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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시누 Dec 18. 2016

그는 존중받아 마땅한 시민이다

영화 리뷰: 나, 다니엘 블레이크


         지난 한 세기동안 인류는 놀라울 만한 기술 발전을 일구어냈다. 개인 PC의 개발과 웹 서비스의 시작, 문서의 전산화와 스마트폰의 등장. 마치 지금까지 끓어오르던 과학의 재료가 한 순간 뒤섞여 폭발을 일으킨 것처럼 대변화가 일어났다. 그 덕에 우리는 지금도 편히 방이나 카페에 앉아 작은 스마트폰의 화면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런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간에게 분명히 혜택을 주었고 모두의 삶을 한없이 밝은 미래로 이끌어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술’과 ‘존중’은 별도의 문제였다. 존중이 부재한 기술의 발달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삶을 더욱 차갑게 만들어 버렸다. ‘기술 문맹’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모든 시스템의 전산화에 따라 예외 없는 기계적 업무 처리가 이어졌다.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사회 제도는 개개인에 대한 존중을 잠식시켜 버렸다. 정보를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의 격차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격차는 정보를 가진 자들의 배려를 통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조직과 제도는 모두가 기계적으로 움직이길 희망했다. 하나의 배려는 비효율적인 선례를 만들고 전반적 업무의 저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 소시민들은 앞서 언급한 현 제도가 추구하는 효율성의 희생양이 된다. 행정기관에게 이 사람들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오늘 하루 처리해야 할 업무일 뿐이고, 엑셀 문서 속에 있는 하나의 숫자이자 데이터일 뿐이었다. 복지 프로세스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함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그를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돕게 되면 비효율적인 선례가 남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사정은 참으로 딱하다. 다니엘은 심장병이 악화되어 주치의에게 일을 그만두라는 조언을 받는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에 생활비로 쓸 돈이 없다. 그는 국가로부터 질병 급여를 받기 위해 행정 기관과 접촉한다. 하지만 기관의 의료 전문가라는 사람은 심장이 아닌 다른 부위에 대한 질문만을 던지더니 그에게 급여 대상 부적합 판단을 내려 버린다. 그는 결과를 항고해 재심사를 받고 싶지만 그 과정마저 복잡하게 꼬여버리고 언제 재심사를 받을 지도 미지수가 되어 버린다.





         돈이 급한지라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은 질병 급여를 포기하고 실업 급여를 받으려 방향을 튼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취업 특강을 듣고 이력서를 내고 다니라는 명령을 받는다. 졸지에 일도 못하는 데 이력서를 돌려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 다니엘. 일터에서는 그의 이력서를 받고 일을 하러 나오라 하지만 다니엘은 건강 문제로 그를 거절한다. 기업에서는 시간 낭비를 했다며 그를 향해 일 할 생각은 없고 공짜 급여를 받기 위해 이력서만 돌리는 게으름뱅이라는 비난을 던진다. 한 평생을 열심히 일해 온 다니엘은 점점 자존감이 무너지는데, 기관에서는 좀 더 제대 취업을 위해 노력하라며 그를 질타한다.



         업무는 자동화가 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서류를 제출할 수 있는 편한 사회가 되었지만, 아날로그 세대인 다니엘은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친절히 서류를 제출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결국 그를 도운 건 옆집에 사는 젊은 청년들이었다. 취업 특강에 갔더니 인터넷도 제대로 못 쓰는 다니엘에게 강사는 스마트폰과 비디오 면접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고, 무엇이 진정 필요한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정해진 업무만을 수행할 뿐이고, 그 외의 것들은 개개인이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배려도, 존중도 없는 프로세스가 반복될 뿐이다.





         기술은 발전하였지만 존중은 퇴보했다. 인간을 편하게 만들어야 할 기술이 배려의 부족으로 인해 오히려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다시 과거로 퇴고해야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기술의 발전은 분명 다방면에서 인류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고 있다. 부족한 것은 바로 존중이다. 기술과 함께 존중 또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데이터나 점, 혹은 업무의 덩어리로 보지 않고, 사람이라는 가치를 인정하고 사람답게 대우해 주는 것, 그것이 복지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몇 분 늦었다고 케이티처럼 심사 대상에서 탈락되고, 병자를 일터로 밀어 넣는 그런 행동이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삭막한 사회제도와 시스템 속에서도 아직 희망은 존재한다. 정글 같은 사회 속에서도 휴머니즘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고, 아직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서로의 지탱축이 되어 주었다. 다니엘에게는 케이티가 그랬고, 케이티에게는 다니엘이 그러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와 같은 휴머니즘이 개인 간의 연대를 넘어서 사회 제도로 뻗어나갈 때, 비로소 사각지대가 사라진 복지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복지란 것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지 효율과 규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권리를 요구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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