바다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아주 먼 옛날에. 이곳에 왕자가 왔었네. 밝고 총명한 눈을 가진 사내였지.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을 보며 가슴 아파 했어. 그는 인간들에게 실망하고, 괴로워했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절망하고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고통의 구렁텅이에 던지며 자신을 비워내고 텅 비어버렸지. 그의 꿈은 인간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어. 인종과 문화와 관계없이 서로를 믿는 그런 세상을 꿈꿨네. 나는 그런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고,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나라를 세웠다네. 비록 자그마한 나라지만, 수많은 인간들이 모이면서 다양한 문화, 다양한 언어, 다양한 피부색들을 가진 인간들이 바다를 통해 오고 가며 무역을 했지. 그들은 왕자 아래 하나로 뭉칠 수 있었어. 

나는 그들이 탄 배에 축복을 빌어 주었고 왕자는 나를 위해 거대한 석상을 세워 축제를 벌였네. 나의 축복 덕분에 그들은 풍족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지.

우리는 행복했네. 나는 밤이면 밤마다 왕자의 꿈으로 찾아가 그와 이 해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었어. 자신의 꿈에 대하서 이야기 하는 왕자의 눈동자는 깊은 바다 속의 진주 보다 훨씬 아름다웠네. 나는 왕자가 좋았어. 

하지만 왕자가 하늘로 돌아가고 나자, 인간들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네. 그들은 더 이상 바다와 더불어 살려 하지 않았지. 그들의 관심사는 바다로부터 바다로 옮겨지는 반짝이고 값진 것들에게만 집중했지.

나는 그런 그들에게 축복을 더 이상 내리지 않았고, 그들은 길을 잃었네. 이제 바다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어. 그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서로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싸우고, 반목했지. 그들은 결국 나라를 뺏기는 수모까지 당했어. 자네는 왕자를 닮았어. 인간에게 실망한 인간의 눈동자를 가졌어. 하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그처럼 꿈을 꾸는 눈동자를 가질게야.” 

해변을 걷던 우리는 해변까지 밀려온 자그마한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새끼 멀라이언이 물고기에게 다가가 꼬리로 물고기리를 내리쳤다. 물고기는 필사적으로 새끼 멀라이언의 꼬리를 피해 다녔다. 나는 커다란 멀라이언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저 거대한 꼬리로 좀 도와준다면 한층 쉬울 것 같은데.

“믿는 것이지. 비록 처음은 미숙하더라도. 누군가 믿어준다면 애송이도 무언가를 해 낼수 있는 것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멀라이언의 장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멀라이언은 그저 새끼 멀라이언을 내려다 볼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 안에는 신뢰가 담겨있었다.

수많은 시도 끝에, 새끼 멀라이언의 꼬리가 물고기에게 명중했다. 새끼 멀라이언은 뿌듯한 표정으로 멀라이언을 올려다보았고, 멀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게. 믿음은 불완전 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네.”

말을 마친 큰 멀라이언이 바다로 뛰어 들어가자 풍덩-. 하고 큰 물보라가 일었다. 급작스럽게 일어난 커다란 물보라를 미처 피하지 못한 나는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얼굴에 무언가 차가운 게 느껴졌다. 눈을 뜨니 갈색의 유니폼을 입은 젊은 카페 여직원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축축하게 젖은 내 얼굴과 티셔츠, 바닥을 구르고 있는 플라스틱 컵으로 추측하건데, 아마 이 직원은 찬 물이 든 컵을 옮기다가 실수로 내 얼굴에 끼얹은 듯 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조금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테이블에서 일어나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꿈을 꾼 것 같았다. 자그마한 기억의 기포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해변. 멀라이언. 왕자. 꿈. 새우. 그리고….

멀라이언이 내게 무언가를 말했었다. 바다 속 진주보다 더 빛나는 것. 불완전한 것을 완벽하게….

나는 카페를 나와서 앞으로 쭉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이드북은 꺼내지 않았다. 걸으며 길가에 있는 가게를 구경하고, 물건을 만져보고, 맘에 들면 사서 백 팩에 넣고, 가게 주인과 이런저런 잡답을 하면서 웃고, 다시 길을 걸었다. 

걷다 지쳐 정신을 차려보니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해는 하늘에서 사라졌고, 네온사인이 밤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크고 밝은 달이 자리 잡은 밤하늘 아래 영문으로 써 있는 ‘차이나타운’이라는 간판이 밝게 빛났다.

저녁은 중국식 샤브샤브를 먹었다. 가운데 철판이 박힌 커다란 냄비에 맑고 담백한 닭 육수와 매콤한 냄새가 나는 붉은 색의 돼지고기 육수. 총 두 가지의 육수를 담아온 직원이 가게 가운데에 비치된 고기, 해물, 야채 등이 가득 들어있는 통을 가리키며 재료를 가져와 데쳐먹으라는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표시를 하고는 소고기와 야채, 게 등을 가져와 뜨거운 육수에 그것들을 데쳐 먹었다. 

얇게 저며진 소고기를 뜨거운 닭 육수에 데쳐 먹으며 문득 같이 먹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또 외로운 건가. 모든 것을 잊고 버리고 나 홀로 있고 싶어서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나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광객이나 현지인 모두 가족 내지는 연인,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난 철저히 혼자였다. 외로움에 괜스레 캔 맥주 하나를 주문해 마셔보았지만, 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달궈주는 취기도 외로움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와 담배를 하나 빼물어 불을 붙였다. 파란색의 담배 연기를 공기 중에 흩뿌렸다. 파란색 연기는 공중을 잠시 정처 없이 돌다가 사라졌다. 나도 언젠가는 아무에게도 맞닿지 않은 채로 저렇게 사라지지 않을까. 덧없이 세상을 헤매다 그저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그 날 래플즈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몇 개비의 담배를 폈었고, 누군가가 길에서 말을 걸어주길 바랬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다음날, 조금은 늦게 일어났다. 어제 여행에서 지친 것 보다 그 잠시의 외로움이 밤이 지나도 여전히 잊히지 않았다. 서율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가 나간 후에 생긴 그 쓸쓸하고 허기진 공간은 또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그 차가운 냉기가 나를 아직 그 겨울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나는 싱가포르의 강렬한 열기라면 그 냉기를 몰아내는 것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고 백 팩을 챙겨 방을 나섰다. 

옷을 대충 입고 숙소를 내려오는 길에 만난 호텔 직원이 추천한 야쿤 카야 토스트라는 카페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기로 했다.

버터를 바른 토스트와 물에 중탕으로 익힌 수란, 그리고 싱가포르 식 커피가 테이블에 놓였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까. 입가에 묻은 버터를 핥아 먹으며 생각에 빠졌다. 

어제는 충분히 방황 했으니, 오늘은 뭔가 특별한 것을 해보기로 했다. 싱가포르는 특별한 것을 하기 충분히 적당한 장소였다. 나는 백 팩에서 가이드북을 꺼내 오늘의 행선지로 선택할 만 한 곳을 살펴보았다. 

가이드북을 살펴보던 나는 어제 보았던 멀라이언 파크에 있는 멀라이언 보다 더 큰 멀라이언이 있다는 센토사 섬으로 가보기로 했다.

센토사 섬을 이동하는 수단은 우리나라의 지하철에 해당하는 MRT, 버스, 그리고 케이블카가 있었다. 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기로 하고 가이드북의 안내에 따라 MRT로 하버 프론트 역 까지 이동한 후에, 곳곳에 보이는 직원들에게 길을 물어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 정거장은 매우 한산했다. 표를 확인하는 직원 한 명이 부채질을 하며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내가 표를 내밀자 손가락으로 케이블카를 타는 곳을 가리켰다.

섬으로 이동하는 케이블카 안에서, 나는 싱가포르의 도심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파란색의 바다가 도심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아름다운 빌딩들 사이에서 건설 중인 빌딩들이 오밀조밀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빌딩들 위에서 자그맣게 보이는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내가 탄 케이블카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조용한 경음악이 흐르던 케이블카 내에 잠시 후에 센토사 섬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나는 내 옆자리에 내려 두었던 백 팩 을 다시 어깨에 둘러메고, 케이블카가 정거장에 안전하게 멈추기 까지 기다린 후에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케이블카에서 내렸다.  

센토사 섬은 하나의 거대한 테마파크였다. 섬 안에 위치한 세 개의 정거장을 따라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늘어서 있었다. 멀라이언 타워는 그 거대한 크기 덕분에, 다른 표지판이 없어도 찾기 쉬웠다. 약 삼십칠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멀라이언 석상을 바라보자 지난 번 카페에서 꾸었던 꿈이 희미하게 생각났다.  

멀라이언 타워는 싱가포르에서 존재하는 멀라이언 중에 제일 컸다. 일 층에는 멀라이언과 싱가포르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자그마한 박물관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이어져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 할 수 있는 십 층에서는 멀라이언의 입과 머리에 해당하는 곳에서 센토사 섬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한참을 멀라이언 타워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 곳에서 멀라이언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왕자와 멀라이언의 인연과, 멀라이언이 싱가포르인들에게 지니는 의미는 상당히 흥미가 있었다. 멀라이언 타워 일층에 위치한 멀라이언 박물관에서 상영하는 멀라이언의 탄생 비화에 대한 애니메이션에는 한글로 된 자막이 나왔고, 나는 흥미진진하게 멀라이언과 왕자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몇 번이나 관람하다가 관람 시간이 종료되었다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타워를 나왔다. 타워를 나오니 어느덧 저 멀리 수평선 근처까지 해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조금 더 가까이 보고 싶어 해변으로 향했다. 

야자수에 걸쳐져 있는 해먹과 길가에 있는 조그마한 술집들. 아직은 지지 않은 초저녁의 해가 따스하게 비추는 모래사장으로는 깨끗한 파도가 잔잔하게, 때로는 강하게 밀고 들어 왔다가 조심스럽게 빠져나갔다.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이 아름다운 풍경은 내가 살던 세계와 조금은 먼 곳에 있었다. 그 안도감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나는 신발을 벗어 배낭에 넣고, 황금빛 모래사장을 향해 걸어갔다. 한동안 해변을 따라 걸었다. 아직은 따뜻한 모래사장에서 전해져 오는 열기가 기분 좋았다. 나는 경직되어 있던 얼굴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해가 지는 모습이 장엄해, 나는 왠지 모르게 코가 찡해지고, 눈이 아려왔다. 

해가 지고 나서는 해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해가 떠 있을 때 비추는 따뜻함과는 다른 느낌의 따뜻함이었다. 그 따뜻함을 타고 푸른색의 어둠이 얕게 퍼져가는 해변에서, 나는 문득 용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로소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물러가는 이곳에서. 나는 서율과 나를 용서했다. 놀랍게도 한 번 시작된 용서는 그동안 막혀왔던 감정의 둑을 허물고 폭포처럼 넘쳐흘렀다.

나는 백 팩을 끌어안고 해변에 앉아 울었다. 서율과 나의 기억을 담은 눈물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넘쳐흘렀다. 참 많이 그녀를 미워했었다. 그녀는 나의 신뢰를 부셔버렸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녀의 곁을 지키고 그녀가 내 곁을 지켜주기를 바랬다. 같이 웃고, 같이 먹고 자고, 나의 재능과 노력을 그녀에게 자랑하고 칭찬 받고 싶었다. 서율과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끌어안아 위로해주고 싶었다. 사라진 그녀의 아버지를 같이 찾아보고 싶었다.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를 내 작업실에 초대해 이웃들에게 받은 싱싱하고 좋은 채소들과 고기로 같이 만찬을 벌이고 싶었다. 얼음 두 개, 슬라이스 된 레몬을 넣은 위스키도 대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나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자신을 위해, 나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의 약속을 짓밟고 더럽혔다. 아아…. 나의 심장을 찌른 그녀의 냉기…. 그 냉기를 품은 겨울….

한참을 울고 나자 문득 어둠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고, 문득 시계를 쳐다 본 나는 센토사 섬에서 숙소로 출발하는 막차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기억해내고는 해변에서 일어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나는 분명 센토사 섬과 연결되어 있는 하버 프론트 역에서 출발하여 도비 고트 역을 거쳐 나의 숙소가 있는 래플즈 플레이스 역으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타고 있는 지하철이 클락 키 역에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위해 문이 열리는 그 순간 검정 원피스를 입은 서율이 에스컬레이터에 천천히 올라타는 모습을 보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허겁지겁 지하철을 내려 서율을 따라 가려 시도했으나, 덩치가 큰 서양인들과 인도인들에게 밀려 서율을 놓치고 말았다.

정신없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에스컬레이터를 서둘러 올라가다가, 한 노인의 등에 길이 막혔다. 나는 노인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노인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에, 에스컬레이터가 지상에 도착하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율은 어디 갔을까. 아냐. 만나봤자 할 말이 없어. 아냐. 할 말이 있어.      

너를 용서했다고.     

그러면 아마 서율은 이렇게 말하겠지.     

그래서?     

나는 문득 내 심장을 파고들던 서율의 냉기를 떠올렸다. 심장을 파고들던 날카로운 단검. 치명적인 냉기. 아파하던 내 육체. 몸부림치던 나. 부서진 내 작품들. 내 공방을 뒤덮던 눈.

하지만 가야한다. 결국 문장이 어떻게 완성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마침 점을 찍어야 한다.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로 향할 수 있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지하철의 출구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클락 키는 열기와 환락의 도시였다. 밤의 환상을 즐기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나는 형형색색의 간판들과 호객꾼들이 넘쳐나는 거리에서 서율의 흔적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서율의 검정 원피스는 열기로 들뜬 싱가포르의 밤하늘 사이에 녹아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이곳 특유의 열기와, 타국이 가져다주는 이질감에 휩싸여 내가 보고 싶은 환상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실루엣은 분명히 그 날의 서율과 너무나 똑같았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클락 키를 몇 번이나 돌았지만, 나는 서율을 찾을 수 없었다.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며 웃는 여자. 나긋하게, 또는 강렬하게 남자를 끌어당기는 여자. 여자는 너무나 많았고, 그 중 대다수의 여자는 서율처럼 매혹적인 여자들이었다. 마치 커다란 하나의 서율이 흩어져, 수많은 서율들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나는 서율을 찾는 것을 잠시 멈추고, 길거리에 배치되어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아 클락 키의 중심을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나니, 열기로 들뜬 마음이 가라앉았다. 설령 그 실루엣의 주인이 서율이라 하더라도 내 시야를 교란하는 현란한 밤거리의 네온사인들과 그 길거리의 가득 찬 여자들 속에서 서율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할 것이다. 
 한 바퀴만 더 돌아보자. 나는 다 피운 담배 개비를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고, 다시 한 번 클락키의 중앙에 시선을 던졌다. 그때, 나의 팔꿈치에 여자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느껴졌다. 놀란 나는 고개를 빠르게 뒤로 돌렸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풍만한 가슴, 그리고 눈처럼 새하얀 흰 피부를 가진 서양인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안녕.”

서율을 닮았다. 하지만 분명 서율이 아니다. 나는 왠지 모를 허탈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여자는 망설임 없이 엄청난 말을 나에게 던졌다.

“나랑 호텔로 가자.”

“…?”

나는 크게 당황했다. 이 여자는 뭐지? 내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여자의 푸른 눈동자가 더욱 가깝게 내 얼굴로 다가왔다.

“왜지?”

“음…. 네가 맘에 드니까.”

갑자기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 여자는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자연스러운 표정이 아니다. 서율의 미소를 닮아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다가오는 사람의 표정이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넌지시 물어보았다.

“돈이 필요한가?”

내 말에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호텔 방에 가서 이야기 해.” 

…. 나는 여자로부터 등을 돌렸지만, 등 뒤로 서늘하고 날카롭게 따라오는 여자의 시선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자의 시선을 피해 인파 사이에 숨기로 했다. 여자의 시선은 희미해지다가, 다시 강렬해지다가를 반복했다. 내 등에 어떤 징표를 박아 넣었는지 몰라도 여자의 시선은 나를 쉽게 놓치지 않았다. 

클락 키 전체를 서둘러 한 바퀴 돌았는데도 여자의 시선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고, 나는 서율을 찾아야 했기에, 클락 키를 떠날 수 없었다.

점점 여자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붙잡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 깊은 곳에서 조금씩 머리를 들기 시작하는 욕망이 나의 이성을 넘어 설 때를. 내 스스로 그녀를 찾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기가 가득한 이 클락 키에서 나의 이성은 시시각각 약해지고 있었고, 클락 키는 여자의 홈그라운드였다. 

서율과의 사건 이후로, 시시때때로 위험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 욕망과 대치하곤 했었다. 성숙한 여인의 유려한 곡선을 지닌 여체를 볼 때면, 가끔 머리가 멍할 정도의 불길이 내 몸을 덮쳤다. 나도 모르게 하체에 힘이 쏠렸고, 그만큼 머리는 몽롱해졌다. 서율은 그날 밤 한 번으로 내 몸 안에 잠들어 있던 욕망을 일깨웠고, 그녀가 내 곁을 떠난 후에는 그녀의 빈자리를 욕망이 채우고 있었다. 늘 내 곁에 존재하며 번뜩이는 눈빛을 하고 있는 그것은 언제든지 나를 넘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욕망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골목길에 위치한 사람이 북적거리는 주점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코너를 돌아 가게에 가득 찬 사람들 사이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양해를 구하며 땀에 젖은 덩치 큰 서양인들 사이를 비집고 무작정 앞쪽으로 나서서 제일 앞 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 여자가 나를 눈치 채기 힘들도록 입구를 등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는 벽의 역할을 해줄 것이고, 운이 좋다면 그 여자가 나 말고 다른 먹잇감을 포착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직 여자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안도했고 그와 동시에 들끓던 욕망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 때, 어떤 여자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옷차림으로 보아 이 주점의 종업원인 것 같았다.

약간 졸린 눈을 한 종업원이 놀라움에 커다랗게 변한 내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주문을 받았다.

“주문하시겠어요?”

나는 주위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손님이 안주 하나에 맥주 한 잔 내지는 두 잔을 시켜놓고는 무대에 시선을 고정시켜놓고 있었다.

음. 술 한 잔과 안주 하나 정도면 그 여자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대가치고는 상당히 저렴한 것이 아닐까. 나는 종업원이 들고 있던 메뉴판에서 눈에 띄는 대로 맥주와 안주를 시켰다.

“음…. 필스너 한 잔과 닭 날개 튀김이요.”

주문한 필스너 두 잔이 먼저 나왔다. 두 잔? 나는 테이블에 놓인 계산서를 확인하고, 종업원을 불렀다. 잠시 후에 종업원이 하얀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저는 필스너 한 잔을 주문했는데. 두 잔이 나왔네요.”

“이벤트 중이라 한 잔은 서비스입니다.”

종업원이 무심하게 대답하고, 테이블에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고는 다시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테이블로 얼굴을 돌리자 접시에 담긴 갈색으로 잘 익은 닭 날개 들이 둥그렇게 열을 짓고 누워서 먹음직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갓 조리된 뜨거운 닭 날개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를 맡자 갑자기 식욕이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나는 센토사 섬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일단 허기를 채우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무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아무래도 잠시 후에 공연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닭 날개를 거의 다 먹었고, 맥주잔도 한 잔을 거의 다 비웠다. 포만감과 약간의 취기. 그리고 아직도 여자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던 덕분에, 나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어떤 무대 일려나. 나의 정신은 이제 나를 쫓던 여자에서, 무대로 조금씩 향하고 있었다. 그 때

구릿빛의(그 여자가 아니구나. 나는 안도하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테이블에 위에 조심스럽게 나타났다. 나는 방금 마지막 한 모금으로 다 비워 버린 필스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멍하니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뚜렷하진 않지만 매력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였다. 조금은 작고, 눈 끝이 살짝 처진 눈과 날카롭지는 않지만 살짝은 도톰하면서도 끝이 올라간 코. 자주 웃는 것인지 꼬리가 살짝 올라간 입.

얼굴만 보자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얼굴과 상반되는 대담하게 들어가고 나온 상체의 굴곡이 성인 여성의 매력을 어필하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와 분위기를 종합했을 때 아시아계의 여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는 그녀의 국적을 추측하기 시작했다. 중국? 일본? 태국?     

“실례.”

놀랍게도 한국말을 한 여자는 아직 채 손대지 않은 잔에 손을 뻗어 기세 좋게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커다랗게 눈을 치켜 뜬 나를 뒤로하고 망설임 없이 앞쪽에 있는 무대로 향했다.

무대에 발을 내딛기 전, 내 쪽을 돌아본 여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어둡고 깊은 그 눈 속에 열기를 가득 담은 싱가포르의 밤하늘을 담은 것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 

여자가 무대에 발을 내딛자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주점을 가득 메웠다. 여자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제법 있는 낡은 하얀색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몇 번 건반을 치면서 목을 가다듬는 그녀. 어느새 나는 팔짱을 끼고 뒤로 몸을 젖힌 채 그녀의 모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노래를 시작했다.      

내가 있던 곳은 네 개의 계절을 가진 아름다운 반도

봄이면 새 생명들이 따듯한 대지 안에서 한껏 기지개를 켜고

여름이면 생명력을 과시하는 눈부시게 우거진 녹음이 산을 아름답게 수놓는

가을이면 나부끼는 단풍과 함께 조용하고 겸허하게 삶을 내려놓고

겨울이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 아래서 빈손으로 다가올 경이로운 봄을 준비 한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그 곳

언젠간 돌아갈 그 곳나의 아름다운 나라.     

느린 템포의 노래였다. 서두르지 않는 그녀의 발성과 피아노 반주가 여유를 가지고 마음까지 스며들어왔다. 계절을 표현하는 가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 계절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변화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이 좋았다. 

그녀의 노래는 경이로웠다. 저 몸에는 음악의 원천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녀와 무대는 둘이 아닌 하나였다. 그녀와 음악 사이에는 어떠한 것도 없었고 곧 노래가 그녀였고, 그녀가 곧 노래였다. 음정은 정확했고, 성량은 풍부했으며, 감정은 과하지 않게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내가 살던 공방의 풍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따뜻한 바람이 부는 봄이면 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심스럽게 싹을 틔워 올리는 새싹들. 그 새싹들 위에서 그 남자를 만났었지. 여름이 되면 더운데 이거 좀 먹어보라며 직접 키운 수박이나 참외 등을 싸들고 공방을 찾아오던 인심 좋은 동네 사람들.

쓸쓸하게 부는 바람에 휘날리는 단풍들 아래서 만든 작품과 나를 찾아온 서율. 그리고 겨울…. 

눈을 감았다. 어딜 가나 서율이 있었다. 그녀는 심장을 노리는 암살자처럼 내 안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서율이 남긴 냉기에 가슴이 아파왔다. 나는 벅차오르는 목울대를 숨기고자 고개를 숙였다.

다소 짧은 느낌의 곡이 끝나고. 이어진 사람들의 박수가 끝나자, 그녀는 유명한 팝송 몇 가지를 불렀다. 분명 훌륭하게 곡을 소화하고 있었으나 왠지 처음 부른 노래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아름다웠으나 아까전의 순수한 아이의 모습보다는 잘 꾸며 놓은 인형 같은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서율의 기억을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도중, 내 앞에 어느새 무대에서 내려온 여자가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여자는 다시 한 번 한국말로 내게 말을 걸었다.

“당신. 한국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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