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Shadow Money 18화

18. 다시, 시작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by J이렌

2023년 다시, 시작

2. macao one nigh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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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첫날


2023년 여름, 인천공항 — 제이미


서울은... humid, hot, crowded.


공항 출구 앞.


자동문이 열리고,


데이지와 제이미가 나란히 나온다.


제이미는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캐리어를 질질 끌고 있다.


낯선 언어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웅웅 귀에 들어온다.


처음 내디딘 이 낯선 도시의 공기는 끈적했고, 시끄러웠고, 뭔가 갑갑했다.


루체른의 조용한 호숫가와 나무 냄새에 익숙해져 있던 제이미에겐,


모든 게 too much였다.


‘대체 왜,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야 했던 걸까.’


엄마는 말없이 가방을 메고 앞장섰다.


그 뒷모습은 언제나처럼 단단했지만, 오늘따라 더 멀게 느껴졌다.


제이미는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켰다.


루체른에 두고 온 여자친구 쥴리아, 옆집 베스트프렌드 데이비드.


바로 영상통화를 걸려다 시차를 생각하고 그냥 전원을 꺼버렸다.


'... 지금은 자고 있겠지. 괜히 더 우울해지네.'


입구 앞.


어디서 본 듯한 얼굴들이 서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의 할아버지,


그리고 정갈한 양복을 입은 외삼촌이 기다리고 있다.


할아버지는 눈가에 미소를 띠며 다가온다.


“데이지야··· 잘 왔다.”


데이지가 짧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다.


제이미는 인사 대신 짧게 눈을 마주친다.


낯설다.


그리고 어딘가··· 공기가 다르다.


“할아버지! 삼촌!”


엄마가 어설픈 한국어로 외치며 뛰어갔다.


그 두 사람은 웃으며 데이지를 끌어안았고, 곧 제이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반갑긴 한데, 그냥··· 피곤하다.’


공항에서 나와 서울 외곽에 위치한 외가댁으로 향하는 차 안.


제이미는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내다봤다.


서울의 하늘은 스위스와 달랐다.


차 안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다.


밖엔 서울의 고층 건물과 한글 간판들.


제이미는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생각한다.


탁했고, 흐렸고, 회색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건물들은 빽빽했고, 간판은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로 가득했다.


모든 게 어수선했다. 산만했고, 낯설었다.


‘나··· 여기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손목에 찬 아버지의 시계가 반짝인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


엄마 말을 잘 듣는 아들이 되라고 했어.


지금은 그 말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착한 아들이 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제이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아빠. 노력해 볼게요.”


2023년 여름, 데이지


홍콩의 그림자, 마카오의 기억


공기가 여전히 눅눅했고, 그늘이 더 진해 보였다.


구룡반도 남쪽, 침사추이.


반짝이는 고층 빌딩 사이, 금융 거리 특유의 긴장감이 흘렀다.


데이지는 3년 만에 돌아온 이 도시에서, 예전보다 조금 더 조용해진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면 IFC 타워와 ICC 타워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 빅토리아 하버는 여전히 조용히 출렁이고 있었다.


이번 출장의 목적은 간단했다.


FBI의 비공식 외부 자문으로, 홍콩 소재 한 ‘위장 자산 운용사’의 자금 흐름을 확인하고,


그 조직이 북한계 기업과 어떤 접점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단기 파견.


삼박 사일.


정해진 미팅, 정해진 식사, 정해진 보고서.


그런데, 이틀째 밤이 되자 데이지는 충동적으로 호텔을 나섰다.


홍콩 미션은 예정보다 하루 일찍 끝났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그녀는 마카오로 페리를 탔다.


현지 요원들에게는 "내일 일정 준비로 호텔에 머물겠다"라고 말한 뒤,


혼자 페리를 탔다.


마카오로.




[마카오 / 성 바울 성당 유적]


마카오의 밤은 길고, 조용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계단 위로 가늘게 조명이 비치고 있었고, 성당 잔해만이 고요하게 남아 있었다.


"여기··· 기억나, 아더?"


아무도 없는 유적 앞에서, 데이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2005년 신혼여행 때, 아더와 함께 이곳에 왔었다.


밤하늘 아래서 사진을 찍고, 계단 위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셨던 기억.


그때 아더는 환하게 웃었고, 그녀도 웃었다.


그건··· 마지막으로 온전했던 기억이었다.


그 자리에 홀로 앉은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밤공기는 따뜻했지만, 마음속 어딘가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땐··· 우리가 영원할 줄 알았어."



성당 유적 위 바람은 더운 듯 차가웠고,

그녀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그건 외로움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었다.
단지—

살아 있다는 걸 다시 증명하고 싶었던 몸의 진동.


그녀는 처음 보는 남자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고,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마음의 문 하나를 열었다.


호텔 복도,

걸음을 멈추려던 그를

그녀는 말없이 붙잡았다.
“가지 마요.”

입술 대신, 눈으로 전한 말.


문이 닫히기도 전에

그의 품 안으로 녹아들었다.

입김이 스쳤고,

낯선 체온이 그녀의 기억을 밀어냈다.


그 밤은 숨죽인 울음 같았다.

격렬하지도, 거칠지도 않았지만

감정은 가만히 부서졌고

몸은 아주 조용히 흔들렸다.


그는 말이 없었다.

그녀도 묻지 않았다.

그냥 서로가 서로를 지금만 필요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새벽—
그는 사라졌다.


침대 옆, 흰 메모 한 장.
‘당신을 안았던 이 밤은 내 전부였어요.
다시는 보지 않겠지만, 잊지도 못할 겁니다.’


그녀는 그 쪽지를 손끝으로 접었다.
서랍 깊숙이 넣으며,
그 밤을 기억이 아닌 감각으로 봉인했다.


며칠 후,
몸이 이상해졌다.
생리는 오지 않았고,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나왔다.

테스트기 위에 선명한 두 줄.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사랑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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