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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운 Jun 19. 2016

대필代筆

4. 고등어

강혁은 항상 대화로 유서 아닌 유서들을 내게 남겼던 걸까. 의아했다. 강혁의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에서 맴도는 삶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항상 고뇌했으니까 무엇인가를. 그는 잠을 삶만큼이나 좋아했으니 매일 그 둘을 저울질 하며 살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나는 그 상황들을 모른 채 웃어 넘겼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대화들이 가진 의미들은 강혁의 생각, 그대로였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 했으나, 돌이켜 보면 그는 항상 살고 싶어 하는 동시에 죽고 싶어 했다. 강혁은 목소리를 녹음하거나 통화의 내용들을 녹음하기도 하고 대화를 녹음하고 그것들을 글로 바꾸는 일을 종종 하기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유서의 구절구절에 대한 단서들은 글과 그의 휴대폰에 있던 녹음파일들을 통해서 충분히 되짚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물에 젖은 그의 신발 자욱이 모두의 흔적과 시간 위를 거닐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매일 일어나서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말수가 줄어든 다는 것은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더 이상이 삶이라는 것에는 대립도 없고 접점도 없다. 마지막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끝까지 모를 일이다.



20살의 5월 이였다. 나는 강혁과 한 번은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 사실은 학생회 선배들이 다른 대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하는 연합 축제 같은 것이 있다고 해서 재미있을 것 같아 따라 나선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어떤 모임에 빠지게 되면 소외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 두려워 무섭게 사람들을 쫓아다니던 시절이었다. 사실 나는 아무런 정보 없이 그곳에 갔기에 그 시위장에서 있던 몇 가지의 일들은 내게 충격을 주었다. 각기 다른 대학의 학생들이 하나의 율동과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덜컥 겁을 먹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의 춤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 듣던 그 운동권들의 모임이구나 하는 생각에 사실 나는 오늘의 발걸음에 대해 조금은 아차 싶었다. 고등학교 국사선생님은 지금에 와서 생각 해 보니 교과서에도 한 페이지의 절반 정도의 분량 밖에 차지 않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동영상을 구하여 우리에게 여러 번 보여주었다. 이기적인 생각을 들춰보자면 그건 어차피 시험 문제에는 몇 문제 나오지 않을 분량이었다. 다만 흑백 영상 속의 군인들은 시민들의 머리를 방패로 내려치고 전투화로 그들을 밟고 하는 장면들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그 뒤로도 나와 강혁이 시위를 따라가게 되는 그런 일은 몇 번 더 있었다. 강혁은 그 몇 번 더 아니 그 이후 그 뒤로도 계속 선배들을 따라 집회를 따라 다녔다. 어느 날 하나 또는 두 학번 위의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나에게 이야기 했다. 너는 왜 사람들의 움직임에 동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니 꾸짖었던가. 우리는 소위 말하는 지식인의 계층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회에 일갈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의 그런 행동들은 너무 비겁한 처사 아니냐고 딱딱 짚어 이야기 하는 말투였다. 그 선배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으나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일갈이 아닌, 입에 재갈을 물린 듯이. 나는 그냥 겁이 났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겁이 나서 입을 닫았고 겁이 나서 걷지 않았다.

강혁은 유난히도 동생을 아꼈다. 술자리에서 그의 동생 애란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혁은 애란이 태어나는 순간에도 함께 했다고 내게 종종 이야기 해주었다. 나중에 그가 적어 놓은 워드 파일을 열어 보았을 때 그 순간에 대한 글을 꽤나 자세히 적어 놓았다. 그 날의 온도와 습도의 느낌이 강혁이 내려놓은 한 글자 한 글자를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아래는 강혁이 남겨 놓은 글 중 하나이며 그것의 수정을 거치기 전의 원문이며 또한 전문이다.



1989년의 이른 겨울, 29살의 아내와 33살의 젊은 가장은 천호동의 한 지하 단칸방에 살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약 4, 5년 후의 일이었다. 그 둘의 첫 번째 독립인 것이다. 옮겨야 할 짐의 가지 수는 많지 않았다. 시집을 올 때 가져온 검은 자개장과 그릇들. 그리고 첫째 아들이 2살이 되던 해에 둘째를 가지게 되었다. 배 속의 아기와 함께 그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어느 지하 단칸방이 그러하듯 모든 환경은 열약했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를 막론하고 서울 변두리의 지하 단칸방들에는 어지간해서는 예외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편이다.

그 곳은 대체적으로 볕이 잘 들지도 않거니와 습한 편이었으며 공동으로 사용하는 주방의 벽 또한 회색이어서 그 우울함은 쉽게 희석되지 않는 듯했다. 그 지하에는 2개의 방과 함께 사용하는 하나의 주방, 그리고 두 집이 살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 집은 정원을 가지고 있는 전원주택의 지하 방이었다. 턱이 제법 높은 회색계단을 올라서면 잘 조형되지는 않았지만 녹색이 있었고 햇빛도 있었으며 월세를 받아가는 주인집도 있었다. 아내와 아이는 주로 집 안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또 이미 배가 제법 불러온 상황이어서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었고 아이는 너무 어렸다. 그나마 행복했던 점이라면 아이는 걷는 것도 옹알이를 하는 것도 또래 아이들에 비해 빨랐다. 그것은 이 젊은 부부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여자는 한글을 잘 몰랐기 때문에 아이를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에 비해 아이는 벽에 붙은 한글이 적힌 종이를 좋아했고 여자가 하는 말들을 곧 잘 따라 했다. 또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동네 아이들과 소꿉놀이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떠한 단어들을 동네 형과 누나들한테 배워 오는 날이면 엄마에게 그것들을 이용해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일을 나가는 남자의 책임감은 아이와 엄마의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내었지만 그것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편이어서 이 둘의 시간은 지하 방 보다 답답하지 않고 유려하게 흘러갔다. 이사를 온지 2달이 되었을 무렵, 3월의 말미였다. 사람들은 봄이라고 이 시간들을 칭하지만 아직은 겨울의 시간과 차가운 바람결을 품고 있을 법한 시간들이었다. 한 마디로 봄치곤 아직은 제법 쌀쌀한 그 날들의 한 가운데.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느린 시간 속에서 아이와 엄마는 둘만 있었다.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가 으레 다르듯이 아이들은 2시간만 있어도 쉽게 친해지는 것에 비해 수줍음이 많은 성격의 이 29살의 여자는 동네의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기에는 2달이란 시간은 조금 짧은 것이었다. 여자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올라와 성수동의 재봉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것이기에 재봉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몇몇의 친구들 외에는 서울에는 친구도 없었다. 독립은 또 다른 말로는 고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전에 여자는 아이의 목욕을 시켰다. 아이를 목욕시키며 몸이 조금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새벽이면 남자는 일을 나가면서도 자신이 나갈 건설현장의 전화번호를 적어 놓고 문 옆에 놓고 나갔다. 햇빛이 방의 창문을 통해서 은은히 들어왔다 여자의 진통과 함께. 여자는 아파했다. 아이도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표정이 일그러졌고 소리도 지를 수 없는 그런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으나 직접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침에 적어 놓고 간 건설현장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 아이가 나올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아이는 그런 엄마의 표정을 지켜보다가 울면서 자신의 도널드 덕 변기를 여자에게 갖다 주었다. 

“엄마, 배 아프면 여기다가 똥 누어, 오줌 누어”

“응, 엄마 배 안 아파. 괜찮아.”

아이가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최소의, 아니 최선의 응급조치는 그것뿐 이었다. 상황이 제법 심각하다는 것은 두 살 배기 아이도 알 수 있을 만큼 급박했다. 이 둘은 무기력했지만 방 안에 새어 들어온 몇 조각의 파편 같은 햇살은 참으로 따스했다. 이틀 전 불어온 봄바람 같지 않은 칼바람에 비하면 날은 좋은 편이었다. 여자는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쉽사리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 극심한 진통과 힘들 때 주위에 없는 사람들은 한번 겪어본 일이지만 전혀 겪어보지 않은 일처럼 새로웠다. 없는 정신에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니 옆 집 아주머니를 부르는 일뿐이었다.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야 하나 싶었지만 택시 안에서 아이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여자는 힘들어했다. 방문 앞에 주저앉아 아주머니를 기다렸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오후반 학교에 보내 놓고는 올 수 있다고 했다. 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 하나뿐이니 여자는 기다리는 것 밖에 수가 없었다. 결국 병원에 가기도 전에 아이가 나왔다. 여자는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를 낳아놓고 여자는 본능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1989년 3월 23일 12시 15분. 여자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낳으면 시계를 본다. 아이와 내가 이어지는 시간을 눈으로 기록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방바닥에 놓인 아이가 추울까 옆에 있는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준다. 자르지 못한 탯줄이 아직 연결되어 있다. 방바닥과 벽지에는 이미 피가 범벅이지만. 이제 아이는 둘이 되었다. 첫째 아이는 그렇게 자신의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에 함께했다. 옆 집 아주머니에게 여자는 탯줄을 잘라달라고 했지만 옆 집 여자는 해 본 적이 없으니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옆에 산부인과에라도 전화해주세요.” 

옆 산부인과에서 의사가 아닌 간호사가 와서 탯줄을 잘라준다. 묶어준다. 남자가 도착하며 옆 집 아주머니에게 묻는다.

“애가 나왔나요?”

“네, 나왔어요. 여자 아이예요.”

지하 방에 수저가 하나 더 늘었다. 파편 같은 그 햇살은 결국 아이와 엄마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지하 방, 우리는 우리의 방에 들어온 모든 빛을 사랑한다.



여기서 첫째 아이는 강혁, 본인을 지칭하는 말이며, 강혁은 이렇듯 조각글을 남겼다. 나는 이 글을 읽고는 왜 죽은 강혁이 이 글을 적고 싶어 했는지 생각 해 보았다. 나는 필요한 부분들에 글을 덧붙이고 주어 등을 바꾸며 하나의 이야기로 강혁의 이야기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솔직한 강혁의 글에서 강혁을 숨겨 주고 싶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런 것들이었다. 강혁의 관 위로 흙을 덮어주는 일과 같은 일이라고 느껴졌다.

2014년 12월 2일, 그 날, 나와 강혁의 아버지가 작은 술집에서 만난 날, 강혁의 아버지는 내게 강혁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강혁의 아버지는 진정 담담하셨다. 오히려 마음이 먹먹하고 답답해져 오는 것은 나의 쪽이었다. 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라 드렸다. 그것 말고는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묵묵한 위로라고 배웠다. 나에게 강혁이 적어 놓은 노트들이라며 방에 있던 것 몇 권을 가져와 보여주셨다. 강혁의 흔적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아직 이곳, 저곳 산에 붙은 불처럼 그리 쉽게 꺼질 줄을 몰랐다. 그는 매일 새벽, 글로 나의 마음을 두드려댔다. 가을의 마지막에 내리지 말아야 할 비가 오는 것 같았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치기 3주 전, 당시 나는 내가 1학기 내내 좋아하는 대학 동기가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논산에서 딸기 하우스를 하던 집에서 곱게 자란 여자아이였다. 위로는 오빠가 하나 있었고, 그 여자아이 혼자서 서울에서 자취를 했다. 하루는 강혁이가 나에게 그 여자에게 도대체 고백은 언제 할 거냐며 나를 심히 부추긴 적이 있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고 미온수 같은 답을 했다. 사실 나는 그때 까지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도무지 남자와 여자의 사이라는 것은 3미터 앞도 안 보이는 안개 길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처럼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조심스러운 청춘은 슬며시 엑셀 패달에서 발을 떼고는 브레이크 패달에 발을 올리고는 언제든지 그것을 밟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영은 이였다. 하루는 영은 이에게 문자가 와서 나에게 몸에 열병이 도는 것 같지만 도저히 혼자서는 병원을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날은 일요일 이였고, 고작 스무 살을 먹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라고는 괜찮을 거야라고 위로하며 의미 없는 답신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 나는 강혁에게 연락 해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물으니 강혁은 내게 응급실에라도 데려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 아이의 자취방에 찾아가 그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는 가까운 대학 병원의 응급실에 데리고 갔다. 수액을 맞고 몇 시간이 지나서는 그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강혁이 아니었다면 나는 등신 중에 상등신이 될 수 있는 상황 이였지만 그래도 내가 그 해 여름에 그 여자아이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예정된 수순으로 고백을 한 후 차일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술을 진탕 쳐 먹고는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 몸을 대걸레처럼 걸치고 토악질을 해댔다. 강혁이 옆에 와서는 등을 두드리며 괜찮나 하고 물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내가 병원 응급실에 처음 가본 일은 영은 때문이었다. 모든 게 서툴렀다. 물렀고 터지기 일보 직전의 감정들만 예고된 시간의 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젊은 날이라는 미명 아래에 우리는 매일을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강혁은 이전에도 여러 번 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나의 그 이유와는 시작을 달리 했다. 본인이 아파서는 아니고 아버지가 일을 하다가 자주 다쳤기 때문이었다. 강혁이가 지금의 주공 아파트에 살게 된 것도, 그의 식구들이 조그만 경차를 타게 된 것도 아버지가 일을 하다가 다쳐서 받은 산재 보험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강혁은 내게 이야기 하곤 했다. 아래는 강혁의 아버지가 지난 술집의 만남에서 나에게 건네준 노트에 있던 강혁의 글이다.


나는 지금 간절합니다. 그런 나의 맞은편에 앉은 세 명의 면접관 중 한 명이 읽던 이력서에서 눈을 떼며 고개를 듭니다. 면접관이 묻습니다. 당신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입니까?

그건...말입니다.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새벽에 일을 나가셨어요. 오토바이를 타고요. 아버지가 처음 일을 나가는 모습을 본 건 국민 학교 입학을 하던 때, 1993년 3월 2일 이였습니다. 그 날, 국민 학교 입학식 날 이였거든요. 처음으로 새벽에 깨어나 아버지와 대화를 하였던 날입니다. 화장실 노란 조명이 새어 나오는 것과 쏴아 하는 물소리. 

아버지가 묻습니다. 왜 이리 일찍 일어났니. 더 자거라. 

아빠, 오늘은 잠이 오지 않아요. 지금 일을 나가시는 거세요?

새벽 네 시 반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이른 시간. 푸름과 검음이 창문 밖에서도 뒤 섞이지 못한 채 비명도 잠자는 이 새벽에 아버지와 나의 대화만이 잠시 흐름이 멈춰진 적막을 메웁니다. 그 사람과 그 시간대에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나는 이걸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지금 면접관의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합니다. 내가 제일 행복한 순간이라니. 언제더라...

새벽 이였습니다.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파주의 응급실 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일을 하던 건설현장에서 발을 잘못 디뎌 추락을 하셨다고.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아버지의 입원이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와 내가 새벽에 오는 전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지 이것뿐입니다. 새벽에 오는 전화들은 주로 좋지 않은 전화들 뿐 이였습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면 전화를 받는 엄마의 조그마한 목소리. 아직 곤히 자고 있는 동생. 실눈을 뜨고 듣고 있노라면 전화의 내용은 새벽 출근길 택시와 아버지의 오토바이 사고, 아니면 건설현장에서의 불안한 임시 구조물들과 관련된 사고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싫어요. 꽤 단호히 싫습니다. 불안한 것들을 디디며 걸어가는 삶은 왜 우리 아버지의 것입니까.

항상 알 수 없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나는 쫓기듯이 살았습니다. 그것들은 내가 성실한 척 해댈 때의 큰 뿌리가 되었습니다. 내 입으로 성실했다고 말을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실제로 나는 그러지 못하니까요. 많이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돈을 버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무슨 일을 할까. 아니 그게 언제쯤일까. 불안했습니다.

수능을 마치고 바로 다음 날부터 지하철에서 빵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에도 일을 하고 돌아오던 그때에 어떤 친구는 내게 돈 벌레라고 했습니다. 못 들은 척 외면했습니다. 비와 눈이 오면 불안했고, 뉴스에서 다른 건설현장의 사고 소식들을 보는 것은 불편했습니다. 학교에서 야간학습을 마치고 돌아와 일찍 잠든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는 좋았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육체노동자들은 오늘도 잠에 일찍 듭니다. 하루가 고되기 때문에. 눈을 감으면 하루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기에 잠자리에 일찍 드는 것은 하루를 정리하는데 있어 괜찮은 일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블랙커피를 드셨지만 잠은 일찍 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른 시간에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태우시며 블랙커피를 마십니다.

가끔은 엄마와 동생, 나. 이렇게 세 명의 삶을 상상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도 잘 살 수도 있을까요? 아니요. 나는 애초에 이런 생각은 포기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 뿐 이였습니다. 국민 학교에서는 처음 반을 배정받고 일주일쯤 되면 설문 조사지 같은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살고 있는 집의 주소와 평수를 적고, 부모님의 학력을 적고. 집이 우리의 것인지, 아니면 전세인지, 월세인지. 차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꽤 자세히 적어야 했습니다.

나는 먼저 부모님의 학력 란에서 항상 멈칫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중학교를 중퇴하셨지만, 나는 창피해서 고졸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아니 창피해서 라기 보다는 왠지 그렇게는 적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그 사람들은 부모님의 학력까지는 조회해보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그리 적는 것도 조마조마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그리 적어왔던 대로 나는 고민하지 않고 적었습니다. 부모님의 회사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던 란에는 항상 건설회사라고만 적었습니다. 목수의 일은 고정된 일자리는 아니기에 어느 하나 그 질문들에 맞는 답을 제대로 적기는 힘들었습니다. 친구들의 것을 슬쩍 보면 사실 가끔 조금은 부러웠습니다. 어렸으니까요. 지금은 괜찮은데.

나, 어렸을 때 지금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도 아버지가 현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떨어진 적이 있어요. 그때 받은 산재 보험금으로 지금 집을 사는데 큰 보탬이 된 거죠. 그렇게 이 집에 산지 20년이 넘었어요. 그게 그렇게 된 거예요. 근데 있잖아요. 아버지가 또 다치셨어요. 얼마 전에 말이죠. 나, 이제는 그래도 대학생인데 응급실에서 전화받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는 거 있죠. 많이 무서웠어요. 근데 그 산재 보험금으로 우리 집 처음으로 차를 샀어요. 조그마한 경차이지만요. 어렸을 때, 내가 제일 부러운 건 말이죠. 친구들이 주말이면 부모님이랑 차를 타고 어디를 놀러 갔다 왔다고 말하는 거 에요. 그게 제일 부러웠어요. 이제 안 부러워해도 돼요.

내 눈앞에 면접관이 다시 내게 물어옵니다.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입니까?”

“저희 집이 얼마 전에 처음 차를 샀습니다. 제가 운전을 해서 아버지가 일하는 건설 현장에 어머니랑 저랑 아버지랑 셋이 다녀왔어요. 근데 그때 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소녀처럼 웃으시며 너무 좋아하시는 거 에요.”

엄마, 기분 좋으세요?

아들, 엄마 지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너무 행복해.

엄마, 나도 그래요.


“면접관님. 제가 일을 하게 된다 면요. 돈을 조금이라도 많이 벌게 될 수 있다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새벽을 조금은 뒤로 미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은 조금 뒤로 미뤄도 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조금 간절합니다.”



왜 그 날 강혁과 내게 강원도 영덕에 가야 했는지의 이유는 너무 명확하고 간단했는지 모른다. 강혁은 때로는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세 보이다가도 어떤 때에는 그 이의 육체와 정신에 파란 색의 멍들이 새어 나와 나의 눈에 보이고 마음의 무너짐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벙어리와 같이 그는 살고 있었다. 거리 위 사람들은 강혁의 얼굴을 탈처럼 쓰고 걷고 있었다. 그 모두의 표정은 대단히 고단해 보였다. 밖으로 이것들을 내다 버릴 수 없었고 각자의 품에 양껏 품은 채 구릿빛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부자父子의 삶은 똑같았다.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린 그때 파도에 밀려 온 고등어 같았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웃었다. 

살고자 모래 위에서 펄떡이는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는 웃어줬다.

지금도 그 미소의 온도는 기억나지 않는다. 

조소인지, 미소인지. 

우리를 보고 웃어주니 그저 눈 시리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날 하늘은 어찌나 파랗던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새벽이 와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우리는 밤새 결정짓지 못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했다. 

창 밖에 노래방 간판 불빛이 번쩍번쩍 거리며 밤새도록 우리의 방에 냉기와 함께 스미어 들어왔다. 새벽빛이 검은 색에서 파란 색으로 조금씩 변해갈 쯤 우리는 잠이 들었다.

밤에는 불을 낮추고 우리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는 바보 같은 춤을 추었다.

언제 그렇게 환히 웃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웃어뒀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우리는 항상 좋아했다.

겨울이면 방 창문에는 문풍지를 붙였다. 

너무 추워서 그것들을 붙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내년에는 더 튼튼히 창문을 여미리라, 생각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여름이면 에어컨에서는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배수관이 잘못 연결되어 항상 그랬지만 그 아래에는 수건을 받쳐 놓았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괜찮을 것 같다.

멀미가 돌아 파도에 밀려 온 고등어.

우리가 다시 그 바다에 갈 수 있을까.

많은 것들을 미루어도 결국에는 고이 가지런히 놓인 끝이 있었다.

고등어는 끝내 살지 못했다,

비가 그렇게 내리는데도.


강혁은 자살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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