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무역
김 재운
무역은 보이는 상품의 교환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 즉 기술 및 용역과 같은 무형자본의 이동까지도 포함한다.
#1
오랜 시간을 고민했지만 후회는 남는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수는 없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회사를 그만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타인에게서 손가락질받을 일도 아니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불안들을 술로 눌러 내리고 내린 술들을 다시 식도를 통해 올려 게워내는 날들이 많았다. 변기통에 얼굴을 박고 있노라면 내 꼴이 참으로 우스웠고 우울했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한 날의 마음속 환멸은 입사하던 날 ‘방판’ 강북 본부장에게 내가 받았던 환대보다 강렬했다. 들어오는 마음과 나가는 마음은 항상 다르고 그것은 비례, 반비례 따위의 정확한 규칙 같은 것이 없다. 그것은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였다. 내 마음이 항상 영예로운 다음을 기약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불가능의 영역이다. 정작 나는 젊은 꼰대인지라 내 주변에 공무원을 준비하는 이들을 보면 혀를 끌끌 찼고, 인생은 한 번뿐이라며 여행사진을 올려대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나기도 했다. 남의 도전은 고전하기를 바라왔던 것도 사실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라는 대 전제 속에서 나는 나만의 먹고살 방법이나 방식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행복은 저 멀리 있었다. 내 주변은 맴돌지는 않았다. 완연한 만족, 이상적인 현실 같은 단어들은 내 안에서 심각한 부조리로 판명되고 나에게 부적격한 사회의 행복과 같은 단어의 형상들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괴로웠고 외로웠다. 술을 마시면 욕이 툭 하고 튀어나오곤 했다.
방문판매 영업을 줄여 ‘방판’이라고 한다. 업계에서는 속칭 방판을 뛴다고 한다. 고객과의 예약된 약속이나 일정 없이 무작위로 방문하여 그 날의 기분과 리듬에 맞추어 영업을 하는 것이다. 그 날의 기분과 기운에 주간 단위의 영업실적이 오르내리기도 하고 슬럼프에 빠진 선배들을 보면 한 달씩 죽을 쑤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의 최전선에 서있는 그런 일이라고 나 할까. 벼룩시장과 같은 무가지에 광고할 소규모 업주들을 찾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본부장은 각자의 성과를 매주 월요일 사내 벽보에 게재하곤 했다. 방판을 뛰면 겪게 되는 창피함과 여러 가지 다채로운 상황들은 사실 설명하기 쉽지 않다. 우선 창피함에 대하여 썰을 풀어보자면 제대로 된 돈벌이를 하고 있지 못한다는 본인 스스로에 대한 1차적인 쪽팔림과 업주들을 만나서 무엇이든 하나 팔아야겠다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외면될 때의 2차적인 쪽팔림, 그리고 말 그대로 명함을 내밀면서 팔리는 나의 얼굴까지 3차적인 쪽팔림.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괜찮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도 경기도 즉 수도권 4년제 대학교 졸업장은 마지막 자존심의 보루였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가끔 후회는 되었다. 남들은 뭐 빠지게 공부할 때에 나는 그러지 못했다. 미술 입시를 준비했던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 미술 입시를 포기하고 일반 수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미대를 졸업해도 밥벌이를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담임선생님과의 진로 상담에서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 버렸다. 물론 선생님은 학생 개개인의 인생을 책임지지는 않았다. 책임을 지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 결과, 나는 경기 4년제 대학교 졸업을 하고 방판을 뛰었다. 그리고 그 방판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제 1의 수치심이었다. 개처럼 뛰었지만 진짜 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09학번 동기들 중 우리 학과 학생회장 출신인 K는 사교성이 좋았고 성적이 우수했다. 동기들보다 1학기를 선 졸업했고 교수님들과도 제법 안면이 있는 편이었다. K는 술을 잘 마셨고 술값을 잘 냈고 밤에는 학교 앞 주점에서 늘 술에 취해 있었다. K와는 1학년 첫 MT에서의 인연을 시작으로 연락이 끊어질만하면 서로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 내가 연락하는 몇 안 되는 대학 동기 중 하나였다. 그런 K에게서 문자가 왔다. 승혁아 요즘 쉬고 있다며. 나는 대답했다. 일자리 알아보는 중이다. 짧은 몇 통의 안부가 오고 간 뒤에 K는 내게 이영복 교수님이 무역회사에 추천할만한 학생을 찾고 있다고 했고 이력서를 보내면 연결해주겠다고 했다. 이 영복 교수님은 무역학과 내에서 뿐 아니라 무역 업계에서도 평판이 좋기로 소문난 교수님이었고 나에게 지체할 마음 같은 것은 없었다. 다음 날 저녁 채용 중인 무역회사의 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이력서를 검토하였으며 간단히 일면식을 가지면 좋겠다고 제안을 주었고 거절할 입장이 아닌 나는 그 주 목요일에 일산에 위치한 중식 집에서 뵙겠습니다 라고 빠른 회신을 보냈다.
#2
이 영복 교수의 추천이 있으니 나는 거진 합격이라고 생각했다. 여자 친구 L에게 문자를 보내어 이번 주 면접 소식을 알렸다. 정해진 것은 없으나 도서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학교는 왜인지 더 이상 머물면 안 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해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과 누군가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그곳에 머문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졸업과 취업과 직업, 업은 무엇이기에 왜 이리 나를 지리멸렬한 인간으로 만드는지 알고 싶었다. 불안과 불만을 입 안에서 볼을 만들어 돌리고 있었다. 뱅글뱅글. 그 원인과 결말 인과와 상관관계 따위를 파헤쳐 부수고 싶었다. 나는 K를 불러내어 학교 앞 주점으로 갔다. 우리는 막걸리와 파전을 앞에 놓고 이 영복 교수에게 나를 무어라고 추천했는지, 너와 나의 관계를 무엇으로 설명했는지, 이 교수님은 수업시간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를 기억은 하시는지, 등을 캐물었고 K는 술값을 내고 안주를 시키는 만큼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술이 이내 곧 K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승혁아, 그런데 이 영복 교수님이 추천하신 그 무역회사 있잖아, 사실은 말이야. 그거 지난번 들었던 영국 문학 소설 수업하시던 여 교수님 기억나냐? 그 왜 있잖아. 그래그래. 그 김 경숙 교수님이 사장님이래. 그게 말이지. 김 경숙 교수님의 남편이 반년 전에 죽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 김 경숙 교수가 대신 사장을 맡아서 하고 있데. 그래서 이 영복 교수한테 추천해 달라고 했다더군. 나도 학과 조교들한테 들은 이야기야. 참고하라고”
K가 술에 완연히 무기력해질 즘에 던진 이 센텐스들은 나를 잠시 당황스럽고 곤욕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김 경숙 교수라면 나도 한 번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하는 행동들은 매우 까다롭고 까탈스러우며 까닭 없이 구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사실 모두 까기 인형이었다. 그녀의 공격 대상은 항상 짧은 치마를 입고 오는 여 학우 들이었다. 너는 옷이 그게 모냐, 라는 노골적인 표현으로 수업시간에도 서슴지 않고 면박을 주었던 그녀다. 소문으로는 에세이로 제출하는 시험에서도 여 학우들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남학생들이 그녀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선배들을 통해 수업에 대한 정보를 미리 들었더라면 나도 아마 그 수업을 피했을 텐데 하는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친한 선배도 별로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적당한 피해의식에 젖어서 편안히 내 탓을 하는 것뿐이었다. 합리화라는 단어는 꽤 매력적인 발음이라고 생각했다.
약속한 중식 집에 도착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넥타이를 다시 다듬고 모양새를 잡았다. 그래도 합격해야 한다. 일은 해야 한다. Have to를 입 안 가득 머금고 있었다. 방문판매까지 해 본 놈이 무엇인들 못 하겠어 라며 거울을 봤다. 어머니가 사준 푸른색 셔츠를 사주신 건 공영방송에 일요일 오전 방영하던 취업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푸른색 셔츠가 주는 안정감과 윈저 노트 식으로 넥타이 매듭 지는 법을 진행 아나운서가 설명해 주는 것을 함께 보았기 때문이었다. 약속한 중식당은 제법 큰 편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는 연락을 주었던 박 건영 과장과 김 경숙 교수 그리고 다른 여성 면접 지원자가 있었다. 1대 다수의 면접으로 알고 있었던 나로서는 예측 못한 낭패였다. 거진 합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들의 어버버 거리며 답하는 나에 비해서는 여성 면접 지원자는 차분했고 당당해 보였다.
“저는 호주에서 2년 정도 어학연수를 통해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하였으며 K종합상사에서 인턴으로서 6개월의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김경숙 교수 밑에서 일하고 싶어 졌다. 생각해보니 김 경숙 사장님이란 말이 입에 더 잘 붙는 듯했다. 불편함에 수긍하는 편이 불안한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3
오늘도 우리 바이젠 상사의 앞날에 가득한 영광 주시길 바라며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박 건영 과장이 건네어 준 명함에 적힌 주소지를 들고 찾아간 바이젠 상사는 고급 주택단지의 내부에 위치해 있었다. 외관은 전원주택의 모양을 하여서 나는 이 곳이 회사인가 싶었다. 옆을 보니 작은 정원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회사의 이미지와는 달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앞을 몇 번이나 뱅뱅 서성였는지 모른다. 나는 지도의 주소지와 명함의 주소지가 일치하는지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시간 내에 도착했음에 안도했다. 박 건영 과장에게 연락해 회사 앞 주차장에 도착했음을 알리니 그 옆의 회색 건물로 들어오면 된다고 일러 주었다. 회사가 왜 이런 곳에 있을까 의아했지만 내가 찾은 그 고급주택이 바이젠 상사가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승혁 씨 잘 찾아왔네요. 이전과 마찬가지로 반팔 셔츠에 넥타이를 한 박건영 과장과 어색한 미소가 섞인 짧은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짧은 눈인사의 순간이었지만 어색하고 불안했기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눈에 담으려 했다. 회색의 깔끔한 벽지와 일 층의 책상에 앉아 있던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여자 사원의 책상에는 달력과 서류들이 그 왼쪽의 열려 있는 흰색 방문의 사이로 책상 위 놓인 김 경숙 교수의 명패가 보였다. 안은 에어컨을 오랜 시간 틀어 놓아서인지 꽤나 시원했고 쾌적했지만 처음 접하는 공간의 무거운 느낌과 준비가 덜 된 면접의 첫 소개말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오피스텔 정도의 공간을 상상했던 예상이 틀어지며 그 불안감은 배가 되었다. 박 건영 과장을 따라 2층 계단을 오르며 나는 슬리퍼를 신은 그의 회색 양말을 눈으로 좇으며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2층도 1층과 동일한 색상의 회색 벽지와 3개의 책상 그리고 업무를 보는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남자가 있었다. 전 이사님, 오 승혁 씨입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오래 틀어놓은 에어컨과는 달리 나에게 건네어온 첫인사는 매우 건조하게 느껴졌다.
그 옆 방문이 회의실인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전 백구 이사와 박 건영 과장과 옆의 회의실에 앉아 있으니 1층에서 보았던 그 여자 사원이 오렌지 주스를 3잔 쟁반에 내어 왔다. 앞에 무엇이라도 놓이니 마음도 같이 놓이길 바랐지만 입이 바싹 타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작은 회사라고 들었기에 오피스텔 정도인 줄 알았지 이런 고급주택의 2층을 사무실로 개조해서 사용하는 곳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사무실에 일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박 건영 과장이 나의 약력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했고 오렌지 주스를 입에 대지 않은 전 백구 이사는 몇 가지 질문들을 추가적으로 던졌는데 간단한 질문들뿐이었다. 이 교수의 추천과 김 교수의 결정을 전 백구 이사도 어느 정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오 승혁 씨도 알겠지만 무역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우선 우리 회사는 프랑스에서 버스의 부품들을 수입하여 대기업 버스 제조사에 공급하는 벤더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메인 업체와의 거래 연수로만 15년 정도가 되었고 회사가 운영된지는 20년이 넘었습니다. 수입만 하는 건 아니고 작은 단위로 국내 작은 공장들에서 선택한 상품들을 수출하고 있기도 하고요. 전 백구 이사가 회사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자질구레한 소개를 하는 동안 속으로는 그래서 연봉은요? 처우는요?라는 생각 따위를 하며 “네네 알겠습니다” 기계적으로 연발하고 있었다.
#4
똑똑. 들어와. 그래 며칠 출근해보니깐 어때. 승혁 씨?
김 경숙 교수가 질문을 하고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입에 가져간다. 커피를 입술에 적시고는 다시 잔을 내려놓고는 나를 쳐다본다. 마시는 것보다는 적시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네, 좋습니다.”
기계적인 대답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좋은지 안 좋은지는 아직 알 수가 없지만 긍정을 답하라고 강요당하는 순간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꽤나 많이 찾아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방판으로 다져진 사회적 경험은 이런 곳에서 기지를 발휘한다고 생각했다. 김 교수의 방에는 각자 자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커피 잔이 있지만 나는 커피 잔을 도저히 들 수가 없다. 그냥 김 교수의 인중을 보며 내가 너와 눈을 마주치고 있고 이 대화는 매우 진솔해 라는 착시현상의 느낌을 주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신과 나의 대화는 매우 편안해.
“그런데 승혁 씨. 전 백구 이사 어떤 것 같아?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좋으신 분 같습니다.”
“전 백구 이사가 아주 잘 해. 일도 열심히 하고 사람이 아주 성실해. 무역 쪽으로 지식도 아주 해박해. 나한테 이런저런 조언도 많이 해주고 그래. 전 백구 이사가 예전 태우 인터내셔널, 거기 출신이야. 대기업 출신이란 말이지. 태우 인터내셔널에서 해외 영업했다 하면 알아주는 인재거든. 거기서 20년을 해외 영업을 했어. 그리고 미국에서 주재원 생활도 하고 말이야. 아주 배울게 많을 거야. 열심히 배워둬. 나중에 혹시라도 전 이사가 아플 수도 있으니깐, 전 이사도 나이가 있으니깐. 자기가 전 백구 이사 없어도 수출 쪽은 다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배우란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고 적절한 추임새와 반응을 넣었다. 알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찜찜한 문장들이었다. 김 교수의 말에서 느껴오는 뉘앙스의 뒷맛이 담백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팩트와 요청이 7대 3 정도로 뒤 섞인 이 문장에서 그녀의 의도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좋은 사람에게서 일을 열심히 배우라는 말은 좋은데 아플 수도 있으니 일을 열심히 배우라 라는 말은 무슨 말이지. 이 문장을 듣고 나니 여학생들에게 지적을 해대던 그녀의 본성이 이미지로 연결되어 떠올랐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적에 따라오는 수정들을 요구하는 그녀의 특성상 전 백구 이사는 왠지 이 여자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앞의 칭찬은 그냥 한 것 같았다. 아직은 본인의 패를 꺼낼 때가 아니어서 속된 말로 밑장을 까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오랜 방판 경험에서 나오는 이런 직감들은 틀릴 리가 없다. 전 백구 이사와 김 경숙 교수의 서로의 수가 틀어진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주겠다는 그녀의 읊조림이 나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예감된 불편이었지만 역시나 문을 닫고 나오며 나는 처음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아멘.
#5
출발 직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억수같이 쏟아 붓기 시작한 비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와이퍼가 좌우로 미친 듯이 빗물을 닦아 냈지만 흰색의 차선은 나의 시야 안에서 점점 더 불확실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차선을 따라가는 것조차 힘든 순간이었다. 내 옆의 전 백구 이사는 더욱이나 말이 없었다. 후드득 하는 빗소리만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혼자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 자체가 곤욕스러운 이 순간에 옆에 앉은 이 상사라는 양반이 내뱉는 숨소리마저 불쾌하게 느껴지는 습한 여름이었다. 대구로 내려가는 길이다. 나와 전 백구 이사는 대구에 있는 거래처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신입사원인 나에게도 추후 거래처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얼굴도장, 눈도장, 술-도장이 필수라는 그의 생각에 이 빗길을 뚫고 대구에 내려가는 중이었다. 몇 마디, 무미건조한 대화들을 나누고 나니 우리 사이에 말이라는 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화보다는 몇 개의 단어들만 나열된 워딩이라고 해야 할까. 용기를 내어 조그맣게 라디오 볼륨을 켰다. 라디오 디제이가 사연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유일한 구원이라 믿으며 나는 조용히 액셀을 밟을 뿐이었다. 비가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소나기처럼 꽂혔다.
우리는 두 곳의 거래처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처음 도착한 곳은 농업용 호스를 제작하는 곳으로 바이젠 상사의 수출에 있어서도 제법 비중을 차지하는 회사였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생소했지만 생소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비즈니스에서 초짜 티는 금물인 법이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이사님, 별일 없으셨죠?”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별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회사에 신입사원도 입사했고 인사도 드릴 겸사겸사 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나저나 다음 달 초에 수출 물량 준비 컨펌 난 거죠? 물량을 밀 수 있을 때 밀어야죠. 저희 쪽으로 물량 미시는 게 더 좋으실 겁니다.”
정해진 수순과 예견 가능한 대화 같은 것들을 짧게 끝내고 거래처 1을 나온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사, 오십 분 남짓이었다. 이동경로 및 거래처 방문 시간, 그간 오고 간 대화들을 대략적으로 몇 개의 단어들로 추렸다. 거래처 1, 방문 시간, 1시간, 익월 수출물량 관련, 거래처 2로 이동합니다. 나의 그녀, 김 경숙 교수에게 빠르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도와줘. 승혁 씨가 나를 좀 도와줘야 해 자네가. 김 경숙 교수가 입버릇처럼 올린 말이었다. 본인은 가진 것이 넘쳐나면서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도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목욕물을 따뜻하게 틀어 놓고는 몸을 담그면 그만큼 물이 넘쳐 버린다. 그런데도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는다. 따뜻한 물이 계속 흐르도록 넘치도록 틀어 놓는 것이다. 그게 김 교수의 욕심이다. 물욕이 물욕을 물고 있는 이 사태가 본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녀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직원들은 회사가 주는 월급에 불만이 있었다. 몇 번의 회식 자리에서 쥐꼬리 같은 이라고 욕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김 경숙 교수가 도와 달라며 나에게 내린 지시는 전 백구 이사의 특이사항을 보고 하라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기가 찼지만 “네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고질병과 천성 앞에 그녀의 지시에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기 전 방문한 두 번째 거래처에서 전 백구 이사와 나는 꽤나 많은 술잔을 비워냈다. 거래처 박 사장이 워낙 주당인 데다 그 밑에 여자 사원 하나가 내어오는 맛깔나는 대구 사투리와 워낙 분위기를 잘 띄우는 바람에 건네어 오는 술잔들을 거부할 힘이 우리에겐 없었다. 나중에는 냉면 그릇에 소주를 조금씩 비워내는 방법 말고는 올라오는 취기를 막을 길이 없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음 분기에도 우리는 거래처와 긴밀한 협력을 약속하며 겨우 술자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만취했다. 전 백구 이사가 만취해 버렸다. 나는 그를 거의 엎다시피 해서 모텔 방으로 그를 데리고 왔다. 모텔 방은 습했다. 에어컨을 급하게 틀었다. 전 이사는 방을 들어서자마자 침대에는 다다르지도 못 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엎어져 뻗어 버렸다. 나는 그를 몇 번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모텔 방의 모든 습기를 본인의 몸에 머금은 듯이 그는 자꾸만 축 처지고 엎어져서 그 앞 바닥에 그를 그냥 놓아버렸다. 이사님, 그래도 박 과장보다는 제가 낫죠? 술기운에 하지 않아도 될 질문을 던졌다. 겉보기에도 박 과장은 사장의 충직한 수하인이나 다름없었다. 시발. 박 과장 얘기는 꺼내지도 마. 개새끼. 술에 취한 전 이사가 대화 중간중간에 서툰 욕을 섞기 시작했다. 그의 안경이 삐둘어 진채로 코에 반만 걸쳐 있었다. 안경을 벗겨 주었다. 이 사람 확실히 만취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님, 앞으로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박 과장보다는 그래도 제가 더 나을 겁니다. 저는 이사님 라인 탑니다. 은연중 이더라도 나는 이런 말들을 하고 싶었다. 평소에는 잘 하지 못 하는 말들은 대구의 모텔 방이 아니면 나는 다시는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승혁 씨, 회사 그만둬. 젊은데 아직 이런 작은 곳에 올 때가 아니야. 와도 너무 빨리 왔어. 얼른 그만둬. 사장이라는 인간이 사업을 몰라도 너무 몰라.”
전 이사는 분명히 중얼거리는데 그만 두라는 말이 선명하게 들렸다. 고요를 뚫고 선명함이 자리를 잡는다. 단어의 윤곽까지도 보인다. 혀는 꼬였지만 단어의 윤곽들이 뭉쳐져 센텐스가 된다. 그만두라고. 그래, 뭐 그건 알겠는데 회사를 그만 두라는 말을 하기에 모텔 방은 조금 적절치 않은 공간 아닌가. 말도 장소를 봐가면서 좀 해주지. 기분이 더러웠다. 조금 서럽기도 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알아주는 태우 그룹 출신 인재에게 나도 일 좀 배우고 싶었는데 그런 작자가 앞장서서 그만 두라는 말을 하니 혹시 내가 김 교수에게 문자 보고를 하는 것을 안 건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니 알아도 그렇지. 이런 것 가지고 말이야, 정말 작은 문제잖아. 술에 취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이 사람은 참으로 무책임한 양반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양반을 어찌할지 몰라 그를 바닥에 두고 신발과 양말만 벗겨 주었다. 옷들을 벗어 놓고 침대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나 또한 무책임한 사람을 무책임하게 방치해 두기로 했다. 그의 숨소리가 크게 너울 쳤다. 그는 이내 곧 깊게 잠들었다. 안경을 벗기니 그의 얼굴이 초라했다.
#6
Dear Misses Kim,
나는 이러한 말들을 전하는 것이 매우 유감이며 후회스럽습니다. 우리의 신뢰 관계는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0년 전 당신의 남편과 이 사업에 대한 계약을 시작하고 함께 쌓아 올린 그 시간들 말입니다. 당신의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 역시 깊은 애도의 말을 전합니다. 다만 당신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큰 상실감을 얻었고 이것은 우리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바이젠 상사와의 계약 연장 및 재계약은 진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추후에 우리가 새로운 미래에서 만날 수 있기를 나는 다시 한번 소망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음을 나는 다시 한번 전합니다.
Best regards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미래를 알며 살 수는 없다.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미 일어나 버린 일들뿐. 미래를 알 수 없다고 느낀 것은 모두 미묘하게 작동되는 인간의 심리와 심리 위에 올린 인간의 관계 같은 것 때문이었다. 관계와 시간은 더욱이 비례하지 않았다. 이 영복 교수님의 무역 원론의 그것처럼 단순히 A와 B가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하여 교환되는 것이 아니었다. 관계는 쌓아간다는 표현이 맞는 듯했다. 쌓여있는 것은 무너뜨리기 쉬운 일종의 젠가 같은 것이란 말인가. 이유 없는 인연은 없듯이 이유가 무너지면 인연은 중심축을 잃은 젠가처럼 쉽게 무너져 버렸다. 동양의 정서적인 배경을 서양의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속은 시원했다. 남편의 죽음 같은 것을 본인의 입으로 전하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 동양의 정서 아닌가.라고 생각하면 속이 편했다. 전 백구 이사는 코쟁이, 코쟁이 하며 종종 유럽인 미국인 할 것 없이 백색 인종들이 가지는 우월감을 비호했다. 좋아할 수 없는 감정인 것은 확실했다. 수입해온 물품을 국내 유통을 위해 영업을 할 때에는 “Made in France”을 강조해야 했던 우리였다. 그래, 다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를 하려면 충분한 노력을 해야 했다. 다시 말해 갑작스러운 비즈니스의 관계의 종결은 이런 식으로 통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 백구 이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건 코쟁이들의 일방적인 서양식 통보에 불과했다. 당황한 것은 김 경숙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죽음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 그 죽음으로 인해 본인이 사장 일을 맡아서 하게 된 것도 그저 그들에게는 사업을 종결하기 위한 합리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심리적인 타격을 제일 많이 받은 것은 김 경숙 교수, 그녀처럼 보였다. 적어도 우리의 사고방식에서는 그랬다. 우리는 여전히 안정적인 성과와 오퍼레이션을 해낼 수 있는데 그들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열 보 백보 이해해서 생각하여도 이것은 우리들의 밥줄이 달린 문제였기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단 말이다. 적지 않아 모두 넉넉하게 충격을 받았다. 김 경숙은 나에게 대체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 구상을 맡겼고 전 백구 이사는 그들과의 안정화에 치중을 했다. 그리고 박 건영 과장은 회사를 퇴사하기로 했다. 작은 사회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일궈온 시간은 20년이었지만 무너지는 데에 있어서는 세네 달이면 충분했다. 밀물 후 썰물을 보는 듯했다. 빠르고 단순했다. 원인 후에 결과는 쉽게 붙어 버렸다.
#7
동네 얘들은 나를 똥개라고 불렀다. 백구라는 이름에서 빌려온 별명이었다. 네가 백구냐? 전 백구입니다. 하면서 자기들끼리 멍청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다. 촌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느릿했다. 시간도, 구름도, 공기도, 논을 가는 소의 늘어진 혓바닥도, 백구라는 촌 냄새가 베인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의 죽음을 빼고는 모든 것이 느리게 찾아왔다.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것은 전 백구라는 이름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 없는 시골 촌놈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공부 밖에 없었다. 나는 그걸 또 곧잘 하는 편이었다. 강릉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고 전교 1등을 하고 그렇게 서울 대학교까지 합격했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에는 연필과 종이가 큰 힘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태우 그룹에 입사했다. 해외 영업 팀에서 일을 하고 진급을 하고 일을 하고 진급을 해서 팀장도 달았다. 내 인생의 모든 인연이 나의 이력서에 담겨 있었다. 이력에 이력을 더 하면 경력이 되었다. 친구들과는 숫자로 대화하는 편이 편했다. 사람을 파악할 때에는 숫자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인생을 살며 겪은 많은 일들이 회사 안에서 이루어졌다. 회사는 사회였고 나는 그 사회의 리더였다.
태우 그룹의 해외 영업팀 팀장 자리는 나쁘지 않았다. 실로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에 나는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다만 진급 시기에 진급을 놓친 것은 화근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주변 사람들의 응원이 달갑지 않았다. 위로를 해주는 친구나 동료들이 ‘괜찮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괜찮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괜찮지 않게 느껴졌고 관심을 받으며 위로를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한 조직 내에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은 그다음으로 올라갈 자리 나 목표의 윤곽선이 흐릿하게나마 보여야지 가능한 이야기였다. 무작정 열심히 한다는 것은 40대 후반에서 50대의 문턱 앞에 서있는 나와 같이 돈 냄새 좀 맡아본 동년배들에게는 더욱이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단군 이래의 최고의 스펙이라 한다. 그런 신입사원들도 2년을 채 메우지 못하고 이직을 하거나 퇴사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불안정한 고용이 야기하는 사회 전반적인 패배의 정서는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경쟁은 위로 올라설수록 심하다. 언덕에 오를수록 강한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다. 꼭대기에 다가설수록 그 산에서 디딜 수 있는 면적은 줄어든다. 연초만 되면 사람들이 해돋이를 보겠다고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실로 그 바글바글함이란 것이 얼마나 징그러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월 1일의 뜨는 해를 보겠다고 산의 정상에 올라선 사람들의 모습을 찍기 위해 헬리-캠을 띄우는 공영방송의 뉴스 구성들이 얼마나 식상한 일인가를 나란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묵을 만큼 묵었다. 불안함을 느낄 때 건네어오는 제안들을 나의 선택권에서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사업을 할 때에는 여러 방면에서 가능성과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이 ‘옳다‘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버티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은 우리는 여러 뉴스나 친구들의 술자리 소식을 통해 알 수 있는 나이었다. 내가 바이젠 상사에 합류한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새로운 자리, 새로운 사람, 새로운 느낌, 새로운 것들. 불안은 했지만 태우 그룹에 계속하여 있는 다 고해도 불안함을 느낄 것은 매한가지였다. 사수였던 창수 선배는 일찍이 태우 그룹에서 퇴사를 하고 본인의 회사를 차렸다. 모든 무역 인들은 퇴사 후 본인의 사업을 꾸리는 것을 당연한 수순이며 도전이며 무역인의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가서 내 사업을 꾸리겠다는 생각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무역인의 DNA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것은 마음속에 품고 일하는 편이 조금 더 아름답다고 본다. 창수 선배는 그런 용기가 있었고 운도 받쳐 주었다. 와이프의 집안이 조금 사는 집안이라고 들었다. 지금의 김 경숙 교수의 집 안에서 어느 정도 사업자금을 확보해 주었고 창수 선배는 작게, 정말 작게 무역 상사를 차려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쓸데없이 포기하거나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보다는 선배의 밑에서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닦아 놓은 터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많은 망설임이 있었지만 많은 망설임 속에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담뱃불을 세게 당길 때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시간이 흐르면 나이를 먹고 선택의 폭은 좁아지게 마련이다. 태우 그룹을 그만두며 많은 후배들의 배웅과 얼마 남지 않은 선배들의 빈말 같은 응원들이 나의 퇴사 짐 꾸러미 위에 얹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내려가기 위해서 이 곳, 바이젠 상사에 온 것이 아니다. 적어도 비탈길을 내려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견디며 살아내지 않는다. 노익장에도 정의는 있단 말이다. 최소한의 현상유지, 그런 보상이 없다면 우리는 선택지에서 그 답을 제외하는 것이 옳다. 밥줄이라는 것에 대충이나 적당히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굳이 이런 회사의 어려움이 나에게 인생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는 요소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불필요한 고난 같은 것이다. 여러 번 겪어온 일이고 그냥 이렇게 지나가면 된다. 나는 똥개, 전 백구다.
#8
고민이 되었다. 김 경숙 교수가 따라준 와인 잔을 다 비워야 하는지 심히 고민이 되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걸까. 나방 같은 것이 와인 잔의 주변을 맴돌았다. 뱅글뱅글. 맴돌더니 와인 잔의 모퉁이 부분에 서는 것이라. 손으로 휘휘 저어 멀리 날려 보내려고 했다. 어이가 없게도 나방은 와인 잔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와인에 잠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는 날아갔다. 그때였다. 김 교수가 모두에게 건배를 제안한 것은.
“다시 한번 해봅시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건배사였다. 전 백구 이사의 말대로 이 사람은 심각함은 인지했지만 심각함을 타개할 방법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인지 능력이 이 가벼운 건배사에서 진하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 전 나방이 앉았던 반대편의 와인 잔 모퉁이에 입술을 가벼이 대고는 와인으로 입술만을 적셨다. 반대편의 전 백구 이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장과 나, 전 백구 이사와 경리 직원 박 건영 과장이 빠진 자리는 더욱 단출하게만 보였다. 와인 잔에서 입을 뗀 전 백구 이사가 안주를 입에 가져가는 것 대신 한 마디 말을 덧 붙였다.
“사장님, 아시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랑 승혁 씨가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말입니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아야 할 것도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최선을 동의한 적은 없지만 자리에서 와인 잔을 받아 마시는 것으로 암묵적 동의의 최선이 약속된다. 이 얼마나 어색한 상황인지.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매우 부끄러워 테이블 모퉁이에 시선을 두었다. 가장 편안한 곳에 시선을 두는 것이 불편한 자리와 시간을 피하는 나만의 오랜 방식인지라.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 거는 최선이었다. 와인잔을 몇 잔 비워낸 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느낌에 모두가 편승한 탓일까, 모두들 와인을 계속해서 따라 잔을 채우고 비워내고 하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느낌이었다. 밖에는 며칠 째 폭염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침에 받은 재난 문자가 무색하게 에어컨으로 우리의 울타리는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경리 직원이 조금은 추웠는지 에어컨으로 리모컨을 두 번 삐빅 눌러 댔을 뿐이었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이 조금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이젠 상사의 앞 날에 무한한 보살핌을 주시 옵고, 내일도 우리 그 영광됨 앞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9
전 백구 이사는 프랑스로 오늘 오후 출국할 예정이었다. 나에게는 프랑스에서 발표할 새 사업계획서를 준비하라고 지시를 했고, 경리 직원에게는 티켓과 호텔 숙박 일정을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사장님이 걸고 있는 기대가 크다고 부연 설명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이겠지만 일주일의 일정을 혼자 소화할 그를 생각하니 고생은 불 보듯 했다. 대구에서도 술에 뻗어 버렸던 그인데 프랑스에서는 혼자 술을 마시지 않기를 나는 속으로 바라왔다. 사장님의 아침 기도가 있었고 나는 그의 짐을 트렁크에 싣고 그를 인천 공항에 내려 주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2주 전 퇴사한 박 건영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에 회사 주변으로 갈 터이니 가볍게 반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다만 오래되지는 않았기에 그다지 반갑지도 않았다. 그가 말한 통 골뱅이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안주인 게 문제인 듯했다.
“승혁 씨, 회사는 어때요, 잘 지냈나요? 오랜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 말 하지 못 한 것이 있어서 오늘은 그 말을 하려고 왔어요.”
뱅글뱅글. 그의 말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뱅글 돌기 시작한 그의 말끝을 따라가는 동안 비운 것은 소주 1병이었다. 마지막 남은 반잔을 그의 잔에 채우며 시간을 태우고 있었다. 결론에 이르러서 하는 말들은 회사를 나가면서 본인이 한 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와의 계약은 사실 본인이 퇴사하며 이직하는 회사로 가져가는 조건이었다는 것. 연봉을 많이 올려서 이직하게 되었다는 것. 핵심은 그 두 가지였다.
계약이 틀어지는 와중에 본인의 살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 결과물은 본인이 옮겨가는 회사에 프랑스 회사의 영업권을 미안하지만 가져가게 되었다는. 이 말을 반복하고 반복했다. 미안하지만, 미안하게 되었지만, 미안합니다.
나는 프랑스에서 혼자 숙소에서 이제 막 기상했을 전 백구 이사를 떠올렸다. 경리 직원이 급히 예약한 싸구려 숙소에서 아침 조식을 먹기 위해 알람을 맞췄을 것이고 식사를 마치고 올라와서는 샤워를 할 것이고 와이프가 챙겨준 양말 서 너 개중 무엇을 신을지 고민할 것이고 잘 다려진 셔츠에 넥타이를 맬 것이며 미팅이 있는 깜봉 가의 회사까지 프랑스의 지하철을 이용할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가서 무슨 제안을 하게 되던지, 얼마나 달콤하고 아름답게 발표를 마치건 말건, 정해진 시간 25분 안에 정확히 발표를 마치건 말건, 내가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잘 만들었건 말건, 그 안에 들어있는 수치들이 정확히 들어맞건 말건, 질의응답 시간에 어떠한 질문도 쉽게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이 불쑥 머리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나는 인간 전 백구가 겪게 될 지구 반대편의 쪽팔림에 대해서 생각했다. 머리 속이 뜨거웠고 불이 나면서 피어오른 연기에 머릿속이 이내 아득해졌다. 머리 속의 뜨거워진 기운이 중력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으로 타고 흘러 내려오는 기분이 들었을 때였다.
개새끼.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툭 하고 튀어나와 버렸다.
나는 통 골뱅이와 걸친 술이 과해 버렸다. 이미 예정된 듯 쉽게 도를 지나쳐 버렸다. 약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집에 걸어 돌아오는 길에 이 영복 교수의 저서인 무역 원론에서 읽었던 센텐스가 생각이 나서 나는 그것을 입으로 한참을 되뇌었다. 단어들이 몽글몽글 입에서 맴돌았다. 밥을 입 안에서 돌리는 것처럼 단 맛도 났다. 그리고 잘 정리된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 혀는 꼬였지만 걸으며 계속해 중얼거렸다.
무역은 보이는 상품의 교환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 즉 기술 및 용역과 같은 무형자본의 이동까지도 포함한다.
빗방울이 더욱 굵어지기 시작했다.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